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소야(宗谷)곶, 그 짙푸른 바다
박 찬 정
이른 아침인데도 도쿄의 공기는 후끈하다.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모노레일은 도쿄의 빌딩사이를 지나며 일터로 가는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차안이 헐거워지고 나서야 하네다 공항 에 도착했다.
장마 끝에 찾아온 더위를 피해 도심을 떠나는 인파로 공항 안은 혼잡하다.
와카나이 여행을 같이 할 일행은 네 명이다. 지난 해 가을 계획했고, 올 2월 다시 만나 일정을 의논했었다.
일본인 세 명과 한국인 한 명, 국적과 관계없이 우린 오래된 친구다.
여행일정과 예약은 자국민 세 명이 의논하여 정했다. 렌트카 운전은 세 명이 교대로 하루씩 맡았고,
나도 그 무게만큼의 임무를 맡았다.
신세를 지는 것도 과중한 부담을 떠안는 것도 불편해 하는 국민성대로 네 명의 의무와 권리는 쏠림 없이 나뉘어졌다.
북위45도에 걸려 있는 일본 최북단 와카나이는 오오츠크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는 시기가 연중 서너 달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한 날 소야곶의 기온은 영상 11도였지만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준비해 간 옷을 다 껴입고도
이가 딱딱 부딪치게 추웠다.
튀김우동으로 점심 요기를 하고 찾아간 곳이 소야(宗谷)곶이다.
일행 세 명은 지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자국 영토 최북단으로만 지명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소야곶은 그런 지리적 지명만이 아니다.
1983년 소련 요격기의 포격을 맞고 격침된 KAL기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그때 와카나이에 사고 대책본부가 차려졌고, 유족을 태운 훼리가 소야해협으로 갔었다.
소야곶 바닷가에는 일본 최북단의 땅을 표시한 탑이 있다. 바다 건너로 사할린 섬이 보인다.
땅 끝에 발 딛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꼭 가보아야 할 곳을 정해 놓아 마음이 바쁘다.
언덕 위 소야공원에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날개를 편 종이학 형상의 탑이 있다.
세계 평화 기원의 탑이며 KAL기 희생자 추모비다. 학이 바라보는 방향은 조국 땅 한국이라고 씌어 있다.
산산조각 난 비행기 잔해와 함께 찬 바다에 곤두박질쳐진 억울한 죽음을 위로했다.
그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기 바라며 두 손 모아 종의 줄을 힘껏 당겼다.
가족조차 쉽게 올 수 없는 멀고 고적한 곳. 여행 중에 잠깐 서성이다 가지만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다.
빼곡히 새겨진 269명 희생자 명단에는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 있다.
그는 미국에 이민간지 9년 만에 첫 고국 방문길이었다. 아버지 장례에 못 온 그는 한 달이 지나
겨우 시간을 내어 오던 길에 사고를 당했다.
이념이니 냉전 시대니 말조차 모르는 그의 노모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갔다고 원망 섞인 넋두리를 했다.
약소한 나라 우리 국민은 울분과 비통한 마음으로 애도했다. 희생자 유족들을 태운 배가 사고 유역을 선회하며 짙푸른 바다에 흰 꽃다발을 던지고, ‘잘 가라’ 울부짖는 모습은 온 국민을 울렸다.
그리고 34년이 지나 그 해협을 바라본다.
우리와 이념의 각을 세웠던 소련은 수교국이 되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 대를 이은 러시아와 무역을 하고 자유로이 여행을 한다.
우리 민항기가 러시아 상공을 난다. 세상은 이념보다 이권에 무게를 두고 변화했다.
그때 울분의 통곡을 듣던 소야 해협 짙푸른 바다만이 그 곳에 그대로 있다.
다음날 새벽 카훼리를 타고 야생화의 섬 례분도로 향했다. 거친 바람을 헤치고 가야하는 배는 크다.
무릎 꿇고 앉는 것이 몸에 밴 일본인들도 2등실 다다미 깔린 넓은 객실에 자리 잡고 눕는다.
나도 여권이 들어있어 늘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 다니는 손가방을 머리에 베고 누웠다.
배는 북녘 바다를 헤치고 간다.
례분도 여행은 버스투어다. 배 한척에서 내린 여행객은 버스 네 대 분이다.
섬 안의 관광 코스를 달리하거나 시차를 두어서 혼잡을 피하고 천천히 토산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관광지도 그런 제도적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
섬에는 바람 때문에 큰 나무는 보기 드물다. 제 철 만난 야생화와 키 작은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카메라에 주워 담는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목재나 화목도 당연히 귀하고 비싸다.
하지만 살아가는 방법은 있다.
해류를 타고 흘러와 해변에 얹어진 유목을 주어다가 켜서 목재로 쓰거나 방한용 화목으로 쓴다.
러시아에서 흘러온다고 한다.
그것도 자연이 베푸는 혜택이다.
례분도 일주 여행을 마치고 리시리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부두에 나와 ‘례분도에 또 오세요’ 플랜카드를 들고 손을 흔들며 환송하고 있다.
율동 퍼포먼스도 벌인다. 하늘길로, 땅길로, 뱃길로 찾아 온 먼 북녘의 섬.
또 다시 올 기약 없는 나는 섬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답례했다.
례분도와 이웃한 리시리도의 지형은 사뭇 다르다.
후지산과 닮은 리시리산이 분화하며 용암이 바다까지 흘러내려 굳었다.
그 바다는 다시마 밭이다. 갈빛 치맛폭 같은 다시마가 물속에서 너울거린다.
물 속 자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고 깨끗한 바다가 길게 이어진 해변.
