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친구에게 오래간만에 국제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니 “죽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 일상이지 뭐 특별한 게 있겠어.” 라고 한다. 나는 이 친구가 접신이라도 해서 죽은 자의 영혼과 소통을 하나? 순간 당황했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아했다. 친구는 내 당혹감을 간파하고 웃으면서 “우리가 매일 탐색하며 연구하는 대상이 모두 죽은 사람들이잖아.” 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긴긴 세월 이해도 잘 못하고 재미도 없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와 씨름을 해왔다. 그런데 김서령의 <여자전>을 읽으면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물고기처럼 생동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빼어난 이 이야기꾼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며 수백 명을 인터뷰하고 여러 매체에 인터뷰 칼럼을 썼다. 나는 <여자전>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수백 명을 인터뷰하며 만난 많은 인물들 중에 어떤 기준으로 7명을 엄선했을까? 그리고 인물들의 서술 순서는 어떻게 정했을까?
2007년에 출판된 초판 <여자전>과 2017년에 재판된 <여자전>은 초판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초판의 목차 순서
1.내가 살아남아 1미터 농어 잡을 줄 짐작이나 했겠나 -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2.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 나노 - 반세기 넘게 홀로 가문을 지켜온 종부 김후웅
3.내 자궁은 뺏겼지만 천하를 얻었소 - 일본군위안부 김수해 할머니
4.죽음의 강 황하를 건너온 소녀 -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5.지상에 없는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 한 달의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한 최옥분 할머니
6.종횡무민 욕으로 안기부를 제압하다 - 문화판의 걸출한 욕쟁이 할머니 박의순
7.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 황진이보다 더 치열했던 춤꾼 이선옥
8.명성황후의 한을 풀다 - 명성황후의 화신이 된 여자 이영숙
재판의 목차 순서
1.내가 살아남아 1미터 농어 잡을 줄 짐작이나 했겠나 -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2.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나노 - 반세기 넘게 홀로 가문을 지켜온 종부 김후웅
3.내 자궁은 뺏겼지만 천하를 얻었소 - 일본군위안부 김수해 할머니
4.죽음의 강 황하를 건너온 소녀 -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5.종횡무민 욕으로 안기부를 제압하다 - 문화판의 걸출한 욕쟁이 할머니 박의순
6.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 황진이보다 더 치열했던 춤꾼 이선옥
7.지상에 없는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 한 달의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한 최옥분 할머니
자세히 보면 재판은 초판의 8번째 인물인 ‘명성황후의 화신이 된 이영숙’을 뺀 7명의 이야기로 엮었다. 또 서술 순서를 조금 바꾸어 초판의 다섯 번째 인물 최옥분의 이야기 ‘지상에 없는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을 재판에서는 맨 끝으로 가져갔다.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겼다. 왜 재판에서는 ‘명성황후의 한을 풀다 - 명성황후의 화신이 된 여자 이영숙’이란 인물을 뺐을까? 또 재판에서는 왜 최옥분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가져갔을까?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2018년 작고했단다. 내 나름 답을 찾아보려고 했다.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인터뷰한 내용 중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여자전>은 새로 쓴 게 아니고, 2000년대 초 한 시사월간지에 연재했던 인물 인터뷰 중에서 현대사를 관통하는 삶을 겪은 여성 이야기만 따로 묶은 책이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거든요. 독자들이 ‘서령체’라는 명칭을 만들어줘서 참 기뻐요.”
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삶을 겪은 여성 이야기만 따로 묶은 책”이구나.
<여자전> 초판의 부제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 온 여덟 인생’과 <여자전> 재판의 부제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그리고 재판의 머리말인 ‘소녀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에서 나는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나름 이해했다.
하지만 왜 재판에서는 ‘이영숙’이란 인물을 빼고 최옥분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가져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하다. 혹자는 책 한 권 읽으면서 뭔 궁금증이 그리 많으냐고 하겠지만 일종의 직업병이라고나 할까?
