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를 빌려 재밌게 읽고,
몇 권 더 빌렸는데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책을 오래 갖고 있었다.
물론 책 수거함에 넣어도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새로운 책도 빌리지만 전에 읽은 책을 자꾸 다시 빌리게 된다는 것이다.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처럼.
어떤 것은 새롭게 감동스럽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일종의 기억 여행이라고 할까?
사노 요코의 책은 처음 읽었다.
앞의 두 책도 재미있게 읽었으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이 그의 수필가로서의
모습을 더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느꼈다.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열었기에 아무래도 책을 반납해야겠다 싶어
그의 글 하나를 소개하고 반납하려고 한다.
그런데 옮겨 쓰려고 하니 내용이 기네.
그래서 부분만.
제목은 '몽골말처럼'인데, 그의 분방함과 판단력(선택이랄까), 풍자 같은 게
잘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결코 청소하지 않는 지저분한 소파에 누워 긴 베개를 베고 손톱의 때를 가끔 보면서 한가하게, 그러나 꾸준히 자유롭게 창을 치켜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산책처럼 하는 사람, 뭔가 느슨하지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오래도록 전화 통화하는 사람, 한국 드라마 보느라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턱이 비뚤어지는 사람,
그리고 엉금엉금 걸어 책꽂이에서 기어이 책을 골라오고, 결국은 쉬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
딱 이런 느낌이다.
인테리였던 아버지, 무식해서 항상 조용히 아버지에게 무시당했던 어머니.
어릴 때 두려움 속에서 그녀는 아버지 편이었다.
암튼
--중략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의 다롄은 붉은 수수와 콩깻묵과 추위와 허기만이 있었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을 상대로 기모노나 털이 술술 빠지는 여우 목도리 등을 팔러 나갔다가, 붉은 수수를 늘어뜨리고 기운이 넘쳐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빈틈없이 간사한 수완가처럼 장사를 해냈는지, 짱짱한 목소리에 자만을 처덕처덕 발라서 얘기했다.
그러는 어머니는 실로 아름다웠다.
어머니만은 여위지도 않고 빛이 났다.
그 사이 아버지는 새카만 페치카에 뼈만 남은 등을 밀어붙이고, 매끈매끈한 종이에
꿈같은 그림이 인쇄된 안테르센을 콧물을 흘리며 아이들에게 읽어 줬다.
우리는 허기를 참으며 꿀꺽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아버지 앞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안데르센이 우리를 조용하게 했는지 아버지가 무서워서 조용이 했었던 것인지는 잘모르겠다
-중략
나의 독서는 그저 심심풀이다. 나는 따분함을 못 참는다. 하지만 타고난 게으름뱅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음이 분주한 쪽을 선택하고 만다.
심심풀이로 읽기 때문에 활자는 그저 배경 음악처럼 흘러갈 뿐, 교양으로도 지성으로도 남지 않는다. 오락이니까 그냥 시간을 때우면 되는 거다. 내 안에 축적되어 인격 형성에 도음이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는 편식쟁이어서 씹어 삼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가까이 하지 않을 뿐아니라, '알기 쉬운 일본어를 써라,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쓰다니 자기가 모르는 거 눙치기 위한 거 아니냐' 하고 비아냥거리기 십상이고 때때로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난해한 책을 찾아와서 '잠깐 잠깐 여기 이 부분을 내가 알기 쉽게 번역해
줄게' 하고 난해한 말을 인정머리 없게 요약하고는 '인테리는 역시 밥맛이야' 하며 웃는 것으로 나 자신을 눙치고 기뻐하는 비열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중략
그러나 몇 년 전 흠칫한 적이 있다. 다치라는 야생마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야생의 몽골말이 영국에서 고향인 몽골까지 바다까지 건너서 오로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실로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쉽게 우는 사람이므로, 벌써 눈물범벅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몽골말이 되어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기보다 정말로 몽골말이 되어 살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니 독서라는 게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페치카에 등을 밀어붙인, 콧물의 안데르센 아버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안데르센을 읽어 주는 것 말고는 달리 재주가 없었던 혼란기의 일본 남자.
현실에는 없는 아름다운 세계의 문을 열고, 붉은 수수밥의 확보는 아내에게 맡긴 인간.
당신의 처는 아름답게 빛나며 러시아인과 빈틈없이 싸워서 붉은 수수도 구하고 콩깻묵도 손에 넣으며 살아왔다.
마치 몽골말 같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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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 묘하다.
내공이 만만치 않다.
숙희와 친구들의 글을 달콤하게 기다린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버리지 못해 쌓여가는 허접한 잡동사니처럼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슬픔, 두려움 등 감정의 짐도 쌓여만 가면서 삶의 무게가 점점 어깨를 짓누른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마음가는대로 유쾌하게 살다가 죽음조차 경쾌하게 받아들인 사노요코의 인생을 엿보면서 잠시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인생은 도루묵....
바람결에 춤추는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해주는 영상을 보고 잠시나마 우리의 몸과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 볼까?
Waltz of Love by Ernesto Cortazar
9월 함께 읽은 책에 대해 옥규가 대문 열어준 것에 감사!!
인숙이가 작은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작가가 사노 요코라 했지.
제목 끌려 읽다가 흥미를 느껴 그녀의 책을 다 읽었다는 말을 듣고 나도 호기심이 생겼어.
인숙이가 끌린 작가라면 무조건 매력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역시나, 이 작가 독특하고 매력있다.
