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15 :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16 :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광야에서 나발의 양을 치던 자들은 다윗과 함께 한 그들이 자신들을 선대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선대해주었까? 무척 궁금해 살펴보니 밤낮으로 함께 해주었다 합니다. 나발의 양 떼들과 나발의 목동들이 머무는 현장에 같이 있었다합니다. 왜냐면 광야에는 사나운 맹수들과 사막의 약탈자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동들의 담이 되어주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다윗은 양치기의 대선배님이였으니 얼마나 치밀하게 지켜주었을까?합니다. 

 

오늘 특별히 묵상해보는 것은 <담>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연약한 지체들이 늦대와 이리 같은 자들에게 물어 뜯겨 상하지 않도록 그들을 선대한다는게 무엇일까?

물론 전능자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지만 그분은 영이신지라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 나라로서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를 출현시키셨듯이 오늘날 주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이리와 늑대처럼 악한 자와 우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다니는 마귀로부터 누군가를 지켜주는 보호막과 담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없이 어리고 연약하고 순한 양들에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대화할 수 있는 말씀의 인격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비대면의 일상화 속에 그들을 만나 함께 할 기회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의 창을 항상 아버지 보좌를 향해 열어 놓고 나보다 먼저 그들을 선대하여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부르며 사랑과 믿음의 기도로 보호막을 형성하여 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자신들의 식솔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나발의 삼 천 마리 양 떼들 중 수 십마리 양새끼들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 와 얼마든지 잡아 먹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다윗은 나발의 양 떼들과 그 종들을 먼저 생각하여 선대했습니다. 성경엔 다윗과 식솔들이 참아낸  배고픔들의 어떠함을 기록한게 없지만 아둘람 공동체의  연장선의 삶은 가난과 고난과 멸시 천대를 먹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을까요? 

어쩜 다윗은 나발의 불량한 인격도 양 치기들의 입을 통해 이미 들어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윗은 자신과 자기 식솔보다 먼저 나발과 그의 종들과 양 떼를 선대했다는 것입니다>

 

근데 주인을 떠난 종이라니요? 누가 주인을 떠난 종인가를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앞에서 다윗은 자기 열정에 삼켜져 여호와께 묻기보담은 칼을 선택합니다. 그의 열정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경멸하는 자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진노의 불이라서 아무라도 끌 수 없습니다. 그들을 진멸시키지 않으면 심판주께서 자기를 죽여 주시기를 원한다 합니다.(21절,22절)

 

"17 :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해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18 :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에게 싣고 19 : 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를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20 :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 :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선을 갚는도다 22 :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시는지라 "

 

소년들이 주인 아주머님께 겁도 없이 주인 아저씨 흉을 보는데 내용인즉 그는 불량한 사람이라 대화가 안된다 합니다. 이 정도면 흉이 아니라 그의 불량함은 이미 그 사람 됨으로 그의 캐릭터를 다시 확인해준 말입니다. 말을 다 들은 아비가일이 먹거리를 준비하고 다윗을 향해 달려 갑니다. 남편과의 의논을 생략합니다. 이 여인의 이러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듯 싶습니다 

 

거부가 되기까지 이 여인은 남편과 종들간의 불상사나 이웃간에 생긴 사고들을 해결함에 도가 트인 것 같습니다. 남편의 크고 작은 사고사들을 해결하다보니 화해와 협상에 관한 남다른 지혜와 안목이 트인 것 같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대적자가 아버지일지라도 진멸되기를 원한다고, 그럴지라도 내 집에서 인자함을 끊지 말 것을 언약했는데 아비가일도 같은 노선에 놓여 집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자 나발을 칠지라도 여인은 자기 아들들과 자기 형제들과 자기 종들을 진노 가운데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은 마치 다윗 곁에 서서 그가 한 말(그 집에 속한 모든 남자들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기를 원하노라)을 자세히 들은 사람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다고 잘 듣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귀를 열어 듣게 하지 않으시면 듣긴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또한 그 현장에 없었다고 못듣는게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본디 초월적인 진리의 영이시기에 멀고 가까운 거리와 상관없이, 또한 까마득한 과거나 가까운 현재나 혹은 머나먼 장래일지라도 시간과 상관없이 들립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음성을 듣는 자를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속한 자, 혹은 내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삼 천년 전 다윗과 아비가일이 주고 받은 말들을 전심으로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호젓한 산 길에서 생각 밖에 귀부인을 만나게 되자 길을 멈춥니다. 자기 의의 확신과 신념이 강할수록 멈추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자신의 열정이 오히려 해악이 되어 여러 사람 다치게 만듭니다. 