상식적인 얘기지만 전(傳)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역사서술 형식인 기전체(紀傳體)에서 시작을 됐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인 <사기> 열전(列傳)의 첫 번째 등장인물은 충절을 지키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숙제형제이다. 이 첫 번째 열전 속에 사마천은 그의 이상과 심오한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다. 사마천의 이 이상과 세계관은 내 인생관에도 큰 울림을 주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간략히 요약해 보면 악한 자가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리고 정의로운 사람은 재앙을 당하고 비명횡사하는 세상에 사마천은 의구심을 품으며 “天道 是耶非耶! (하늘의 도리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고 통탄한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불편부당하다고 해도 사마천은 “各從其志” 즉 사람마다 각자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현대사를 맨몸으로 헤쳐 온 여성 일곱 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역사의 격량 속에서도 “各從其志” 로 살아온 그들의 담대하고도 장엄한 삶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리고 <여자전>을 쓴 작가 김서령이 품위 있고 격조 높게 삶을 정리하며 이승과 이별 준비를 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동년배인 그녀가 인생의 스승처럼 다가온다. 그녀가 죽기 20여일 전에 한겨레기자와 인터뷰한 기사를 아래에 링크 걸어 놓을게.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36&aid=0000040496
이 인터뷰가 2018년 9월 중순에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2018년 10월 6일에 이승과 이별을 했네.
주택에서 살면 끝임 없이 손이 갈 일이 매일 매일 기다리고 있다. 집 이곳에서 고장 나고 망가져 수리하면 집 저곳에서 누수가 돼서 누수탐지기 동원해서 틀어막고 물 새듯이 돈도 줄줄 새나간다. 주택에서의 봄은 더욱 분주한다. 그래서 홈피도 한번 못 들러 보고 책 읽을 생각은 못했는데 대전에 사는 (윤)영혜가 지난 토요일 책을 빌려주어서 부지런히 읽었다. 내게는 참 의미 있는 책이었다. 인문학은 물론 사화과학 등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구술사연구에 무심했던 내게 <여자전>은 신선한 충격이다. 이 책을 빌려주며 적극적으로 읽기를 권해 준 영혜에게 고맙다.
주택에 살면 나름 좋은 점도 있다. 봄날 화단에 이 꽃 저 꽃 심어보고 뜰 안에서 꽃구경을 하는 즐거움이 있다. 나는 종종 예쁜 꽃 앞에 우리 똥개들을 앉혀놓고 꽃개를 만들어주겠다며 인증샷을 찍자고 강요를 한다.
억지 춘향이가 되어 마지못해 앉아서 사진을 찍다가
이렇게 짖는다.
“꽃개는 개뿔 우리는 태생이 똥개다. 인간아! 우리를 생긴 대로 살게 해다오”
똥개도 '각종기지'를 외치는 것 같네.
인숙아 오랜만이야. 반가워!
꽃밭 너무 예쁘다.
ㅎㅎ 꽃개라고?
예쁜 말이다.
포즈 잘 잡는구먼 뭐~
주택에 살면 복잡한 일이 많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
그래도 난 조그맣더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이유는 한 가지.
앞마당 빨랫줄에 이불을 널고 싶어.
한 가지 더 보태자면 햇빛 좋은 앞마당 구석에 허름하지만 편안한 의자를 놓고
앉아 졸고 싶어서.
반갑다. 잘 지내라.
내가 안 읽어서 아직 모르겠어요.
만약에 한다면 연관된 다른 도서들을 엮어서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신문 기사를 읽는데 마침 김서령의 책들을 읽으면서 한 생각들과
늘 하는 생각이 떠올라 올려 봤어요.
내가 한 게 뭐 있니? 운이 좋았어, 그게 뭐 일이라고? 이런 얘기 너무 많이 들었잖아.
어떤 트레스젠더(마흔이 넘어서 성전환한) 학자는 학생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많은 학생 중 혼자 풀었는데 그 교수는 당연히 그 여자의 남자친구가 해 줬다고 생각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문제는 그걸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야.
익숙했던 거지.
나중에 남자로 성전환했을 떄(의사가 됐는데)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진행되는 것을 경험하며 그떄서야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나 깨닫게 되었다는 거야.
난 여자들이 너무 아까워요;;
안 읽어서 모르지만 난 혹시 이 책이 그런 종류의(자기 계발서 같은) 책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어서(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말할 수가 없어요.
읽어 보고 말할게요.
인숙아!
잘 지내는구나.
작가님 독후감이라 다르구먼.
good이야.
주택 사는 게 힘든데
꽃밭도 예쁘고 개들도 키우고 행복해보인다.
지난 겨울은 눈이 안와서 눈 쓸일은 없었겠다.
