숭의동 사거리에서 남중학교와 숭의국민학교를 지나서 조그만 다리 하나를 건너면 풍경이 완연히 바뀐다.
집들이 드물어지고 아카시아나무들이 줄줄이 서 있고 밭도 나타난다.
시골같은 풍경속에 납짝하고 허술한 초가집이 한채 밭둑옆에 엎드려있었다.
그 집이 ‘콩나물 움집’ 이었다.  콩나물을 길러 파는 집이다.

종종 저녁준비를 하시는 어머니가 그 집으로 콩나물 심부름을 시키시면
나는 우선 거리가 멀어 가기 싫고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그 동네가 가기 싫고  
더구나  컴컴한 움막집안에 들어가면
어둡고 후덕지근한 끈끈한 느낌이 너무 싫어서 상을 찡그리곤 했다.
그래도 그 집 콩나물이 고숩고 맛있다고 어머니는 꼭 그리로 보냈다.

수봉산은 아마 그 콩나물 움집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나싶다.
콩나물집까지만 가 보았던 나는 어느 날 인숙이하고 수봉산에 올라갔다.

인숙이는 같은 동네에 사는 같은 반 친구였다.
인숙이네 집은 우리 집과 사뭇 달랐다.
우선 엄마, 아버지가 안 계시고 할머니하고 살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고 일하는 언니가 있었다.
여자만 넷인 그애네 집은 목조 이층집인데 아랫층에는 딴 집이 살고
인숙이네는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가서 넓은 다다미 거실이 있는 이층에서 살았다.
인숙이네 이층 널따란 창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일들이 흑백사진처럼 까마득히 생각난다.

중학때 나는 이 김인숙하고 많이 붙어다녔는데 수봉산에도 그 애랑 같이 올라갔었다.
햇볕이 따갑고 눈이 부신 날이었나부다.
수봉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얕은 잡목들이 군데 군데 있을뿐
우리 키를 넘을 만한 나무 한 그루 없어 그늘이 없어 눈쌀을 찌푸렸던 기억이 난다.
수봉산은 높은 산도 아니다.  
동네 뒤의 야트막한 야산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한 두어번 더 수봉산에 갔었던 것같다.
그 뒤로는 아마 한번도 더 안 가보고  말았을 것이다.   인숙이도 나도.

인숙이는 중학만 인천에서 다니고 엄마가 계신다는 서울로 갔다.
물론 우리 둘이는 그 후 서로  왕래가 없었다.

몇년후 누구에게선가 바람결에 들은 인숙이 소식은 슬펐다.
대학에 들어가서 첫해,  인숙이는 남자친구하고 한강에 뱃놀이 갔다가 그만 익사했다는 것이다.

눈이 너무 커다래서 마치 언제나 눈물이 고여있는듯했던 인숙이.
예쁘장한 얼굴,  아담했던 몸매,  늘 조용했던 아이.
지금도 나는 인천여중때의 인숙이의 사진을 가지고있다.

인숙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