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수 2,306
<수필>
피뿌리풀꽃 터
이정원
그곳만 떠올리면 무수히 많은 피뿌리풀꽃이 피어 바닥을 뒤덮는 듯하다. 선홍색의 긴 꽃받침 통을 지닌 모양새로 원줄기 끝에서 스무 송이씩 모여 피는 꽃도 꽃이려니와, 캐보면 핏빛을 띠고 있다는 그 뿌리가 마음에 밟혀 쉽사리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
처음 그곳에 다녀온 날은 몹시 앓았다.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그대로 내 안에 이입된 탓도 있었고, 인솔해간 아이 하나를 뒤통수까지 쳐가며 심하게 나무란 탓도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문예반원을 서대문 형무소 앞으로 모이라고 한 것은 전일제 클럽 활동이 있던 여름날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반드시 교복을 입고 오라고 전날 누누이 일렀다.
한데 그 중의 한 녀석이 다른 클럽 활동반은 자유복장이라며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타났다. 그 꼴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서 ‘너는 당장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다들 교복 차림인데 저만 그러고 온 것을 도리어 자랑인 양 우쭐대기까지 하는 걸 보고는 결국 손이 나갔다. 화가 나면 손을 대지 않는다는 원칙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안 그래도 무거운 분위를 내는 장소였는데, 그로해서 맞은 아이와 덩달아 겁을 먹은 다른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까지도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형무소 담 안을 들어섰다. 다들 죄수가 되기라도 한 양 입이 꽉 붙어 있었다.
일제 시대에 경성감옥으로 신축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불리다가 해방이 되면서 서울 형무소에서 다시 서울 구치소로 개칭된 그곳은 구치소 건물이 의왕시에 지어지면서 이전한 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전시관의 일층에 있는 기획 전시실에서는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순국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자료가 모아져 있었다. 표정이 더욱 굳어지기 시작한 건 이층에 있는 형무소 역사실과 옥중 생활실을 돌아보면서부터였다. 고문과 탄압에 관한 실상은 물론이고 직접 느껴볼 수 있게 만든 벽관과 독방 앞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왔다.
더구나 지하층에 있는 임시 구금실과 고문실에서 일제가 여자 죄수들에게까지 행한 잔혹한 고문의 모습을 그 소리와 더불어 재현한 것을 볼 때는, 마치 내가 당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붉은 벽돌로 된 옥사에 직접 들어가자 양쪽으로 이어진 감방 철문 너머의 낮은 한숨과 신음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일반 옥사 뒤쪽 언덕에 있는 나환자의 옥사에서는, 계단으로 쓴 침목에서 나는 콜타르 냄새가 그 격리 수용소에 밴 냄새처럼 여겨져 코가 막아졌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사형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죄수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울었다는 그 나무는 피울음이 거름이 되어서인지 푸른 가지들을 쭉쭉 뻗어 올리고 있었다. 사형장 밖의 미루나무는 그렇게 잘 자라는데 사형장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늘 시들시들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지막 기대마저도 무너진 이들의 탄식이 그 나무를 휩싸고 돈 탓이겠구나 싶었다.
오래 전 무학대사가 그곳을 지나다가 여러 생과부와 홀아비가 나올 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더욱이 사형장이 들어선 곳을 지목해 피가 끓는 터라고 했다니, 애초부터 수많은 목숨이 교수대의 밧줄에 매여 스러져갈 예사롭지 않은 장소였나 보다.
사형장을 나와 역사관 후문 쪽으로 난 길의 시멘트 보도블록 위를 걷노라니, 갑자기 그 블록의 붉은 색이 핏빛을 띠고 있다는 피뿌리풀꽃의 뿌리로 보여 왔다. 나중엔 그 길 전체가, 아니 서대문 형무소의 온 터가 피뿌리풀꽃으로 뒤덮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곳에서 고문 받으며 죽어간 이들의 피가 땅 속에 스며들어 피뿌리풀꽃의 뿌리를 만들어내고, 해마다 여름이면 핏빛을 한 그 꽃들이 피어나 맺힌 한을 토해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문으로 들어올 때 옷차림이 나쁜 한 아이에게 나갔던 내 손에 행여 살기라도 실려 있었더라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수형의 생활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등에서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그런 기억들 때문인지 춘천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하기로 한 이번 작가 기행은 떠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임의롭게 떼놓아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작업을 나가서 비어있는 그들의 방 앞에 섰을 때는, 그곳을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죄스러워 눈길이 자꾸만 옆으로 갔다.