 

최대한의 스피드로 달려와 땀이 송글 송글 맺혔을 여인과 나귀에 잔뜩 실은 떡과 건포도와 무화과 뭉치와 양 고기 냄새들을 맡는 순간 다윗은 분명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순간이 올줄이야! 허나 다윗은 <이미> 말한 것이 있어 그 말에 묶여 있으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우린 누구라도 말에 묶이기도 하고 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기도 합니다. 누구라서 다윗이 한 말들을 주워 담을 것이며, 그것도 한 왕이 칼 집에서 뺀 칼에,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다시 칼 집에 꽂게 할 수 있을 것입니까?

 

"23: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삼상25:23:31

 

아비가일은 우선 호칭부터 분명히 합니다. 뻣뻣하게 서서 입술만 움직이는게 아니라 전심으로 다윗 앞에 엎드려 그녀의 얼굴을 땅에 대고 말합니다. 자기 남편 나발이 주인을 떠난 종이라고 부른 죄악을 자기에게 돌리시라며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그리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여종의 말을 들어 달라고 청합니다. 

 

주 앞에 엎드려 청원하는 이 여종은 속뼈가 배추 속마냥 꽉꽉 찬 말들로 겹겹이 아룁니다.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이 여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고서야! 여호와의 감찰하심을 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한 점의 회의나 불신이나 망설임이나 불안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믿음의 말들만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내 주를 막는 자는 여종이 아니라 여호와이시니 여종의 말을 반드시 들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믿음의 진위여부를 분별하며, 참 말씀도 말씀의 진위여부를 가려냅니다. 다윗이 싸우는 여호와의 전쟁은 참 신과 거짓 자아와 거짓 우상들과의  싸움이니 그가 능히 분별합니다.

 

악하고 미련한 나발도 아내의 여호와 경외함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나이지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삶의 풍랑이나 악인이나 깐깐한 자나 가난이나 부함이나 지식이나 지혜나 그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 안에 있음을 믿고 여호와를 사랑하며 사노라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아비가일로 성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당연한 열매로서의 성숙한 지혜로움이 맺히지 않는다면 회개의 영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왕의 기름을 부어주신 사무엘 선지자도 돌아가셨으니 다윗이 어디 가서 이처럼  생생한 말씀을 들을까 했는데, 여호와와 함께 한 여인으로 인해 그는 지금 달고 오묘한 레마의 생수로 목욕 중입니다. 사람(사울)이 아무리 일어나 자기 생명을 찾을지라도 자기  생명은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여있을 것이나 자기 원수들의 생명은 한번 던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물매 같이 여호와께서 던지실거라는 말씀으로 목욕하니 평안과 안식이 밀려듭니다. 방금 전 의의 거룩한 분노로 쏟아낸 말들을 자신이 지키지 않아도 다윗의 집(왕국)을 세우시고자 작정하신 여호와께서 하실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남편의 어리석음을 자신의 불찰로 여기는데서 출발합니다. 내게 붙혀주신 자를 위하여 깨어 경성하는 파수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자신이 짊어질때 비로서 여호와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진실로 어떠한 양상으로든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비가일이 한 말은 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만한 지혜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32: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네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나를 막아 너를 행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은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이하였으리라 하니라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다윗이 여호와를 찬송하되 아비가일을 보내주신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복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한 여인을 다윗과 그 왕국을 위하여 필요한 떡과 물질들을 공급할 수 있도록 부요케 준비하셨으며 지혜롭게 양육시키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피 흘림과 복수를 막은 지혜)해 줍니다. 복도 빌어줍니다. 다윗이 빌어준 복은 다시 본인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