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8장17: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18: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19: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0: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20: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22: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23: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24: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말하되 다윗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니 25: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26: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에게 아뢰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결혼할 날이 차기 전에 27: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8: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30: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음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삼상17:25b)

사울이 왜 약속을 지연시켰는지 알 수 없으나 결국 왕은 다윗에게 말을 합니다. 맏딸 메랍을 줄터이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합니다. 이미 다윗은 왕의 사위로서 조건을 갖춘 자인데 다시 조건을 내놓음은 함정에 빠트려 죽이기 위해서 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음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의치 않고 왕의 사위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아룁니다. 지금 다윗은 왕의 기름부으심이 한창 진행 중이고 온 이스라엘과 모든 신하들이 사랑하는 자이고,골리앗을 죽인 포상으로 왕의 사위는 물론 많은 재물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 집이 누구이기에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라며 사위 될 의향이 없음을 표명합니다.

 

이로써 성경은 그가 골리앗과 싸운 목적은 포상과 상관없이 여호와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충성에 있었다는 걸 증거해 줍니다.  말씀대로 주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목적이 실로 주를 뜨겁게 사랑해서가 아니고 먼저 그것을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리라는 포상이 목적이 될 때도 있겠다 싶습니다.

마음이 두 마음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사울은 나이 먹어가면서 단순하나 깊이를 더해가는 내면의 진실함 대신 교활하고 음흉한 두 마음을 품은 이중 인격자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내 속에서 이런 것들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가라지, 알곡이 따로 따로 있는게 아니라 내 속에 함께 공존함을 알고 내 속의 가라지들을 추수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지 가라지 지가 묶어 불에 태울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됩니다. 성령의 불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나를 위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싸우라는 말이 없었을 때도 이미 목숨 걸고 블레셋과 싸웠고 지금도 싸우며 앞으로도 싸울 자입니다. 젊은 다윗은 늙은 사울 왕이 악령에 사로잡혀 자기를 두 번씩이나 죽이려 했던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편 사울 왕이 자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암암리에 알았을겁니다.

 

사울 왕은  큰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 보냅니다. 후에 다윗 왕 때 삼 년 기근이 임하여 여호와 앞에 다윗이 간구하자 기브온 족속과의 언약을 사울과 그의 집이 깨트려 죽였기 때문이라 말씀해주십니다. 이에 기브온 족속들이 원하는대로 사울 집안의 일곱 아들을 그들에게 넘기게 되는데 그중 메랍의 아들이 다섯이나 됩니다. 아버지 사울 왕의 죄로  맏딸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생각하노라면 조상의 망령된 죄악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켜 주신 예수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사울 집안의 일곱 명을 목매어 달매 비가 내립니다. 

 

둘째 딸 미갈이 언니 메랖이 시집가자 이제 자기 차례임을 알고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을 밝히자 또 조건을 내놓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자기 목적을 이루려 하더니 이젠  딸의 사랑마저 이용합니다. 이 일에 신하들도 도구로 쓰임 받는데 이 때도 다윗은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대꾸합니다.  왕 앞에서만 겸손한게 아니라 신하들 앞에서도 동일한 다윗은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진실로 고백과 마음과 인격이 그러하다면 이 말처럼 만인의 가슴을 울리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마음을~^^. 내가 불구자가 아니라는 것 하나만 보고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남자를 박차고 나올 수 없었던 그 때 그 순간을 주신 여호와를 다시 생각하며 교만하고 오만한 자신을 주님의 보혈로 덮혀주시고 씻겨주시며 성령님을 보내주사 늘 양육해주신 주께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번엔 다윗이  왕의 사위되는 것을 좋게 여겼다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주장하신 것으로 봅니다. 다윗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블레셋과 싸워 사울 왕이 요구한 백개에 백개를 더하여 사울 왕께 드립니다. 사울 왕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합니다. 숨이 탁탁 막힙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회개하기엔 마음이 하나로 집결되지 않습니다. 제 꾀의 올무에 다윗이 걸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걸려 넘어집니다.

더구나 자기 꾀를 통해서도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고 알게 됩니다. 기도와 겸손으로 무장한 자에겐 여호와께서 역사할 수 없는 장애물이나 함정이나 위기는 없습니다. 덧붙혀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니 이젠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의 대적이 됩니다. 이제 남은 일은 여호와의 종인 다윗이 사단의 종인 사울과 그 부하들의 강도 높은 박해와 핍박을 어떻해 돌파해나가느냐? 일 것입니다.

 

예전엔 다윗의 원수가 밖에만 있었으나 이제는 원수가 안에도 있게 됩니다. 기름부음이 강력할수록 대적의 대상이 세상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잘 간파하여 마음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모셨고 육체로는  예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안밖으로 예수 부활 생명이 나타나 안밖의 대적들을 뚫고 복음의 진보를 이루어 나갑니다. 다윗못지 않게 사도바울의 이름이 심히 존귀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다윗이 밖의 대적인 블레셋 방백들이 쳐들어 오자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었다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통해 사단이 올무를 놓을 때마다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마음의 무기는 <겸손>입니다. 사울은 교만과 시기 질투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이 하인과 함께 자란 환경과 그의 큰 키와 준수함은 자신의 가난함을 보지 못하게 만든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허나  막내로 태어난 다윗의 처지는 다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부터 양 떼를 방목하듯 키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덕분에 다윗은 사자와 곰으로부터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양 새끼 운명속에서 자신을 보는 내면의 눈이 생깁니다.여호와께서 자신을 사자와 곰의 발톱으로부터 건져주시지 않으면 안될만큼 <나는 가난하고 천한 자>라는 정체성이 생깁니다. 목동이란 천한 자로 살지 않았다면 곰과 사자의 발톱으로부터 여호와의 구원이 절절한 가난한 자의 심정을 어찌 알았을까 싶습니다.

 

우린 겸손을 흉내 낼 수 있지만 겸손의 능력은 모방과 외모로 되는게 아닙니다. 다윗이 내가 이럴땐 겸손해야지 해서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위장 고백한 자라면 그는 올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너무 얄퍅하니  이런 말조차 상투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의 자의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등감과 상처에 덤덤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소년 다윗은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자와 곰의 입에서 구출한 양새끼들을 유난히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여호와의 마음과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삶 속에서,특히 고난 속에서 예수 고난의 십자가를 유난히 끌어 안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와 함께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 전과정을 여호와께서는 기름부으신 다윗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는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언29:25~26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