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엔 먼 친척조차 없는 도시 아이인 내가 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언제부터일까?
어릴 적 우리 집 아랫방에 세 들어 살던 아줌마가 있었어. 엄마는 새댁이라 불렸지. 그 아줌마가 형편이 어려워서인가? 암튼 꽃을 친정에서 가져다 팔곤 했었는데 그 친정이 말죽거리라 했어. 질척질척한 땅이 연상되는 지명이 재미있어 기억하고 있지. 질퍽거리고 꽃 농원이 많던 그곳이 지금은 최고로 땅값이 비싼 곳이 되었네.
아줌마가 꽃을 함지박 가득 가져오면 곁에 앉아 꽃구경을 하면서 꽃 이름을 물어 보곤 했어. 국화, 장미, 글라디올러스, 등꽃, 과꽃......
그중 여름에 볼 수 있는 카라는 나에겐 아주 신기한 꽃이었어. 예사 꽃과는 다른 쭉 뻗은 시원한 모양새며 이국적인 이름이. 아스파라거스는 또 얼마나 섬세하고 우아했는지. 높은 장독대에서 아래로 우아하게 뻗어 내리는 모습을 보면 공작의 깃털이 연상되곤 했지. 나중에 보니 결혼식 날 신부의 부케에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어있더라고.
우리 집에 수국이 있었는데 꽃이 필 무렵 식용 색소를 물에 타서 주면 꽃이 색소에 따라 붉은색 푸른색 보라색으로 피어나는 거야. 아줌마 때문이었나? 마당도 넓지 않은 우리 집에 석류나무도 있었고 무화과나무도 있었어. 큰 화분에 길렀지. 겨울엔 넓은 우리 부엌 한쪽에서 보내다가 봄이 되면 마당으로 옮겨지곤 했지. 한여름이 좀 지나 가을로 접어들 때, 절로 터져서 붉은 속살을 드러낼 정도로 농익은 무화과를 베어 물면 얼마나 달콤했는지 몰라. 동생들은 무화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내 차지였어. 석류는 늦가을까지 따지 않고 두고 보았지. 빨갛고 투명한 보석 알이 알알이 박혀있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예뻤지.
새로 지은 기와집이 일렬로 늘어선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고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큰 기와집’이 있었어. 그 집엔 철 대문과 나무 중문 사이에 긴 화단이 있었어. 그 화단엔 늘 꽃이 피어있어서 가끔 철 대문 밖에서 들여다보곤 했지. 어느 날 철 대문이 활짝 열려 있기에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그 예쁜 화단에 떠돌이 청년이 앉아서 얻어온 밥을 먹고 있는 거야. 그 청년은 키도 크고 멀쑥하게 생겼는데 머리가 살짝? 암튼 밥 때가 되면 집집마다 기웃거리며 “밥 줘요. 밥 줘.” 하며 떠돌던 사람이었어.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되네. 채송화와 봉숭아가 핀 화단과 그 청년이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거야.
또 하나 우스운 이야기. 초등학교 다닐 때 일 년에 몇 번쯤 엄마가 사주신 꽃을 가지고 가서 선생님 책상 앞 꽃병에 꽂아 드리곤 했어. 지금 생각엔 글라디올러스나 국화 뭐 그런 꽃 이였던 것 같아. 아침 일찍 가서 꽃병에 물을 받아 꽃을 꽂아 드릴 때면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가슴이 콩닥콩닥 했었지. 그런데 일 년에 한 번쯤 엄마가 화분을 들고 오실 때가 있어. 바로 환경정리의 날이야. 소담하게 핀 수국 화분을 교실로 들고 오셔서 교실 한구석을 빛나게 해주셨지. 꽃이 시들면 엄마가 다시 들고 오셨나? 다음 해 환경정리 날 즈음엔 내 새 학급에 그 화분이 또 있었으니까. 엄마가 아주 아끼시는 화분이었나 봐.
조심스럽게 꽃을 한 송이 따곤 날 쳐다보는 손녀를 보니, 가슴을 콩닥이며 교실 꽃병에 꽃 꽂아놓던 그 시절이 생각나며 그립네.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은화의 이야기는
솔직하고 진솔해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
단아하고 차분하면서도 세심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서 참 좋다.
다 잊어버렸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해 줘서 고마워.
그 시절의 어머니들은 거의 다 꽃을 좋아하셨던 모양이야.
집집마다 비슷한 형태의 화단을 가꾸며 살았던 것 같다.
우리 엄마도 꽃을 아주 좋아하셨어.
동산 학교 앞에 있던 우리 집은 마당 한가운데 로터리 처럼 둥그런 화단이 있고
길쭉한 네모 꽃밭이 두개나 더 있었어.
