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인천의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하는 글 중에 성냥박물관을 개관하였다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 그 곳이 나의 유년시절 앞마당처럼 뛰어 놀던 곳이었다. 금곡시장. 창영동 헌 책방 골목 근처다.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나의 유년 시절은 송림동 204번지로 시작하여 204번지로 끝났다.
지금은 모두 헐려 도시 공원이 되어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좀 더 오르면 달동네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큰 도로에서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양조장 우물’이라 불렀고 6.25 전엔 큰 양조장이 있었던 곳이라 했다. 그 옆엔 ‘천수당’이란 한약방이 있었다. 우리 집은 북에서 피난 온 실향민 가족이라 명절엔 딱히 갈만 한 친척집이 없어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천수당 담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던 기억이 난다.
204번지는 나지막한 비탈진 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왼편은 옛 모습의 초가집 으로 오래 전부터 사시던 분들이 그대로 사셨고 오른편은 새로 지은 기와집이 길게 늘어선 동네였다.
6.25 전쟁 시 폭격에 맞아 잿더미가 되었던 곳을 건축업자가 기와집으로 새로 지어 놓은 동네다. 기와집 쪽은 엇비슷하게 이사를 와서 어울려 살던 곳으로 나와 비슷한 또래가 많이 자라나던 곳이다.
한 집 한 집 그 곳에 살던 그리운 이들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동네 반장이셨는데 직장 일로 바쁘실 때면 내가 보조 반장 역할을 하였던 터라 동네 사정을 어린 아이치곤 꽤 많이 알았다.
큰 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집. 넓고 아름다운 기와집이라 영화 촬영장으로도 쓰였던 경우네. 한밤중까지 대낮같이 불 밝히고 촬영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 다음은 나와 같은 학년이고 오래도록 친하게 지냈던 옥자네 집.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던 옥자는 후에 나의 외사촌과 결혼하여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되었다.
굳게 닫힌 철문으로 중간 문까지만 엿볼 수 있었던 철옹성 같았던 큰 기와집, 적십자회비 받으러 갔다가 딱 한번 그 집을 들어가 보았다. 시커먼 세퍼트와 흰 개 여러 마리가 마당에 묶여있었고 높은 담엔 철망이 쳐져있어 감히 근접하기 어려웠던 집이었다. 엄마와 같은 개성이 고향이라며 늘 웃어주시던 아주머니가 계서도 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조흥은행장이라 하시고 언니 오빠가 많았던 인자네. 인자의 언니는 아버지께서 직장의 직원을 소개하여 결혼하게 되었고 그 윗집은 양복점집 순덕 언니 네다. 짓궂은 오빠도 있었지. 그 오빠는 나보다 한 살이 위였는데 늘 짓궂게 굴어 내가 한 번도 오빠라 불러 준 적이 없이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대곤 했었다. 중학교 다니던 어느 크리스마스 즈음 동생 편으로 직접 그린 크리스마스카드를 한 장 보냈는데 무시할 수 없는 솜씨여서 오래도록 간직했던 기억도 난다. 후에 고등학교 미술 교사가 되었고 그 후엔 버스 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산학교 선생님 댁인 창수네, 너무나 여리고 착했던 나의 소꿉 친구였던 종식이네. 종식인 그 여린 성품대로 아이들을 치료하는 소아과 의사가 되었고 몇 년 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긴 골목엔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무의자를 내어놓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다. 동산학교 양 선생님은 아주머니 사이를 지나가기가 민망하여 멀리 뒷골목으로 돌아다니셨다고 했다.
