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오랜만에 게시판에 들어왔다. 역시 게시판지기인 영희의 활약상이 눈부시네. 정말 수고한다. 합창제때 못가서 서운하다. 내게 중요한 다른 일이 있어. 한살림 일. 모두들 정말 대단해. 열심히 해주기를 부탁!

좀 엉뚱한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이런 얘기도 한번 읽어봐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다. 때로 내가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이런 기사들을 일으며 하거든.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같은 올리브 나무들의 모습이 자꾸 없어진다는구나.
깊어가는 가을, 정말 나무들이 예쁘다. 영희야, 청계산 사진 잘 봤다.
중앙박물관에서 지금 하고 있는 <루브르 특별전> 전시회 참 괜찮아, 가고 싶은 친구들 가보면 실망은 하지 않을 것 같더라.
그럼 합창제에서 즐거우기를... 윤 선혜.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반전모임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들락거리며 반전활동을 펼치는 작가 오수연씨와 몇몇 분들이 만든 모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난 주에 원고청탁을 해왔습니다. 모임에서는 '프레시안'을 통해 한국을 다녀간 팔레스타인 문인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한국의 문인들이 답신을 보내는 기획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편지를 보내온 바쉬르 살라쉬라는 시인은 그곳의 환경파괴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답신자로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에서는 저를 지목했습니다. 아마 그 편지에 그곳에서 이스라엘리들에 의해 베어지는 올리브 나무, 고갈되는 지하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시간에 한 명 꼴로 사람이 죽어가는 분쟁지의 만나 본 적 없는 시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멀쩡하게 잘 지내면서, 피를 흘리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그들을 위로해야 할지 아득했습니다. 결국, "이곳의 우리 삶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분쟁지의 삶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점령당한 자'의 의무를 다하시기 바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궁색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이 들었습니다.
아래 글은 팔레스타인의 시인이 한국에 보내온 편지입니다. 제 답신은 '프레시안'의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라는 메뉴와 저희 게시판(사는 얘기들판)에 담겨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들어가시면, 다른 편지들과 한국문인들의 답신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최성각



팔레스타인은 몇 명인가

바쉬르 샬라쉬/팔레스타인 시인

집으로 돌아오다

한국에서 여기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처음 생긴 일은 자동차 사고였다. 집이 가까운데도 차가 망가져서 집으로부터 여전히 멀기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나와 부모님은 견인차를 기다렸다. 누구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오지 않는 견인차를 비난하셨고 아버지는 내가 운이 나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도로변에 앉아 외로움을 느끼며 어둠과 공허를 바라보았다. 견인차 운전사에게 우리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샤타 수용소를 들먹여야 했으므로 더욱 괴로웠다. 그 수용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명과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누군가에게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 정체성을 거슬러야 했던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헤브루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교수들에게 내 고향 마을이 어디인지 설명해야 할 때면 갈릴리라거나, 아카 북쪽라거나, 나자렛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나는 결국 카마엘 옆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카마엘, 내가 사는 곳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하는 이 장소는, 60년 대 말에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 아랍 땅을 몰수해서 그 위에 새로 건설한 도시다. 반면에 내가 사는 마을인 아랍베는 최소한 삼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기억의 불

1948년 이스라엘 건립 초기 몇 주가 지나기도 전에 승자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켰다고 상황이 끝난 게 아님을 깨달았다. 패자들의 집단적 기억이 끊임없는 위협이 되리라는 점을 그들은 알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정책 입안자들은 팔레스타인 역사 서술을 고의적으로 훼손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화"에 착수했다. 이스라엘화란 구체적으로 장소와 전통의 이름을 성경적인 것들로 바꾸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전통음식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음식이 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탈 알라비(풀 우거진 언덕)는 텔아비브로, 아카는 아코로, 움 루쉬루쉬는 에이랏으로 바뀌었다. 세계 각지에서 새로 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뭔가 공통점이 있으며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연장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명칭 변경이 반드시 필요했다.

공식 종교로서의 고고학 이스라엘 연구기관들은 자기들이 여기 존재했던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강박에 사로잡혀 지층을 파고든다. 그들은 그럴수록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적 기억을 위태롭게 하는 사실이 튀어나올 뿐임을 모른다. 어마어마한 노력과 엄청난 공공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굴은 아직도 그들의 '귀향'이 이천 년간의 유랑 끝에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것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성경적 신화로 무장하고 이스라엘은 흙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가 자기들이 이 땅의 합법적 계승자라고 주장할 거리를 찾지만, 그럼으로써 지역의 삶과 현실에 재앙만 만들어내고 있다.

올리브 나무

분리장벽을 세우기 위해 올리브 나무들이 뽑히는 꼴을 보는 심정은 고통스럽다는 말로는 형용이 안 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늘 올리브 나무와 강한 유대감을 느껴 왔다. 어떤 이들은 이 나무가 꾸란의 축복받은 나무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올리브 나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내내 올리브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에 공공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런 활동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땅의 관계를 보여주는 의례였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결혼식은 수확 시기 직후에 거행되었다.




관계자에게

몇몇 조사기관의 보고서에 다음 통계가 나온다.

- 4만 그루가 넘는 열매 많은 올리브 나무가 이스라엘의 "안보"를 이유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뿌리 뽑혔다.
- 지난 4년간 3만여 채의 팔레스타인 가옥이 역시 "안보"를 이유로 파괴되었다.
- 지난 4년 동안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교했고 5만 명이 부상당했다.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나 다른 공식 기관에 통보하지도 않고 팔레스타인 땅에 화학 폐기물을 버려 왔다.
- 서안 지구에 불법적으로 거주하는 이스라엘 정착민 20만 명이 그 지역 수자원의 63%를 사용한다. 3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머지 27%의 물로 살아야 한다.
- 분리장벽은 팔레스타인 도시들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 팔레스타인의 암 발병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
- 가장 큰 담수 저장소인 티베리아스 호수는 20년 안에 마를 것이다.
- 사해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베이트 하눈 학살 사건1)으로 지난 이틀 동안 5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자와 서안 지구에서 살해당했으며 희생자들 중에는 아이들과 여성들이 많다. 한 시간마다 한 명씩 죽어간 셈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두 몇 명인가? 그리고 지금은 몇 시인가?

역자 주

1)베이트 하눈 학살 사건: 11월 1일부터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베이트 하눈을 집중 포격하여 8일 새벽 집에서 잠자던 일가족 13명이 몰살하는 등 80여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었거나 다쳤다. 필자는 이 글을 9일에 썼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기획ㆍ번역

  *프레시안, 200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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