신발이 놓일 댓돌은 널찍하면서도 단차를 두어서 마당과 구별하였고
화단을 제외한 모든 곳에다 콘크리트를 발라서 흙을 밟지 않게 했어.
아마 비가 와도 푹푹 빠지지 않고 관리하기 쉽게 하려고 그랬던 거 같다.
암튼 그 덕에 동네 꼬마들이 우리마당에 모여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았어.
시멘트 바닥이라 자전거가 잘 굴러갔거든.
철제로 된 대문에 철근을 구부려 올린 아치를 타고 올라가던 찔레꽃을 필두로
앵두나무, 라일락, 수국,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글라디올라스, 나팔꽃, 과꽃,
사르비아(깨꽃), 해바라기, 백일홍, 사철나무, 유도화, 선인장, 칸나 등등 있었어.
다 잊고 살았는데 어제 본 것처럼 생각이 나네.
우리집에도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울엄마는 가끔 아이를 안고 오는 아주머니에겐 밥상을 차려서 내주셨지.
깡통을 들고 와서 밥 달라고 외치는 소년들도 외면하지 않으셨고.
문밖에 서서 염불을 외며 목탁을 두드리는 분에겐 꼭 쌀을 한바가지 퍼 드렸어.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는데 나누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셨어.
그런 어머니들 덕분에 오늘 우리가 배고픔을 면하고 사는가 보다.
어린아이를 잡아다 먹는다는 문둥이는 공포의 대상이었어.
실제로 구걸을 하러 다니는 문둥이들도 꽤 있었지.
망태할아버지도 있었어.
울거나 떼쓰거나 밥 안먹는 아이를 잡아가는 할아버지.
어린 내 마음 속에 그려진 망태할아버지는
팔이 있던 자리에 쇠갈고리를 박고
한쪽 다리도 없어서 헐렁한 바지를 동여맨,
헝클어진 수염이 험상궂은 애꾸눈 할아버지였어.
당시엔 무서운 상이군인들이 꽤 많아서 내가 복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같아.
암튼....
지금 아이들은 망태할아버지를 어떻게 형상화 할까?
궁금하다. 그들의 머릿속이 ~ ㅎ
숙희야, 춘선아 너희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숙희야 항상 느끼는 건데 넌 관찰력이 대단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것 같아.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 동네를 떠 돌던 사람들, 동네에 잔치가 벌어지면 동네를 접수하여 다른 팀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수하던 넝마줍는 이들. 어렸을 땐 무서워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숨곤 했었는데 이제 이렇게 추억거리가 되었네.
추억을 공유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
그저 배울 것만 있는 친구 은화
글도 네가 만드는 꽃 액자처럼 어쩜 이리 차분하고 곱게 쓴다니.
잘 읽었어.
숙희 말처럼 우리 걷기 하면서 꽃을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나누게 되어 정말 기뻐.
그런 눈으로 꽃을 보니 꽃이 더 예뻐 보이더라.
앞으로도 쭈욱~~~~ 우리의 꽃 선생님이 되어 줘^^
은화야~~~ 이름처럼 예쁜 친구!
우리의 꽃선생님인 너는
소중히 만들어 간직한 아름답고 귀한 꽃누르미들을
아끼지 않고 다 꺼내어
전등이며 보석함, 악세사리 등을 만들수 있도록 했던 일부터 생각난다.
그 땐 미처 생각 못했는데
요즘 부쩍 꽃에 관심이 가서 중고딩처럼 책갈피에 꽃을 눌러보니
그렇게 곱게 눌러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실감이 나며
두고 두고 고마운 마음이 커져간다. 고마워!!!
생각해보니 너와는 참 인연이 깊구나!
초,중,고 대를 같이 다니고 첫발령까지 같은 학교로 났었지!
우리 초4 때 남자아이들이랑 다툼도 많이 했었는데
폭음탄을 들고 마구 쫓아오면 도망가서
너희집 장독대에 올라 '약올르지롱''메롱'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이리 긴 시간이 흐른건지...
은화야~~~ 곱고 예쁜 친구야!
언제까지나 차분한 목소리로 꽃이름을 알려주는 네목소리를 듣고 싶다!
네 딸이 애 낳은게 엊그제 같은데 손녀가 제법 많이 컸나보다
늘 네가 꽃과 나무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어
네 글 읽으며 성격과 환경, 유전에 대해 생각했어
네 자매들중에 너가 엄마를 젤 많이 닮았을거란 생각이 들어
우리 어렸을땐 밥 구걸하던 이가 많았었어
밥 인심도 넉넉해서 그네들이 내미는 깡통엔 더운 밥이든 식은 밥이든 채워주었지
그네들은 혼자 다니기도 하지만 여럿이 몰려다니기도 했어
내 또래로 보이는 애도 있었고...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을 이젠 이렇게 추억하는구나
네 글 제목이 꽃 이야기 1이니까 2를 기대해도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