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소년의 추억- 강원도 산골에서  
12.강인숙   2005-03-23 13:31:08  |  조회 : 23


나 강인숙이야.

일전에 내가 우리 남편이 마음이 따뜻한 강원도 사람이라고 말했지?
우리 남편이 자기의 어린 시절을 내게 얘기 해준 건 데 나의 심금을 울려 줘서 한 번 글로 써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다음과 같이 어린 시절을 고백 했어. 너무 재미 있어서 너희들과 나누고 싶어.





                           동화 속의 소년

나는 50평생을 살아 오면서 줄곧 행복하였습니다. 나의 행복 그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나의 고향 강원도 횡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 자란 이야기며 서울로 전학 와서 적응하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직장 동료 들이나 미국 사람들에게 들려 주노라면, 그들은 머나먼 옛 나라 이야기라도 듣는 듯이 재미있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스토리에 나를  “동화 속의 소년” 같다고 너스레를 떠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호들갑을 보노라면 마음이 뿌듯해 집니다. 물 맑고 해 맑은 우리의 고향 산천을 배경으로, 순수하고 소박했던 고향 사람들과 함께 엮은 정감 어린 추억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무한한 부러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총 가구 수가 20여 호 남짓한 작은 산골 마을, 약사전 (서원면 석화 2리) 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에서 자란 나는, 면 소재지에 있는 서원 초등 (국민) 학교까지 5리(2 KM)를 혼자서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6.25 동란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은 전쟁 중에 많이 죽어서 우리 동네에는 내 나이의 애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학교를 파하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 갈 때에는 한적한 산골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외로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였습니다. 심심함을 덜기 위해 신작로에 지천으로 깔린 돌들을 발로 차기도 하고, 무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길 옆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며 걷기도 했습니다. 길섶의 산딸기를 따 먹기도 하고 키 큰 나무나 웅장한 바위마다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기도 하며 신작로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든 통학 길도 장마철이 되면 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어난 냇물을 피하기 위해 길도 없는 험한 산등성이를 따라 돌아 가기도 하고, 그 마저 안 되는 장마철에는 홍수가 멎고 수위가 내려가서 돌다리를 건널 수 있을 때까지 며칠씩이라도 학교를 쉬어야만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산골짜기로부터 몰아 치는 눈보라를 작은 두 뺨으로 마주 치며 산골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에는 교실 3개와 교무실 1개뿐이었고,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을 포함하여 모두 4분뿐이셨습니다. 학생 수는 전교생을 통틀어 겨우 150명이 고작이었습니다.
1-2학년 3-4학년, 5-6학년이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그야말로 미니 학교였는데, 나는 18명 밖에 안 되는 우리 학년에서 일등을 한 번도 못 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등은 언제나 면장 아들인 윤형 이가 독차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윤형 이는 가끔씩 나에게 그 애 친척이 산다는 횡성 읍이며, 원주 같은 도회지의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여러 가지 신기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는 그저 먼 다른 나라의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포장도 안된 신작로 길을 걸어 다니면서 몇 달 걸러서야 한 번씩 볼 수 있는 군용 트럭이나, 횡성 읍 장터에 드나드는 “제무시”(GMC) 트럭을 보며 기막히게 빠른 문명의 이기에 놀랐습니다. 이 때부터 나는 나의 장래의 희망으로 ‘운전사’를 점 찍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 가서는 선생님의 박학 다식하심과 아울러 학생들을 회초리로 마음대로(?) 때릴 수 있는 그 막강한 권위(?)에 매료되어 장래 희망을  ‘선생님’으로 바꾸었습니다.

정기 버스 노선도 없는 산골 마을에 살면서 나는 친구들로부터 이야기만 들은 횡성 읍이나 원주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버스도 구경하고 싶고 트럭도 매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주어 지지 않았습니다. 또 유식한 어른들로부터 말로만 전해 들은 기차도 어서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날씨가 흐린 날이면 산울림을 통해 유난히 크게 들려 오는 기적 소리에, 산골 소년은 도회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꿈이 부풀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마을을 통틀어도 라디오 한 대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서울에서 오신 동네 분의 친척 아저씨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오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어 구경을 하곤 했습니다. 하물며 호기심 많은 나 같은 어린애에게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처음 보는 라디오가 너무나 신기해하는 는 나에게, 그 아저씨는 라디오 속에 조그만 사람들이 많이 들어 있어 얘기도 하고 노래도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에 정말로 그런 줄로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저씨께서는 서울로 떠나시면서 진실대로 설명하여 주셨는 데 "사실은 거기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방송국에서 높은 산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전파를 띄우는 것인 데, 라디오를 가지면 전국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라디오가 무척 가지고 싶었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이라서 아예 포기해 버리고, 그 대신 내 노래를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들려 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방송이 무엇인지 전파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해가 저물도록 목청 높여 노래를 불러댔다. 그리하면 내 노래가 전파를 타고 높고 멀리 퍼져 나가서 전국의 라디오를 통해 들려질 것이라고 순박하게 상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횡성 읍에도 못 가본 촌놈이 바로 서울로 왔으니 내가 겪은 문화적 충격은 보통 큰 게 아니었습니다. 서울로 가는 중앙선 기차를 타기 위해 산골 길을 걸어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양동 역까지 30리 (12 KM)를 걸어야 했습니다. 양동역 까지는 산길과 신작로를 되풀이하며 가파른 고개를 3개나 넘어야 하므로 나 같은 어린애에게는 꽤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고개 마루에서 내려다 본 광경은 힘든 걸음을 보상해 줄만큼 과히 장관이었습니다. 역 앞에 똑 바로 길게 뻗은 2 줄기의 평행한 냇물- 나는 그것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무척 궁금했습니다. 나의 경험으로는 그것은 고향의 산에 올라 가서 내려다 보았을 때 햇빛에 반짝이며 흘러가던 시냇물, 그 밖에는 달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에 가까이 가서 직접 보니 그것은 햇빛에 반짝이는 두 줄기 철로였습니다. 첫 번째 충격은 그렇게 왔습니다.