그러나 한여름이라도 비키니를 입고 그 바다에 뛰어들 사람은 없다.
오오츠크해로부터 내려오는 차가운 해류가 다시마를 키우고 어패류를 살찌운다.
사람은 자연의 힘에 기대어 살고, 자연은 사람에게 수급의 균형을 맡겼다.
리시리도에서 와카나이로 돌아오는 배 갑판에 서서 검은 바다로 떨어지는 칠월의 일몰을 본다.
소야곶에서 복받친 울분은 야생화의 섬을 돌아보며 차츰 가라앉았고, 남은 상념은 일몰과 함께 바다에 묻었다.
와카나이에서 마지막 저녁이다.
어시장에 딸린 게 요리 식당 예약시간에 맞춰 가는 우리 발걸음은 바쁘다.
고즈넉한 항구 와카나이에 가로등이 켜진다.
그 사고가 난지가 벌써 34년이구먼.
희생자중 아는 사람도 있었다니 맘이 더욱 착잡했겠다.
이번에 순호가 거제 갔을때 일본여행 한다더니 거기 간거구나.
모임에서 일본 여기저기 갔지만 와카나이란 곳은 못가봤네.
오키나와가 최남단이라 했나?
시골스런 그곳도 가본지 몇년됬네.
KAL 희생자 추모탑도 있다니 ~가서 보면 가슴이 울컥 할거 같다.
이번 글은 상념에 젖게 하네.
나도 화이팅 !
찬정이 글에 그곳을 다녀온 듯
그 어머어마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 34년이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쉽게 잊고 살아가네
참말로 가슴이 뭉클하네
내가 아는 지인도 남편을 잃고 딸과 들이서만 살고 있는데.....
소야곶이 어딘가 싶더니~~~
덕분에 내 생애에 아마도 한 번도 가볼 수 없을 것 같은
그곳을 가본 듯 생생하네!
칼 희생자 이야기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서 34년이나 지난 지금도 눈물이 나려해요.
희생자 명단에 아는 이도 있다니
게다가 그 현장까지 간 찬정이는 얼마나 더 먹먹했을까?
우리 힘으로 어떻게도 해 볼 길 없는 슬픈 일들이
역사의 편편에 뻬꼭하니~
이따금 하나님께 그 이유가 뭔지를 묻는
불경스런 장문의 편지를 쓰고 싶은 때가 있어요. ㅠㅠ
제가 지난주 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를 다녀왔습니다.
일행에는 지난해 7월 와카나이를 같이 여행했던 친구도 있고,
후쿠오카에 사는 친구도 있어서 여섯 명이
후쿠오카 공항에서 만났습니다.
국제선을 타고 온 사람, 국내선을 타고 온 사람, 신칸센으로, 자동차로,
제각각 교통 형편대로 예정된 시간에 모여들었습니다.
여행중 재미있던 일이야 일일이 이야기할 것 없고
나가사키 원폭투하 자료관를 돌아 본 소감이나 이야기하지요.
살상의 처절함은 와카나이의 분노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 살상과 파괴 덕분으로 우리가 해방의 기쁨을 얻었다 생각하니
' 세상 일이 뭐 이런가?' 싶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인명을 그렇게 많이 살상하고 만신창이 패전국으로 만들어 준 그 나라.
철천지 웬수처럼 지낼 것 같아도 그 동안 흐른 세월때문인지 실속 챙기려는 심산인지
이 나라는 米國 (일본은 미국이라는 한자를 이렇게 씁니다) 이라면 껌벅 죽습니다.
자료관에서 본 사진중 억장이 무너지는 사진이 있어 찍었는데
천장 조명때문에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봄날 수다방은 잔치분위기라서 여기에 올려봅니다.
찬정이가 역사의 현장이 있는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와
이곳에 올립니다.
1번 사진.
2번사진
설명은 찬정이가 자세히 하렴
윗 사진은 자료관에 걸린 원폭 현장 사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원폭으로 죽은 동생을 업고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소년.
소년이 슬픔과 공포을 견디느라 앙다문 입.
보는 마음이 무너져내립니다.
그 소년 살았으면 여든 한두 살 되었을텐데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어도
일주일, 열흘, 한달 엄청나게 죽었으니 그 소년 역시 어찌 되었을지도...
아래 사진은 원폭 투하 중심지에
화강암 기둥 하나 세워두었습니다.
그 당시 이곳에는 영원히 풀 한포기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70여 년 지난 지금 나무가 무성하고 자연스럽게 풀이 나 있습니다.
세상에 영원히 불가능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시간을 따라다니며 자상스럽게 설명하는 평화해설사 설명 들어보면
즈이 나라 일본을 자꾸 피해자라고 말하데요.
즈이들이 아무 짓도 안했는데 마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뚜둘겨 부수고
떼죽음을 시킨건 아니잖나. 침략하고 못된 짓 하며 전쟁을 일으킨 죄의 댓가였다는
인식을 아예 안하는 걸까 아니면
내놓고 말 못하지만 맘속으로는 하고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멋진곳 다녀왔네.
찬정이 글을 읽으면 진솔한 맛과 함께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니
맘이 가라앉으며 괜시리 나까지 조신해진다네.ㅎ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면서
나라의 한귀퉁이 차지하고 앉아 나도 같이 뭉클....!
그곳이 그곳이었구먼.
가슴아프이...
현재의 장면과 과거의 장면이 뒤섞이며
가슴 아파함은 한민족이기 때문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흐르고,
세월은 비껴가기 바쁘구먼,
잘읽었네.
좋은글 많이 쓰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