내가 지금 수형의 삶을 이어가지 않는 것은 그들보다 운이 좋았거나, 그들이 맞닥뜨렸던 상황보다 좀 나은 상황에 있기 때문일 뿐인데. 그래서인지 말소리가 텅텅 울리는 복도를 지나다가 빨래실에서 작업 지시를 받고 있는 몇 명의 수감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른 고개가 수그러졌다.
서대문 형무소의 분위기와는 물론 큰 차이가 나지만 죄를 짓고 갇혀있다는 데서 오는 고통은 진배가 없을 테니, 이곳에도 피뿌리풀꽃이 피어나기는 매 한 가지 아닐까. 푸른 수의 차림의 수감자들이 공을 차고 있는 운동장에도 그들이 흘리는 가슴의 피를 빨아들인 피뿌리풀꽃이 여름이면 쫙 깔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떤 종교적인 장소보다 말소리와 발소리와 마음소리를 낮추게 하는 숙연한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피뿌리풀꽃 터
이정원
그곳만 떠올리면 무수히 많은 피뿌리풀꽃이 피어 바닥을 뒤덮는 듯하다. 선홍색의 긴 꽃받침 통을 지닌 모양새로 원줄기 끝에서 스무 송이씩 모여 피는 꽃도 꽃이려니와, 캐보면 핏빛을 띠고 있다는 그 뿌리가 마음에 밟혀 쉽사리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
처음 그곳에 다녀온 날은 몹시 앓았다.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그대로 내 안에 이입된 탓도 있었고, 인솔해간 아이 하나를 뒤통수까지 쳐가며 심하게 나무란 탓도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문예반원을 서대문 형무소 앞으로 모이라고 한 것은 전일제 클럽 활동이 있던 여름날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반드시 교복을 입고 오라고 전날 누누이 일렀다.
한데 그 중의 한 녀석이 다른 클럽 활동반은 자유복장이라며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타났다. 그 꼴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서 ‘너는 당장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다들 교복 차림인데 저만 그러고 온 것을 도리어 자랑인 양 우쭐대기까지 하는 걸 보고는 결국 손이 나갔다. 화가 나면 손을 대지 않는다는 원칙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안 그래도 무거운 분위를 내는 장소였는데, 그로해서 맞은 아이와 덩달아 겁을 먹은 다른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까지도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형무소 담 안을 들어섰다. 다들 죄수가 되기라도 한 양 입이 꽉 붙어 있었다.
일제 시대에 경성감옥으로 신축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불리다가 해방이 되면서 서울 형무소에서 다시 서울 구치소로 개칭된 그곳은 구치소 건물이 의왕시에 지어지면서 이전한 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전시관의 일층에 있는 기획 전시실에서는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순국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자료가 모아져 있었다. 표정이 더욱 굳어지기 시작한 건 이층에 있는 형무소 역사실과 옥중 생활실을 돌아보면서부터였다. 고문과 탄압에 관한 실상은 물론이고 직접 느껴볼 수 있게 만든 벽관과 독방 앞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왔다.
더구나 지하층에 있는 임시 구금실과 고문실에서 일제가 여자 죄수들에게까지 행한 잔혹한 고문의 모습을 그 소리와 더불어 재현한 것을 볼 때는, 마치 내가 당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붉은 벽돌로 된 옥사에 직접 들어가자 양쪽으로 이어진 감방 철문 너머의 낮은 한숨과 신음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일반 옥사 뒤쪽 언덕에 있는 나환자의 옥사에서는, 계단으로 쓴 침목에서 나는 콜타르 냄새가 그 격리 수용소에 밴 냄새처럼 여겨져 코가 막아졌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사형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죄수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울었다는 그 나무는 피울음이 거름이 되어서인지 푸른 가지들을 쭉쭉 뻗어 올리고 있었다. 사형장 밖의 미루나무는 그렇게 잘 자라는데 사형장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늘 시들시들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지막 기대마저도 무너진 이들의 탄식이 그 나무를 휩싸고 돈 탓이겠구나 싶었다.
오래 전 무학대사가 그곳을 지나다가 여러 생과부와 홀아비가 나올 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더욱이 사형장이 들어선 곳을 지목해 피가 끓는 터라고 했다니, 애초부터 수많은 목숨이 교수대의 밧줄에 매여 스러져갈 예사롭지 않은 장소였나 보다.
