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닿는 글이라 옮겨봅니다.
장현심은 현재 원주에서 야학의 교장 일을 맡고 있습니다.
자연과 벗하며 수필도 쓰고, 야학의 궂은 일은 도맡아 하면서 전심을 기울여 행복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
                                                  
                                                                                                  장 현 심

  내가 몸담고 있는 N야학에는 얼마 전까지 중등부와 고등부만 있었다.
이 야학은 비정규학교로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와서 무료로 공부를 한다. 선생님들은 전원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에겐 교통비조 차 지급되지 않는데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그만두지 않을뿐더러, 지각이나 결근이 거의 없다.

초등부 신설의 계기가 되었던 그녀가 합격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자격 검정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어깨를 얼싸안고 힘주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누구라도 붙은 사람은 축하를 받아 마땅하지만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게 공부를 시작했는지 아는 나로서는
축하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올해 초였다.
“이 나 이에도 공부를 할 수 있나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이가 아니라 학력이 문제였다.
초등학교를 못 다녔으니 중등과정을 배울 수가 없었다. 아니 배울 수는 있다 해도 시험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람들은 교육부에서 치르는 학력자격검정고시를 치러서 학력을 인정받는데,
초등학교 졸업자격이 있어 야 중등과정을 공부하여 고입자격검정고시를 치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야학 에 입학원서조차 낼 수가 없었다.
야학에 초등부가 없으니 딱하기는 하나 달리 방 법이 없었다. 입학을 시킬 수 없노라고 말하였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뭔가를 내놓는다.
손바닥만한 종이를 펼쳐 보인다. 야학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몇 년을 별러서 찾아왔노라고 한다.
전화를 걸려고 종이를 폈다가 집어넣기를 여러 차례 했는지, 종이가 피어서 가장자리의 모서리가 닳았고,
접힌 자리는 잘라질 듯 나달나달하다.
“여기서 받아주지 않으면 저는 절망 이예요.” 못 배운 것이 한(恨)이 되어 가슴에 체증처럼 얹혀있다고 한다.
시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에서 한 글을 가르쳐주기는 하나 낮에는 일을 해야 하니 그곳에 갈 수도 없다고 한다.
밤에 아이들에게 틈틈이 물어본다지만 그것도 한두 번에 그치게 되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이는 40대 후반이거나 50대 초반일 것 같다.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산 사람처럼 곱상하다.
의복도 반듯하고 태도도 거슬리는 바가 없다. 박절하게 내치기가 저어하여 모습이 곱다는 찬사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면 뭘 해요. 머리는 텅텅 비었는걸요.”

  야학을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으며, 무식을 드러내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는다.
아이의 생활기록부에 무학(無學)이라고 적어 보냈더니 울며 돌아온 얘기며, 대출금의 남은 금액을 읽을 수가 없어 답답했던 일 등등.
그녀의 지난날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 서러움이 내 탓인 양 앉은자리가 송구스러워 자세를 바로 할 수가 없다.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으로 떼쓰듯 사정하는 그녀를 그냥 돌려 세울 수가 없었다.

  긴급 교사회의를 소집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 에 중등과정을 공부하는 사람들보다 사정이 더 절박하다.
야학조차 다닐 수 가 없으니 이 문제를 어찌 풀어야 할까. 공부할 장소도, 선생도 부족하다.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야학선생을 하는데 과정이 없어서 가르치지를 못한다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교무실에 앉혀놓고 누구든 간에 시간 여유가 있는 선생이 개인지도를 하기로 결정 하였다.

  선생도 아닌 사람이 교무실에 있으니,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 이상 할 법도 하다.
그러나 흘끔거리는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녀는 잘 견뎌주었다.
배우려는 결심이 흔들리면 어쩌나 했던 우려가 무색하게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다.
직육면체의 부피 계산이 맞았거나, 음표와 박자를 바르게 연결하고는 너무 좋아서 손뼉을 친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나고 좋은데 아무에게도 자랑을 못해 답답하다고 한다.  

  그녀가 들어온 이후로 초등과정에 들어오려는 학생이 있으면 받기로 했다.
어차피 개인교습인데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초등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교무 실에는 선생의 숫자보다 학생이 더 많게 되었다.  
비좁은 대로 교무실의 칸을 막아 초등부를 개설했다.

  야학학생 중에는 사장도 있고, 회사원도,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하는 사람에, 술집 기도(木戶:きど)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이다.
선생인지, 중등부인지, 아니면 고등부 학생인지, 외양으로나 나이로 또 사회적인 호칭으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다양하기로는 선생 또한 마찬가지다.
현직교수, 퇴직교사, 사장, 공무원, 대학생 등등. 이곳은 정규학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제지간의 불신(不信)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를 않는다.
학생과 선생 사이가 존경과 사랑으로 끈끈하다.
교단만 내려서면 학생과 술도 같이 마시고, 선생이 학 생에게 인생에 대해 한 수 배우기도 하고,
나이든 학생의 하소연에 자식또래의 선생이 맞장구도 친다.
“저에게 동창생이 생기고, 선생님도 계셔서 너무 좋아요.” 동창회 모임도, 스승의 날에 찾아갈 선생님도 없었던 그녀는
지적 허기만을 느꼈던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줄 사람들과의 소통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공부는 이제부터 시작’ 이라는 나의 격려에 “처음 여기 찾아왔을 때 돌려보내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늦게 시작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끝까지 할 거예요.” 그녀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