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달 18일까지 경복궁 민속박물관 1실 앞에서 인천 노동사에 대한 전시가 있다.
15일부터 20일까지는 경복궁 입장이 무료다.
아침에 우연히 신문을 보고 이 전시가 있다는 걸 알고 가서 봤다.
동일방직, 대성목재, 이천전기, 부평 공단, 4, 5, 6공단, 화수동, 만수동.......
생각해 보면 내가 살던 그 당시로도 열악했던 송림동에는(난 송림 2동, 3동, 4동에서 살았는데) 황해도에서 피난 오거나 강화, 교동에서 오신 분들이 많았고, 충청도에서(우리 아버지처럼) 오신 분들도 많았고, 대성목재, 동일방직을 다니는 분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송림 2동에 살 때는 빈 공터에 어마어마한 통나무들이 쌓여 있어 껍질을 벗기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전시회 사진에도 있는데 부두 가까이 바닷물속에 내려놓은 나무 껍질을 벗기느라 많은 아이들이 빠지거나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천은 그 당시 다른 곳에서 온 이들이 이질감없이 이런저런 일에 뛰어들 수 있었던 용광로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남동생을 돌보느라 결혼도 안 하고 살림만 하던 분이 있었다.
지독하게 작은 집이었는데 부모님은 없었고, 당시 큰 동생이 제고를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공대를 갔다고 너무 기뻐하며 자랑했는데(그 당시 서울공대는 그냥 공대라 그랬다) 내 어린 마음에도 저 언니는 고생만 하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고 웬지 마음이 좀 안쓰러웠다.
이총각이란 여성이 있다.
이름이 왜 총각일까?
당연하지, 남동생을 보라고 그런 무지막지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후남이, 종말이, 끝순이 뭐 그런 거.
언니와 함께 어린 나이에 동일방직에 다니며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열삼히 하면 잘 살 줄 알았던 그이가 일과 함게 성장하며 올바른 길을 모색하며 변화해 가는 모습이 거기 설명되어 있다.
경복궁 중앙박물관 학예사들이 이 프로젝트를 정한 다음 인천에 가서 오랜 시간을 들여 각자 여러가지 일을 하며 늙어간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으고 해서 만들어진 전시회다.
사실 그때 노동의 기저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으나 우습게도 자료나 사료는 거의 남성 노동자들의 것이 대부분이다.
학예사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자체가 또한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희생과 노동의 주체였으나 모든 것에서 비껴난 여성의 삶
일단 사진~
무슨 식당이라더라? 지금도 있다는데
당시 공화춘 모형
이 당시 경인 철도를 놓느라고 많은 중국 사람들을 불렀고 꿀리하고 불리던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음식을 해 먹기 위해 밀가루를 들고 다니며 만들었다는 짜장면
우리 어렸을 때 동네에 중국 사람들 많이 살지 않았나?
일년 내내 똑같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는데.
황해 연탄
황해도에서 피난 왔다는 소리지
인천은 다른 해안에 비해 늦게 열린 건데 왜냐하면 너무나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라더군.
한번 열리면 이곳저곳에서 너무나 접근하기 쉬운 곳이라 되도록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다더군, 부산이나 군산에 비해.
그리고 사실 인천에 최초로 들어 온 게 참 많다더구먼.
악기가 그렇고, 영화 만드는 일도 염전, 이견은 있지만 커피도
이런 염전 기법은 일본에서 왔다더라.
우리나라 소금은 물을 가마솥에 끓여서 만드는 것이었대
그리고 개발은 염전 땅에서 다 이루어졌다두먼. 그래서 공단이 거의 염전에서
어릴 당시 인천에서 야구는 아주 자연스럽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었던 운동이었다.
내가 다닌 서림학교는 야구를 잘 해서 아마 전국 1위를 했을 것이고 카퍼레이드 비슷한 걸 하고 막 박수치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이게 사실인지 내가 책이나 신문을 보고 만든 기억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얼굴도 기억나는 그 야구선수는 그때 mbc 프로 선수로 갔었던 것 같은데...
중고등학교 때도 라디오를 매달아 놓고 온 식구가 얼마나 고교 야구 중계를 들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