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김경희 - 인일13 다음카페 가기 - 13회 아이러브스쿨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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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
2004년 이은미
올해로 만46세인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의 일이다.
2학년이 되어서 우리 반을 맡으신 선생님은 그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이 난 이국적인 외모의 노처녀 여선생님이셨다. 약간 신경질적이고 무섭긴 하지만 친절하고 세련된 그 선생님을 우리는 무척 따르며 좋아했다.
그런데 학기 초가 지난 4월 어느 날부터 안색이 안 좋으시던 선생님은 건강이 악화되어 급기야 몸져누운 채 학교에 나오시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까워하기만 하던 우리들은 6월의 어느 주말에 몇몇이서 드디어 선생님 댁에 문병을 가기로 하고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각각 달걀, 꽃, 사탕 등을 나누어 사 가기로 결정했다. 내게는 그 때 막 나오기 시작한 토마토가 배정되었다.
선생님 댁에 가기로 했으니 당장 토마토를 사달라고 조르는 내게 어머니는
“선생님께 문병 가서 드릴 거니까 내일 가기 전에 가게에 가서 싱싱한 것으로 사줄게 조르지 말고 기다려라.”
하셨다.
그런데 일요일인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어머니를 졸라 가게에 가보니 싱싱한 토마토는 새로 안 들어왔고, 며칠 전부터 있던 꼭지가 시든 토마토만 있었다. 그 근처의 가게를 다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십 원짜리 종이 돈 세장을 주시며 선생님 댁까지 가는 동안 보이는 가게에 다 들어가 보고 혹시 구하지 못하면 그냥 빈손으로 가서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라며, 그래도 선생님은 이해하실 거라고 나를 위로하셨다.
짚으로 엮어 만든 달걀 꾸러미를 가지고 온 친구, 꽃을 사온 친구, 사탕을 사온 친구들 틈에서 나는 풀이 죽어 걸어가며 이 가게 저 가게를 지날 때마다 들어가 보았지만 선생님 댁에 도착할 때까지 결국 싱싱한 토마토를 살 수 없었고 내 손에 쥐어진 삼십 원은 꼬깃꼬깃 접혀져 땀에 젖어 있었다.
자리에 누워계시던 선생님은 이제 겨우 국민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우리들의 행동이 대견하다고 하시면서 반가운 눈물을 흘리셨다.
친구들이 정성껏 준비해간 선물을 드리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도 무엇인가를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손에 쥐고 있던 꼬깃꼬깃해진 종이돈 삼십 원을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고 자초지종을 말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선생님은 그 삼십 원을 다시 내 손에 쥐어주시며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괜찮아, 은미야”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은 암이 발병되신 거였고, 그 후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으시게 되어 우리 반은 다른 선생님으로 교체되고 2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예쁜, 미혼의 젊은 나이에 암의 습격을 받으신 불쌍한 선생님은 그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하시게 되었지만 내가 6학년이 되던 해 온 몸으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결국 돌아가셨다.
말기에 병원에 입원해 계신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을 때 나는 2학년 때와 달리 용기를 내어
“선생님, 많이 아프시지요!”
하고 손을 잡아드렸다. 그러나 그 때도 2학년 때의 그 삼십 원에 대해서는 바른 설명이나 변명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심한 고통으로 그리고 독한 진통제에 취해서 눈을 감으신 채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괜찮--아---------”
선생님은 가시고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나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교사가 되었지만 순수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열 때마다 ‘괜찮아.’라는 그 말은 영원히 정리되지 못한 안타깝고도 애절한 빚으로 남아 내 가슴을 때리며 되돌아오곤 한다.
선생님은 그 때 구겨진 삼십 원의 의미를 아셨을까?
그리고 ---- 내 마음을 아셨을까?
2004년 이은미
올해로 만46세인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의 일이다.
2학년이 되어서 우리 반을 맡으신 선생님은 그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이 난 이국적인 외모의 노처녀 여선생님이셨다. 약간 신경질적이고 무섭긴 하지만 친절하고 세련된 그 선생님을 우리는 무척 따르며 좋아했다.
