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20장

 

아비 사울이 아들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집니다

이유인즉 아비를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예표가 된 이새의 아들을 택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성경은 진정 주님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전쟁인지 요나단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여호와의 나라 이스라엘을 내 나라로 도둑질한 사울 강도는 불순종의 아들들을 

대표합니다

 

이 불순종의 아들들가운데 역사하는 하늘의 악한 정사와 권세와 승리하기까지 전쟁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요나단과 다윗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싸워야 할 대상은 한 나라의 모든 행정권과 군사력과 경제력을 쥔 인본주의로서의 사울 왕입니다.솔직히 이 싸움은 아예 세속화된 세상 나라와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수하게 정권 이양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제 갓 연한 순처럼 피어나고 있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죽이려함을 보며 금식을 합니다 

요나단처럼 다윗이 예표하는 바 순전히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슬퍼하며 금식한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의 죄로 인해 슬퍼하며 주의 나라와 의를 이 땅에 이루려함에 자신의 힘과 지혜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요나단. 그 아버진 제사는 물론,예언도 하고,기도도 하고,절기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의 율법지킴이 어느정도였으면 초하루 식사 자리에 불참한 다윗의 빈자리를 본 순간 그가 부정하여 함께 먹을 수 없나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지 않은 것인데 말입니다. 율법은 이렇듯 자기를 보는 대신 남을 보게 만듭니다. 자기 의에 자기 스스로 속습니다.

이런 현상은 수많은 세월이 가도 여전히 율법을 근거로 유지하는 내 자아의 판단과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 성도는 이런 걸 먹지 말아야 합니다(금식)

 

사울은 자기 자아의 연장선상에서 요나단을 바라봅니다. 도무지 여호와의 나라와 의의 연장선에서 아들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깐 창을 던지지요? 

나는 기필코 사울 같지 않을거라 맹세하는 사람들도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정작으로 그런 상황을 만나면 전혀 그렇지 않은 나의 적나라한 에고와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선 줄로 알고, 나를 과대 평가한 순간 덫에 걸려듭니다

어떻해 빠져나갈 수 있을런지... 

 

사울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한 선택의 결과는 자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사울이 자기 사랑으로 아들 요나단을 사랑한 결과는 단창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린 누구라도 내가 내게 주인이 되여 내 나라의 왕이 되어 살아가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타고난 육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 속에 새 순으로 피어나신 예수께 단창을 수없이 던집니다

그럼에도 말없이 피흘리며 죽어가시는 예수님! 그리고 기여코 죽임당하사 무덤에 묻힙니다

제가 어느 순간 제 가슴이 그의 무덤이였다니? 라며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답니다

감사하게도 제 가슴을 열고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를 뵈온 후부터 더이상 가슴이 싸늘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비 사울의 죄는 요나단과 다윗을 헤어지도록 만듭니다

그들의 헤어짐은 그야말로 진리 안에서 사랑함에도 헤어져야 하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우린 신앙생활하면서 참 아픈 이별들을 종종 경험합니다

좋은 일로 헤어지기보담은 혈과 육의 핏방울 튀기는 살벌함 속에서 헤어지는 아픔은 더 아픕니다

허나 살아계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여호와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아픈 이별을 감당케합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알게 된 요나단은 지체하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들로 나가 다윗을 향해 언약의 활과 언약의 말을 던집니다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채 그저 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언약의 활을 주워서 주인에게로 가져 옵니다

우리 모두는 말의 속뜻을 모른채 요나단의 아이처럼 묵묵히 심부름하는 종의 상태로부터 출발하는 자들입니다

언약의 말씀은 반드시 정해진 바 그 뜻을 이루고 언약의 주체이신 여호와께로 돌아갑니다

내 처지가 어떠하든 내 처지에 감사하며 성심껏 사는 자는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

내 처지에서의 묵묵한 심부름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건지는 일이라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자리일까 싶습니다

 

사울이 스스로 왕노릇 하느라 정신없을 때 참 성도인 요나단은

아버지께서 다윗을 죽일려고 결심한 것을 안 이후 그는 자기 아버지임에도 아버지의 말을

먹지 않고, 대신 여호와의 전쟁 중일지라도, 심판을 이기고도 자랑하는 인자와 긍휼의 언약을 먹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버가모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께서 주시는 상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감추인 만나를 먹게 하는 것이요,또 다른 하나는 주는 자와 받는 자외에는 알 수 없는 새 이름이였습니다

 

다윗은 들에서 요나단이 주는 감추인 만나를 먹고 생명을 건지는 길로 도망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자신이 죽은 후 하늘나라에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다윗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정직하고 성실하사

십자가 예수의 대적자인 베냐민 지파 사울(큰 자)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 바울(작은 자)이란 새 이름이 되도록 여호와께서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다 지파의 다윗과 베냐민 지파의 요나단이 생명을 담보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맺은 것이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 족장 시대 때, 야곱의 4째 아들이였던 유다가 막내 동생인

베냐민을 위해 자기 생명을 담보로 준 적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요나단처럼 살고자 할 때 우리 같은 사람이 그 옛날에도 있었고, 장래에도 있을 것이라니...

얼마나 놀랍고 반갑고 정겨운 기이한 일입니까? 성도가 신실한 언약(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이미 베푸신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귀한 언약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아를 죽였고 자신의 혈과 육보담은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한 자들이였습니다 곧 그들의 인생속에는 주와 함께 한 십자가의 궤적이 있는 자들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