처음 타 보는 기차도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우선 트럭과는 비교도 안되게 크고 육중한 것이 칸이 수 십 개나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 서원 면 사람들이 모두 타도 자리가 남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 타 보는 열차 내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철로 변의 낯선 풍물들을 구경하며 흥분 속에 청량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마포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가는 도중 내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번잡한 도회의 풍경에 계속 어리둥절해 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버스며 수많은 합승과 택시, 줄을 따라 달리는 전차의 종소리, 길 옆에 늘어 선 높은 건물들이 나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하였습니다. 나의 그 때까지의 경험으로는 2 층이라는 건물의 개념이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았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그날,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대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바깥을 내다 보니, 이게 웬 일인가?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습니다. 산골 마을에서는 하늘을 쳐다 보아야만 볼 수 있던 별들이 서울에서는 모두 땅으로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나는 그때까지도 전등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희미한 등잔불과 촛불만 알던 나는, 거리 곳곳의 전신주에 매달려 골목 골목을 환하게 비춰 주던 수많은 외등의 불빛을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 온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지 못할 에피소드입니다.

내가 겪은 문화적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로 전학 온 서울 학교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실이 3개밖에 없던 산골 학교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건물도 무척 크고 학생도 많았습니다. 교실은 모두 2 층짜리로 5동이나 되고 80명 이상 되는 학급이 40개가 넘는 복잡한 학교였습니다. 나는 4학년 6반에 편입 되었는데, 첫 날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반 애들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 강원도 서원 초등학교에서 전학 온 정병혁이다. 너희들이 잘 보살펴 주어라.”  뒤쪽에 자리를 정해 주셨는데 옆의 짝꿍이 처음부터 “촌뜨기” 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별로 싫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시골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서울 애들이라고 해서 모두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할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산골에서 왔다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시간도 안 돼서 곧바로 생기고 말았습니다.

첫 시간 수업이 끝나고 ‘볼 일’을 보고 싶다고 하자 옆에 앉은 짝꿍이 친절하게 나를 화장실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용변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 가야 하는 데, 도저히 교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대해 보는 2층 건물이 설어서인지, 여러 차례 계단을 오르내리며 찾아 보았지만 여기도 거기 같고 거기도 거기 같아 헤매기만 하였습니다. 결국은 한 시간을 다 까먹고 나서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보내신 짝꿍을 만나서야 겨우 교실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는 군것질이라고는 별로 모르던 나였는데 나는
친구의 끈질긴 유혹과 등살에 못 이겨서 내 용돈을 털어 아이스크림 2개를 샀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처음 보는 나는 불안한 마음에 도저히 먹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이스크림 모양이 꼭 코 풀 때에 나오는 끈적대는 액체-흉측한 코와 가장 흡사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나는 친구에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친구에게 모두 주어 버렸습니다.
(아뿔싸, 훗날 먹어 보니 그렇게도 맛있는 아이스크림인데 그것도 모르고 -------.  )

어느 날은 엉뚱한 거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와는 달리 서울 애들은 꽤 짓궂은 애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나만 순진하고 착한 것일까 하고 스스로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려면 마음에는 없더라도 가끔 서울 애들처럼 짓 궂은 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쉬운 것이 여자 애들 노는 데 가서 훼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호주머니에 숨겼던 면도칼을 얼른 꺼내서 여자애들이 즐기고 있던 고무줄을 단호하게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자 한 계집 아이가 성이 나서 나에게 달려 들었습니다. 나는 다른 애들이 하듯이 사정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 달아났다. 계획대로 성공을 거둔 후 나는, 이제는 나도 서울 애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고 잠시 뿌듯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날 저녁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재수없게도 엄마하고 같이 오던 그 애한테 걸려서 그 애 엄마한테 붙잡혀 가 된 통으로 혼나고 말았습니다. 우연히도 그 애가 몇 집 건너 이웃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 도둑이 잘 잡힌다는 속담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다음 해의 일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하고, 정든 교실에 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뒤편 게시판에는 으레 학생들의 솜씨를 자랑하는 그림이나 작문 등의 작품들이 붙어 있게 마련이었지요. 저는 게시판 가득히 붙어 있는 친구들의 편지들에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제목들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결같이 “ 서울로 전학간 그리운 병혁에게” 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마음이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내가 서울에서의 Culture Shock를 딛고 어렵게나마 적응할 수 있었던 그 뒤에는, 나도 모르게 나를 위해 격려해 준 다정한 나의 친구들과 그들이 쓴 따뜻한 편지와, 고향 분들의 훈훈한 격려의 힘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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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나의 친구들, 동료 직원들, 거래선 사람들 그리고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때묻지 않은 내 고향의 이야기이며, 순수했던 나와 우리들 모두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에 나는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여러 번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내가 살던 자그만 집과 내가 장마철에 통학하던 산 길, 물고기 잡던 그 시냇가, 밤 하늘을 보며 별을 헤던 작은 언덕, 썰매 타다가 물에 빠졌던 그 개울, 남의 밤 따다가 들켜서 달아 났던 그 험한 자갈 길, 머루 따러 다니던 좁은 산길, 모두가 가슴이 저려 오는 추억의 자락들입니다.

이런 가슴 뭉클하고 웃지 못할 추억들은 ‘물 맑고 해 맑은 횡성’에서 자란 순수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지금도 가슴 뿌듯하게 회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