그런데 학기 초가 지난 4월 어느 날부터 안색이 안 좋으시던 선생님은 건강이 악화되어 급기야 몸져누운 채 학교에 나오시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까워하기만 하던 우리들은 6월의 어느 주말에 몇몇이서 드디어 선생님 댁에 문병을 가기로 하고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각각 달걀, 꽃, 사탕 등을 나누어 사 가기로 결정했다. 내게는 그 때 막 나오기 시작한 토마토가 배정되었다.
선생님 댁에 가기로 했으니 당장 토마토를 사달라고 조르는 내게 어머니는
“선생님께 문병 가서 드릴 거니까 내일 가기 전에 가게에 가서 싱싱한 것으로 사줄게 조르지 말고 기다려라.”
하셨다.
그런데 일요일인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어머니를 졸라 가게에 가보니 싱싱한 토마토는 새로 안 들어왔고, 며칠 전부터 있던 꼭지가 시든 토마토만 있었다. 그 근처의 가게를 다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십 원짜리 종이 돈 세장을 주시며 선생님 댁까지 가는 동안 보이는 가게에 다 들어가 보고 혹시 구하지 못하면 그냥 빈손으로 가서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라며, 그래도 선생님은 이해하실 거라고 나를 위로하셨다.
짚으로 엮어 만든 달걀 꾸러미를 가지고 온 친구, 꽃을 사온 친구, 사탕을 사온 친구들 틈에서 나는 풀이 죽어 걸어가며 이 가게 저 가게를 지날 때마다 들어가 보았지만 선생님 댁에 도착할 때까지 결국 싱싱한 토마토를 살 수 없었고 내 손에 쥐어진 삼십 원은 꼬깃꼬깃 접혀져 땀에 젖어 있었다.
자리에 누워계시던 선생님은 이제 겨우 국민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우리들의 행동이 대견하다고 하시면서 반가운 눈물을 흘리셨다.
친구들이 정성껏 준비해간 선물을 드리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도 무엇인가를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손에 쥐고 있던 꼬깃꼬깃해진 종이돈 삼십 원을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고 자초지종을 말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선생님은 그 삼십 원을 다시 내 손에 쥐어주시며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괜찮아, 은미야”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은 암이 발병되신 거였고, 그 후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으시게 되어 우리 반은 다른 선생님으로 교체되고 2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예쁜, 미혼의 젊은 나이에 암의 습격을 받으신 불쌍한 선생님은 그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하시게 되었지만 내가 6학년이 되던 해 온 몸으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결국 돌아가셨다.
말기에 병원에 입원해 계신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을 때 나는 2학년 때와 달리 용기를 내어
“선생님, 많이 아프시지요!”
하고 손을 잡아드렸다. 그러나 그 때도 2학년 때의 그 삼십 원에 대해서는 바른 설명이나 변명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심한 고통으로 그리고 독한 진통제에 취해서 눈을 감으신 채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괜찮--아---------”
선생님은 가시고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나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교사가 되었지만 순수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열 때마다 ‘괜찮아.’라는 그 말은 영원히 정리되지 못한 안타깝고도 애절한 빚으로 남아 내 가슴을 때리며 되돌아오곤 한다.
선생님은 그 때 구겨진 삼십 원의 의미를 아셨을까?
그리고 ---- 내 마음을 아셨을까?
아름다운 외모에 걸맞지 않은 남자이름이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어.
마지막 가시기 전 엄마와 함께 뵌 그 모습은 차라리 뵙지 않는 것이 나을 뻔한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 덜 쓸쓸하셨을거란 생각으로 위안삼곤 했지...
지천명이라는 오십 나이에 보면 너무도 아까운 청춘이셨는데 말야^^
홈피에 올려진 네 글을 보니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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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날랜 펜을 굴리며 글쓰는 네 모습이 참 근사하당^^
은미야~막바지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고...
늘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