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맨해튼에 있는 첼시마켓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민 예쁜 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중엔 잡지에 소개된 유명한 집도 꽤 있다.
주로 쿠키와 커피, 빵, 해산물 요리 등을 파는 점포가 많은데, 어엿한 뉴욕의 관광 명소로 꼽힌다.
그곳의 여러 가게 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살아 있는 랍스터를 통째로 쪄서 파는 식당이었다.
랍스터의 크기도 다양해서 어떤 것은 서너 명이 나눠 먹어도 좋을 만하게 아주 컸다.
너무 큰 것은 살이 딱딱하고 고무를 씹는 것처럼 질기다고 해서,
우리는 혼자 먹기에 알맞은 1.5파운드 정도 되는 것으로 세 마리를 골랐다.
남편과 아들과 내가 각자 한 마리씩 차지하고 먹기로 했다.
뉴욕에서의 첫 가족외식이었다.
커다란 찜 솥에서 금방 쪄낸 것을 바로 먹으니 한결 더 맛있었다.
살이 연하고 단맛이 도는 것이 아주 별미였다.
거기에다 게살샌드위치와 시원한 탄산음료를 곁들이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워낙 해산물을 좋아하는 데다 생선가시를 잘 발라먹는 나는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내 몫을 깨끗이 다 먹었다.
그리고는 남편과 아들이 대충 먹고 내놓은 대가리 속에 든 육즙과 내장까지 남김없이 싹싹 다 훑어먹었다.
내가 하도 맛있게 먹으니까 아들이 신기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그렇게 맛있어요?”
유학 가서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뉴욕에서 직장을 잡은 아들이 어찌 사는지 보러 온 길이었다.
직장에 매인 남편은 열흘 남짓 있다가 대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겨우 시차적응을 하자마자 가는 것도 아깝고,
혼자 자취하는 아들 좀 거둬주고 싶어서 보름 정도 더 있다 가기로 했다.
갓 입사한 아들은 더 이상 쓸 수 있는 휴가도 없었다,
아들이 출근하고 나면,
나 혼자 지도를 보고 지하철 타고 다니며 구경했다.
센트럴파크, 하이라인파크, 브라이언파크 등 유명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푸드 트럭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도 먹어 보았다.
지하철과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뉴저지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의젓하게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흐뭇하고 좋았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내가 돌아갈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날은 집에서 부엌일을 하느라 온종일 바빴는데,
아들이 모처럼 밖에서 저녁먹자고 전화했다.
나는 단번에 싫다고 거절했다.
엄마 밥을 한 끼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얼른 들어오라고 채근했다.
마침 아들이 좋아하는 국을 잔뜩 끓여서 나누어 얼리고,
밑반찬도 몇가지 해놓은 터라 저녁상을 차리기가 아주 수월했다.
퇴근시간이 되자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음료수 좀 빨리 시원해지게 냉동실에 넣어 놓으세요.’
아들은 보통 때보다 많이 늦게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첼시마켓의 랍스터 두 마리와 게살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사 온 것을 주섬주섬 꺼내 식탁에 풀어 놓으며 아들이 내 손을 잡아 당겼다.
“엄마가 너무 잘 드시기에 한국으로 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더 사드리고 싶었어요.”
퇴근길에 집과는 반대 방향인 첼시마켓에 지하철을 타고 가서 줄서서 사가지고,
따끈할 때 먹게 하려고 막 뛰어온 모양이다.
아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깜짝 선물에 처음엔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니 첫술에 울컥 목이 메었다.
일부러 가서 사갖고 달려온 그 성의가 너무 고마워 감격했다.
매양 어린 막내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철이 들었구나.
한없이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 끝에 쉰아홉 살 내 나이가 씁쓸하게 얹혔다.
뜬금없이 10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충북 청원에 유명한 ‘오리황토구이’집이 있었다.
오리 뱃속에다 여러 가지 곡식과 약재를 채워 넣고,
헝겊으로 잘 싸고 토분에 담아 가마에서 천천히 구워내는 요리였다.
그렇게 구운 오리는 기름이 쫙 빠져서 담백하고 육질도 부드러워 씹기도 전에 그냥 술술 넘어갔다.
오리 뱃속에다 채워 넣은 곡식은 찰진 오곡밥이 되어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맛있고 든든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청원 IC로 빠져나가서 미리 주문해 놓은 것을 찾았다.
행여 식을세라 담요에 둘둘 말아 가지고 엄마가 계신 인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칠순의 엄마는 나보다도 내가 들고 간 음식을 더 반기셨다.
특히 그 부드러운 식감을 아주 좋아하셨다.
어린아이처럼 두 손과 온 얼굴로 맛있게 드셨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서,
앞으로 친정에 올 때마다 사다 드려야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고작 서너 번 밖에 더 사다드리지 못했다.
내 일상이 너무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저 애틋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일흔 일곱 아쉬운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는 그 황토오리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다.
따뜻할 때 잡수시라고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운전하고 온 딸의 정성을 무척 고마워 하셨다.
나도 오늘 아들이 사들고 온 첼시마켓의 랍스터 이야기를 두고두고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것 같다.
김 희재 : 계간수필 천료 (1998년).
계수회, 수필문우회, 한국문협, 국제PEN 회원.
얼마나 행복했을까?
똑같이 애정을 주어도 효도 하는 자식이 있고 맘에 안드는 자식이 있더라.
애정을 너무 많이 주어도 부모 상투 잡고 흔드는 경우도 많아.
자식과의 관계가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
암튼 춘선인 성공.
이 글은 PEN문학 141호(2019, 1-2월호)에 발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