사형장을 나와 역사관 후문 쪽으로 난 길의 시멘트 보도블록 위를 걷노라니, 갑자기 그 블록의 붉은 색이 핏빛을 띠고 있다는 피뿌리풀꽃의 뿌리로 보여 왔다. 나중엔 그 길 전체가, 아니 서대문 형무소의 온 터가 피뿌리풀꽃으로 뒤덮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곳에서 고문 받으며 죽어간 이들의 피가 땅 속에 스며들어 피뿌리풀꽃의 뿌리를 만들어내고, 해마다 여름이면 핏빛을 한 그 꽃들이 피어나 맺힌 한을 토해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문으로 들어올 때 옷차림이 나쁜 한 아이에게 나갔던 내 손에 행여 살기라도 실려 있었더라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수형의 생활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등에서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그런 기억들 때문인지 춘천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하기로 한 이번 작가 기행은 떠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임의롭게 떼놓아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작업을 나가서 비어있는 그들의 방 앞에 섰을 때는, 그곳을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죄스러워 눈길이 자꾸만 옆으로 갔다.
내가 지금 수형의 삶을 이어가지 않는 것은 그들보다 운이 좋았거나, 그들이 맞닥뜨렸던 상황보다 좀 나은 상황에 있기 때문일 뿐인데. 그래서인지 말소리가 텅텅 울리는 복도를 지나다가 빨래실에서 작업 지시를 받고 있는 몇 명의 수감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른 고개가 수그러졌다.
서대문 형무소의 분위기와는 물론 큰 차이가 나지만 죄를 짓고 갇혀있다는 데서 오는 고통은 진배가 없을 테니, 이곳에도 피뿌리풀꽃이 피어나기는 매 한 가지 아닐까. 푸른 수의 차림의 수감자들이 공을 차고 있는 운동장에도 그들이 흘리는 가슴의 피를 빨아들인 피뿌리풀꽃이 여름이면 쫙 깔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떤 종교적인 장소보다 말소리와 발소리와 마음소리를 낮추게 하는 숙연한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2005.08.27 00:55:11 (*.247.152.31)
정원아, 안녕? 반갑다.
서대문 형무소에 갔었구나.
무거운 장소에, 아이들을 인솔해야 하는 스트레스 받는 상황 속에서 복장 불량인 아이의 돌발행동에 속상했겠다. 우리가 스트레스 없이는 살 수 없겠지. 그런데 1년 후에도 이 일로 스트레스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내려놓고 지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한다.
이번 방학동안 받은 연수에서 건진 가장 큰 소득이야. 이젠 화낼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애.
글 잘 읽었어. 너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가서 느꼈던 그 때의 감정이 엉클어진 머리를 빗었을 때처럼 시원하게 정리되는 듯 했단다.
정원아, 반갑다. 우리 곧 만나게 되겠지?(x1)
서대문 형무소에 갔었구나.
무거운 장소에, 아이들을 인솔해야 하는 스트레스 받는 상황 속에서 복장 불량인 아이의 돌발행동에 속상했겠다. 우리가 스트레스 없이는 살 수 없겠지. 그런데 1년 후에도 이 일로 스트레스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내려놓고 지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한다.
이번 방학동안 받은 연수에서 건진 가장 큰 소득이야. 이젠 화낼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애.
글 잘 읽었어. 너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가서 느꼈던 그 때의 감정이 엉클어진 머리를 빗었을 때처럼 시원하게 정리되는 듯 했단다.
정원아, 반갑다. 우리 곧 만나게 되겠지?(x1)
사형수와 별로 원하지도 않았던 우연한 만남을 하게 되지만, 점차 그 만남에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사형수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되고 안타까움에 마음 졸이고 후둑이는....
절망의 끝까지 가 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믿음이 둘 사이에 흐르지.
그 남자는 어렵게 힘겹게 나중에 자기의 마음을 조금 펼쳐 보이지만, 이미 세상의 막바지에 와 있고.
아니, 이미 벌써 그 전부터, 그의 일생 자체가 막바지에서만 맴돌았던 건지도 모르지.
네 글을 보니 그 생각이 난다.
전두환 시절에 내가 부담임으로 있던 반 아이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는데 몇 년이 지난 후 옮긴 학교로 찾아 왔더라. 근데 오른쪽 손목이 잘라진 거야.
불편하게 밥을 먹는 그 아이 앞에서 머리가 깨이지 못해, 싸우지 못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
조심스럽고 진중하고 완벽해 편안히 읽을 수 있는 너의 글을 보니 나도 좀 진중하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원아 잘 읽었어. 읽은 값 맛있는 거 사주는 걸로 대신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