방학이 되면 우리 앞집 계단이 무대가 되고 마당의 불빛이 조명이 되어 동네 아이들의 장기자랑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어스름 저녁이면 수도국산, 창영학교, 영화학교, 배다리는 우리들의 안마당이었다. 때로는 멀리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이나 공설 운동장 정문을 찜하고 오는 달리기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동네 아이들의 임시 선생님은 주로 우리 아버지셨다. 흑판을 내다 놓기도 하고, 석필로 흙바닥에 써서 셈하기도 시키셨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은 모두 좋아라 하셨지만 공부가 싫은 아이들은 슬슬 피하기도 하였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하나 둘 동네를 떠났다. 나도 중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되어 골목에 나갈 일이 없어졌고 고등학교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내 기억속의 204번지는 주로 기와집 쪽의 추억이다.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초가집 쪽은 후에 엄마께 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 당시 나는 보아도 그것을 느낄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내 또래가 아닌 큰 언니 오빠들이 살았기에 관심이 적었다. 그래도 떡을 해서 근근이 살던 떡장수 할머니의 죽음이 생각나고, 배다리에서 대나무 일을 하던 항아 네와 바보 삼촌이 구식 결혼하던 날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후로도 몇 몇 집은 소식을 전하고 대소사도 서로 챙기며 지냈지만 이젠 어디서 어떻게들 사는 지 연락이 끊겼다. 모두 그리운 사람들이다.
산뜻한 가을 바람이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이길로 이끌어 주기에 잠시 쉬어갑니다
송림동 220번지가 본적이 되고
내가 태어난 평안남도가 원적이 되어버린 피난민 입니다
천수당 을 기억하고
우물을 기억하며 지내던 소꼽 친구들은 만날수 없어
추억의 꺼리가 끊어져버렸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너무 행복하게 추억의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우리 5기 친구들 중 그곳을 기억하는 친구들 많이 있어요
기와집 늘어져 있는 동네 한쪽에서
종민이 순이 현경이 용숙이 정순이
학군은 송림 초등학교 인데
모두 무슨 일인지 창영초등학교를 다녔답니다
이웃사촌
반갑습니다
그 옛날을 볼수 있어 고맙구요
어릴적 기억이 코끝이 찡 하네요
선배님 ~ 어릴적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선배님의 글 반갑습니다.
직접 뵌 적은 없었겠지만 같은 공간을 추억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고 지낸 듯 가깝게 느껴집니다.
내 유년기는 현대극장 뒤쪽인 송현동 1번지에서 시작하여
번짓수는 잊어버린 동산학교 앞에 있는 동산교회 뒷집에서 끝났어.
내 본적인 송현동 1번지는 피난민 수용소였어.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외송리 는 원적이 되었지.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사이로 난 골목이 아주 좁았던 것이 생각난다.
좁은 골목에 내놓은 화덕에다 꽁치, 밴댕이 등을 굽던 냄새는 지금도 선명해.
현대극장에서 대한중공업으로 넘어가는 언덕은 '똥고개'라고 불렀어.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오물이 지천이었지.
판잣촌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중화장실은 늘 지저분한 게 차고 넘쳤어.
공동 수도에서 물통을 채워 지게에 지고 와서 부엌에 있는 물독에 담아 놓고 썼어.
물 긷는 것이 힘들어서 물 아껴 쓰는 것이 필수 덕목이었지.
동산 학교 앞에 있던 집은 골목 끝에 있는 막다른 집이었는데 마당이 아주 넓었어.
울엄마가 송현동에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번듯한 집을 사갖고 오셨다고 했지.
넓은 기와집이었고, 부엌과 다락, 화장실과 수도와 장독대와 화단을 두루 갖춘 집이었어.
방 2개와 대청 마루는 우리가 썼고, 부엌이 딸린 방 하나는 언제나 세를 주었어.
아버지는 대한중공업에 다니셨는데 걸어서 출퇴근하셨어.
그때는 버스 노선도 별로 없었지.
박문여고, 동인천고등학교도 우리집에서 가까웠어.
조금 더 가면 선인재단 학교들이 있었지.
박문학교 로터리와 수도국산도 생각은 나는데 가물가물해.
나는 서림을 나왔는데 내 동생은 창영을 다녔어.
암튼...
요즘 윤순이가 올려주는 사진을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유년을 보냈던 동네가 너무 낯설어.
우리 아버지 황해도 신천군
어머니 인천 소래가 고향이셔.
엄마께서는 성냥공장 다니시던 당시 노처녀 19세에 싸전 일꾼 노총각 23세 아버지와
초례청 대신에 사진 한장으로 혼례를 치르고 금곡동에서 신접살림을
내 본적은 송림동 225번지야
은하가 추억속에 장소를 모두 꺼내주었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