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한13
하나님의 성도들 가운데도 자신이 아버지께 가야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미리 아는 자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으면 그럴 수 있을까? 숙연해집니다
죽음을 타자로 인해 간접 경험하는 것과 본인이 직접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마치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과 언제죽을지 몰라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과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죽음과 정면적으로 맞탁트린 사람은 그동안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인생의 의미와 죽음 이후에 대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사뭇 다릅니다. 특히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이미 들은 말씀 안에 믿음으로 거하는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2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아셨는데 사도요한은 그렇게 알게 된 시점을 유월절 전이라고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당신 죽음을 대비해서 첫번째로 하신 일은 성경에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들을 착오없이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이는 오고 오는 세대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기록된 성경을 통해 성령님의 감동속에 보고,만지며, 느끼고, 생각하는 중에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하신 일은 세상에 남겨질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에 남아서 당신께서 전하시던 복음의 바턴을 쥐고 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기 사람은 분명 세상에 있으나 자기 사람이기에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므로 자기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견뎌야 할 무거운 영광과 고난과 요란함과 핍박과 잔혹한 가해 끝에 죽임 당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가해한 자들을 땅에서 용서함으로서 하늘에서도 용서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끝까지 사랑하심이 세족식일까? 묵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저희들도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를 염두에 두고 저마다의 가족들과 교회,혹은 선교지를 두고 떠나려 할 때 주께서 본을 보이신 세족식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족식 절차를 보면 예수께서 앉으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십니다. 다 하신 후 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사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하게 된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십니다.
묵상해보면 육체의 발을 씻어주는 육체의 섬김 저너머 영적인 일을 보여줍니다.그것은 진리의 맑은 물과 기도의 땀과 눈물로 서로의 죄를 용서하며 용서받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은 끝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씻겨줌이 옳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죄를 씻겨주지 않는 한 불법을 행한 자가 되어 우리가 한 사역들은 세상 끝 날에 빛을 보지 못하고 성 밖에 머물게 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선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행치않는 죄입니다. 이런 죄가 있다는 것을 세상은 모르나 십자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용서를 위해 발버둥쳐야 되냐고 묻고 싶다면 진짜 생축으로 십자가에 못박힌채 피범벅이 된 입술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간구하면 더이상 용서가 짐이 되지 않고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시와 엉겅퀴 밭을 기경하다 보화 (복음)를 발견하게 된셈입니다.
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굳이 세상 사는데 필요한 집이나 물질을 주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은 그런 것들은 이미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날마다 공급해 주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 같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통전적인 지혜와 지식과 능력인 용서하는 사랑을 세족식의 본으로 보여주십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랑이 어떠해야함을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제자들의 몸에다 실제로 새겨주신 셈입니다. 용서 받으려면 더러운 내 발을 형제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그럼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의 죄를 고하며 병낫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12:그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한13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실 때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하시며 또한 성령을 기름붓듯 부어주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셨듯이 이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께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사도들에게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추종자와 무리들도 생길 것입니다. 이 현상은 마침내 가나안 땅,곧 젖과 꿀이 흐르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위에 세워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본인들이 원하거나 혹은 원치 않았거나 교회의 지도자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 주님께선 자기 사람이 지도자란 권위에 매몰되지 않도록 세족식을 행하시는 몸으로 본을 보여주시고 멧세지를 들려 주신 것입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6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주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확신만큼 종의 자존감을 높혀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는한 우리의 자존감은 금방 바닥을 칩니다. 허나 주를 바라보면 우리의 자존감은 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 곁에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자존감의 왕좌를 버리고 자신을 비하하여 가장 낮은 자리로 자기 사람들의 발을 먼저 씻겨 주는 본을 보이심 같이 우리도 주로부터 획득한 자존감의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비하의 자리로 내려가게 함입니다.
"17: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모르면 영육간에 섬기는 일이 짜증나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냐며 자학하거나 회의에 빠져 전혀 <복>이 안됩니다. 허나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하여 못박힌 손으로 내 발을 씻어 주신 사랑을 알고 행하면 참으로 <복>이 됩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가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게 옳다하심은 우리가 옳은 일해서 옳다는 뉘앙스보담은 설령 틀린 일을 할지라도 서로 죄를 고백하며 진리와 기도로 씻겨주는 일을 해서 옳다는 뉘앙스일 것입니다
주님! 피차 죄를 고함으로 내 죄를 지시고 벌거벗긴채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수치와 고통에 연합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거룩한 성령을 보내주소서. 그리하여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사신 주와 함께 연합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