나도 <사는게 뭐라고>와 <죽는게 뭐라고> 두 편을 읽고 내친 김에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까지
빌려 읽었어.
읽는 내내 우선 유쾌했다.
그녀의 솔직함에 다 공감가는 것은 아니지만 키들키들 따라 웃게 만드는 건
그저 위트때문 만은 아닌 그녀의 삶에 대한 통찰과 내공의 깊이 아니었을까?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40대 중반에 쓴 수필이고 (옥규가 인용한 몽골 말도 여기 실렸어)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는 60대 우리 나이 때 쓴 글인데,
나는 <사는 게 뭐라고>를 읽고 느낀 점을 말할께.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암이 재발했을 때 그녀의 태도였어.
「유방암 치료 후 뼈에 암이 전이되었을 때 의사에게 물었다.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 1천만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지 마시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개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도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 이란 말을 듣자 수년간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물건을 쓰고 싶다.
예쁘고 세련된 잠옷도 잔뜩 샀다. 보고 싶은 DVD도 착착 사들였다.」
허걱! 인간은 모두 죽는다지만, 만약 내가 저 경우라면 난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할매 참 대단하다!!!!
죽는 건 무섭지 않은데 아픈 건 두렵다는 말엔 고개 끄덕끄덕
사노 요코는 위선을 위악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며 '~체' 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냉소했던 것 같아.
<사는 게 뭐라고> 앞 부분에 친지와 섣달 음식을 만들며 일어났던 일도 재미있었어.
사노 요코는 뭐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는 편이었지만, 사사코는 뭐든 완벽해야 맘이 흡족한 사람.
섣달 음식을 다 만들고 찬합에 음식을 담을 때 찬합 칸막이로 알루미늄 호일대신 엽란을 쓰는게 좋겠다고 사사코는 생각해.
문제는 이미 늦은 시각이고 이 집은 산에 외따로 있는 데다가 밖엔 눈까지 내리고 있었어.
다들 알루미늄 포일도 괜찮다고 했지만 엽란을 고집하는 사사코때문에 결국 모임의 가장 막내인 요요코와 사노씨가 눈 길에 차를 몰고 40분 거리에 있는 사토네로 엽란을 얻으러 간단다.
밤 중에 눈 길을 헤치고 나타난 사노를 보고 사토씨 부부는 깜짝 놀라는데 문제는 그 집도 엽란이 없다는 것!! 화분을 뒤져 조그만 엽란 세줄기를 겨우 찾아내 다시 눈이 푹푹내리는 산길을 천천히 차를 몰아 집에 왔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되었고 당연히 화가 치밀었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엽란 사건은 잊히지 않는 추억과 풍경이 되었단다.
「만약 알루미늄 포일로 끝냈더라면 그해 섣달 그뭄의 눈내린 산길도 못봤을테고 요요코와 내가 적진을 탐색하는 병사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엽란, 엽란"하며 임무에 목숨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토와 가쓰라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며 웃을 일도 없었겠지. 앞으로 평생동안 엽란을 볼 때마다 폭설이 내린 산 길이 떠오를테지」
이 추억에 이어 어린 시절 보낸 섣달 그뭄을 떠올리는데, 저녁 상엔 이미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고 커다란 소쿠리엔 메밀국수가 산처럼 담겨있는데,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아버지가 상을 뒤짚어 엎어 상위의 음식이 사방으로 떨어졌던 기억말야. 방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겨우 수습해 어색한 침묵 속에 비참한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문득 눈에 들어온 천장의 말라붙은 메밀국수 몇 가닥을 보는 순간 터져 나온 웃음!!
어린애였던 사노씨는 그 때 생각했대. 가장 비참한 것 속에도 익살이 숨어있다는 것을!!!
내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아버지가 먼저 부산으로 가신 후 할머니와 형제끼리 살 때
별 것도 아닌 것에 화를 폭발하고 상을 뒤엎던 큰 오빠때문에 늘 조마조마했던 시절
그 탓인지 힘든 밤을 보내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상담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 세상에 공짜는 없다니까.
시간이 흐른 뒤 뒤돌아보니 그 시절조차 다 추억이고 그리움이네.
이 책을 읽으며 되씹어 보았던 내용 중엔 '화사한 생명'이란 말이었어.
화사한 생명이란게 뭘 말하는거지?
사노씨는 한류열풍에 대해 <허구의 화사함>에 의해 일어났다고 진단하더라.
사람에 대해 설레임을 느끼지 않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어.
사람 뿐 아니라 여행이든 쇼핑이든 잠 못들며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올 봄엔 좀 달랐어.
설레임과는 좀 다르지만 가슴 저 밑에서 솟는 기쁨을 느낀거야.
친구들이 걸으며 보내 준 사진 속 꽃들의 이름을 알아가고
우연히 우리 동네에서도 그 꽃이랑 나무들이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꽃들과 나무들을 마주하며 느끼던 기쁨과 감사함.
이런 것들도 화사한 마음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거야.
나이들며 자연에 대해 알아가는 마음, 그걸 알게 해 준 친구들과 더불어
우리 모두 화사한 생명으로 근사하게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한다.
10월에 읽을 책은 의논없이 또 내 마음대로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으로 정했다.
그림도 좋지만 옛 조상들에 대해 듣는 것이 참 좋고 무엇보다 오주석님이 글을 잘 쓴다.
제대로 알아야 글을 쉽게 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