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트럼펫 수선화
                                                                                                                                    이정원

군악병으로 입대를 앞둔 아들이 외할아버지를 뵙고 오겠다고 했다. 입대 전에 인사도 드릴 겸 트럼펫 연주를 들려드려야겠다는 거였다. 군대에서 쓰이는 곡을 주로 연습하는 줄은 알았지만, <star march>라는 곡을 따로 연습해둔 줄은 몰랐다. 행사에 참여하는 장성들을 맞이할 때 연주하는 곡이라고 했다.
한 달쯤 전에 아들이 친정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에, 입대를 앞두고 군인 출신인 외할아버지가 가슴에 와 닿아서 그러나보다고만 여겼다. 그랬더니 며칠 전에 저희 학교 신문을 한 장 내밀며 읽어 보라고 했다. 거기엔 ‘트럼펫’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실려 있었다.
“...... 요즘엔 <star march>라는 트럼펫 곡을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있다. 장성을 위한 곡이라서 그런지 씩씩하면서도 웅장한 게 저절로 기품이 느껴진다. 내가 이 곡 연주에 유난히 심혈을 기울이는 건 외할아버지 생각이 나서다.
육군 사관학교 8기생으로 6.25동란과 빨치산 토벌에서 부상까지 입으며 세운 공으로 무공 훈장을 타신 할아버지는 별을 달기 직전에 전역하셨다. 반평생을 군대에서 보내셨기 때문에 전역 후의 사회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으셨다고 들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이 마침 외할아버지 댁 근처라서 전보다는 자주 찾아뵐 수 있었다. 그때마다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게 되곤 했는데 차츰 존경심이 일었다. 단순히 나의 할아버지여서가 아니라, 나라의 역사적 위기를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 나온 노인이기 때문이었다.
입대하기 전에 멋지게 불어드리고 싶은 <star march>는 오로지 외할아버지 한 분만을 위한 연주가 될 것이다. 비록 양 어깨에 별을 단 장성이 되지는 못하셨지만, 그분의 삶 안에 살아있는 군인 정신은 장성으로서의 예우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언제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트럼펫 연주로 경의를 표하겠다는 마음까지 먹게 되었는지. 딸인 내가 못하는 걸 손자인 네가 채워드리는구나 싶어 대견했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아들이 군악병으로 입대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지난 해 여름 삼십육 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될 때였다. 사람도 견디기 힘든 더위에 개는 더욱 버티기가 힘들었는지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가 내 발목을 물었다. 사 년을 넘게 키운 개에게 물려 열 바늘 이상 꿰맸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짢기 그지없는데, 그 개를 농장으로 보내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도둑까지 들어서는 집안을 온통 헤집어 놨다.
도저히 그대로는 배길 수가 없어서 개를 좋아하던 예전의 동료교사에게 강아지를 한 마리 구해달라고 했다. 마침 낳은 지 한 달 된 발바리 새끼가 있다고 해서 가지러 간 길에 트럼펫을 전공한 그가 먼저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입대를 두 달 남겨두고 있다고 하자, 전에 본 기억으로는 입술이 트럼펫을 불기에 적당했는데 군악병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돌아와서도 며칠 만에야 지나가는 말로 아들에게 이야길 했다. 악기 다루는 걸 좋아하기는 했지만 반응이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 자리에서 먼저 지원한 것을 포기하고 트럼펫을 배워 군악병으로 가겠다는 거였다. 개에게 물려서 시작된 일이 거기까지 미치는 걸 보며 남편은 나보다 더 어이없어 했다.
그 후로 몇 달간을 학교에 나가랴 트럼펫 불랴 쩔쩔매더니만 국립현충원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왔다. 처음엔 줄곧 삑삑대기만 해서 언제나 제대로 된 소리가 나려나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귀에 익은 군가와 애국가 소리가 집안에 우렁우렁 울려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들이 트럼펫을 불게 된 뒤에야 알게 된 거지만, 트럼펫 소리에는 힘찬 기상과 더불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려지는 슬픔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 소리로 장성을 위한 곡을 연주해 드린다고 했으니 친정아버지께서 얼마나 뿌듯해 하실까. 노년에 외손자로부터 장성으로서의 뜻하지 않은 예우를 받으시며 더는 여한이 없다 하시고도 남을 게다.
문득, 아들이 태어났을 때 천사가 금빛 나팔을 불며 머리맡을 나는 것 같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만큼 환희에 찼던 내 기억으로 해서 다 자란 아들이 트럼펫을 불게 된 건 아닌지. 아들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게 이미 예정된 대로 맞추어가는 퍼즐의 조각들인지도 모른다.
봄이면 노란 꽃을 피우는 수선화 중에 트럼펫 수선화가 있다. 꽃잎 가운데 긴 통모양의 나팔꽃 부관을 가지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기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르시스의 전설을 담고 있어 환한 빛깔이면서도 우울함이 깃든 듯한 수선화였는데, 나팔꽃 부관이 있는 트럼펫 수선화에게서는 자기 연민을 밖으로 끌어내는 힘이 느껴져서 대하기가 좋다.
지나치게 자기 안으로만 파고들어서 내심 걱정을 시키던 아들이 내쉬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 트럼펫 연주를 통해, 입대 전에 퇴역 장교인 외할아버지를 흐뭇하게 해드렸듯이 입대 후에는 다 같이 힘든 병영 생활일지라도 동료 병사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기를. 트럼펫 수선화가 피는 계절은 벌써 지났지만, 아들이 제대하고 돌아올 때까지 남편과 나는 내내 그 계절에 머물러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