잘 지내~~♥
인숙아 ~
꽃밭에서 포즈 잡는 꽃개 사진이 정겹구나.
코로나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지만
이렇게 홈피에서 글로 만나니 참으로 반갑고 좋다.
바람이 많이 부는 봄날.
괜히 헛헛하여 먹을 것을 찾게 되누나.
오늘은 뭘 먹지?
우리 인일 12기들 코로나 바이러스에 위축되지 않고 매사에 열정적으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므흣하네. 봄은 어디서 보아도 싱그럽고 아름답다. 여고시절의 인연을 곧 경노우대증을 받을 나이까지 이어오고 있는 우리들. 우리 역시 나름 ‘소녀들에서 이제 역사가 되고 한 세상’인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음악과 미술은 항상 내 평균성적을 깎아먹는 과목이었다. 그래서 음악과 미술 시간은 참 고역이었지. 하지만 그때 그 시절 배운 서양 중심의 교육내용이 뇌리 속에 남았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 서양 음악이나 서양 미술이고 그런 음악과 그림들이 내게 때로 좋은 휴식처가 되어준다. 음악전공자와 미술에 조예가 깊은 친구들이 많으니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격이지만 <여자전>을 읽고 떠오른 음악과 화가를 소개해 볼까해.
나는 비발디의 음악이라고는 <사계>밖에 몰랐다. 그런 비발디(1678~1741)를 좀 더 깊게 알게 된 순간에 대해 말하려고 해. 오늘 소개하려는 비발디의 음악은 바로크 시대 예배의식에 연주된 모테트(부활절 10일 전부터 연주되는 음악의 한 장르라고 한다)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딸들아”라는 작품 속에 독창곡이야.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여성이 아닌 남성(현재 최고의 카운터 테너인 프랑스 가수)이다. 가사 내용은 모르지만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가슴에 와 닿는 곡이여서 비발디에 대해 찾아보았어. 비발디는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 바이올린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신학교를 나온 비발디는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몸이 약해서 미사를 집전할 수 없어 놀림을 받는 신부였다네. 그는 30년 넘게 베니스의 여자 고아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여자 고아들을 교육하면서 누구보다도 여성에 대해 연민을 갖지 않았을까? 여전히 마녀사냥이 자행되던 시대에 비발디는 앞서가는 페미니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해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던 중 객사한 후에 거의 사람들에게 잊어져가고 있던 비발디를 부활시킨 것은 음악의 아버지라고 배운 바하(요즘은 바흐라고 표기하네)라고 한다. 바하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비발디의 곡을 편곡해서 세상에 알려졌다는 거야. 비발디가 바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니.... 그동안 바하가 더 이른 시기의 인물이라고 나는 착각했는데.
비발디 모테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딸들아”라는 작품 속의 독창곡은 바로 링크 걸어서 볼 수 있는 소스코드를 복사 못하도록 막아놓았네. 유튜브로 연결하면 혹 광고가 나올 수 있지만 좀 지나면 연결이 돼.
https://youtu.be/kkJC8p48g6g?list=RDkkJC8p48g6g
다음은 주로 자화상을 그린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를 소개한 동영상이야. 이 여인이야말로 온몸으로 세상을 헤쳐 나온 금세기 <여자전>에 기록될만한 불굴의 전사(戰士)가 아닐까?
화가 프리다 칼로
https://www.youtube.com/embed/6r3vwjSSQ8Q
한겨레 링크 걸어주어 잘 읽었어.
인터뷰한 글 읽으니 김서령 작가가 더 가깝게 느껴지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만 내면은 단단하고 단호하구나. 슬픔이 힘이다.
여자전을 읽으며 난 작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냥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런 시절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무지 감사했어.
지금 내가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는 것들도 내가 이런 시절을 살았기때문에 가능한 것이기에 함부로 남의 인생을 내 잣대로 판단하거나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했어.
근데 어떤 시대를 살아도 뛰어난 사람들에겐 뭔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가 가진다는 점!
네가 책을 대하는 태도엔 남다른데가 있다. 난 초판과 재판의 인물구성이나 순서가 다른 것은 전혀 몰랐거든. 덕분에 또 시야를 넓힐 수 있네.
그리고 너희 강쥐 사진 웃긴다. 억지춘향하느라 눈 감고 있다가 하품하는 얘가 암수술했다는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