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 93.- 세 소녀가 희희낙낙 정문으로 다가온다 "아줌마, 정말 영화가 떠오르며 재미있었어요" 여자는 즐거워하는 애들에게 찬물 낏는 말이 될까 속으로 참는다 얘들아 여기는 그보다 깊은 역사가 많은 곳이란다. 정원에서 나오며 오른쪽에 주립 극장이 있다. 프로그램을 살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 즐비하다. 좀 더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오니 건너편에 ' 모짜르트가 살았던 집' 이 있다. 아! 바로 여기 미라벨 정원 건너에서 살았구나. 그럼 주교의 음악회가 미라벨궁전에서 열릴 때 쉽게 걸어서 왔겠네. 여기서 작곡한 모짜르트의 청년시절의 음악이 얼마나 많은가? " 아줌마! 우리가 탈 버스가 와요" 소연의 말에 정신 다듬으며, " 우선 저녁을 먹고 숙소에 가야지. " " 아니에요, 숙소옆에 슈퍼에 가서 요기꺼리 사면 될 거에요." 하! 야가 영국에서 살면서 내핍생활이 몸에 배었네. " 소연아, 내가 오늘 맛있는 것 대접할게. 너네들은 오늘 하릇밤만 여기 있을 거잖니? 그러니까 멋진 잘츠부르그의 저녁구경도 좋잖니. 아까 일찍 숙소에 갔었으면 다시 나오기 어려운데, 이왕 지금까지 있었으니 여기서 저녁먹고 들어가자" " 너무 아주머니가 많이 쓰셔서 미안해서요" " 괜찮아, 내가 할 만하니까 한다고 하는 거야.은지도 좋고.' " 예, 그러시다면. 그런데 어디 아시는 식당이 있으서요?' " 없지만 강가를 걷다 보면 분위기 좋은 곳이 있을 것 같애" " 예..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의견이 모아지자 이제는 여자가 앞장서서 강가로 간다. 6월의 어스름한 기운이 도는 강가에는 카페 등불들이 서서히 피어나고 있다. 강 건너 호엔잘츠부르그가 잘보이는 야외 카페에 들어선다. 빈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는데 여종업원이 다가온다. " 식사를 할 것인가요? 음료만?" 아주 건방지게 묻는데, " 둘 다!" 여자가 마주 강하게 말한다. " 오케이! 제일 좋은 자리로 마련하죠" 갑자기 친절해진다. 정말로 좋은 자리에 앉아 여자가 몇가지 음식과 음료를 시키고 종업원이 돌아가자마자 소연이 킥킥웃기 시작한다. " 아줌마! 짱! 저 여자가 다소곳해졌네요 ㅎㅎ" " 얘들아, 아줌마가 너네들에게 충고 하나 할게. 이제부터 너희들이 이곳에서 살려면 우선 마음부터 단단히 잡아야 해. 부모님께 시시로 의논 드릴 수도 없으니 말이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하나! 너네들 왜 이곳에 유학 왔니? 그 것을 잘 생각해 봐. 한국에서도 얼마던지 공부할 수 있잖니? 내 생각에는 현지에 와서 공부하는 것은 바로 현지의 문화를 직접체험하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음악연습에만 치중하지 말고 이 곳의 역사, 음악가의 발자취, 등등 더 나아가 문화체험을 해 보도록 노력해 봐라. 나는 이번에 잠시 다녀가지만 너희들은 이제부터 공부 시작하며 오래 있을 터이니 얼마나 좋은 기회이니..." 여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애들이 피곤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시킨 음식을 가져오자 정신차린 눈으로 반짝인다. 그래.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오겠지. 내가 왜 사감처럼 이러노? „ 참! 아줌마 짐이 기차역에 있는데요 찾아서 숙소에 가야겠네요.“ 갑자기 기억이 났는지 소연이 먹던 수저를 놓으며 일어설 자세를
취한다. „ 소연아 어서 천천히 먹어. 짐은 내일 너네들 비엔나 돌아갈 때 찾아도 되니까. 내가 세면도구와 속옷정도는 여기 손가방에 마련해 왔거든..“ „ 어머! 이제 보니 아줌마 여행박사시구나.. 어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타햐! 어쩌다 갑작스런 연주여행을 다니다보니 하루밤 정도는 외박할 준비가 되어있네.. 속으로 생각하며 애들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 어린애들이 외박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하는 바램이랄까. 애들하고 다니다보니 여자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느껴진다. 하긴 서른 넘어 마흔으로 달리는여자! 어쩌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그동안 나이도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서야 뒤를 돌아보게 되나니.. 앞으로 나는 어떻게 또 살아갈까? 여자는 소녀들에게 잠시 은지를 맡기고 강가를 거니는데 1903년에 만들어졌다는 모짜르트 다리가 보인다. 건너 편 호엔잘츠부르그 성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성채가 흐르는 강물에 반사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신비롭게 아름답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 모짜르트 곡을 치게 되면 오늘 이곳의
정경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여행을 잘 시작했다. 내일 세 애들이 돌아가고 딸애하고 둘이만 다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나는 분명히 이렇게
훨훨다니고 싶었어. 언제부터였을까?
-94.-
저녁을 마치고 소연이가 안내한 유스호스텔에서 피곤한 까닭에 푹 잤다.
다음 날은 구도시에서 아이들과 여유롭게 지내고 늦은 오후에 잘츠부르그 기차역에서 아쉬웁게 헤어지며 7월에 다시 비엔나에서의 만남을 기약했다.
세 소녀가 떠나자 여자는 로렌스옹이 적어준 산장호텔에 전화를 한다.
전화 받는 주인이 반갑게 빈 방이 있으니 어서 오라고 한다.
짐보관소에 맡겼던 집을 찾아 택시를 타고 그 곳으로 가는데 시내를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간다.
가는 길에 차창밖으로 보이는 시내가 옅은 안개에 쌓여 신비롭게 보인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어느새 기다리고 있던 주인과 종업원이 다가와 여자의 짐을 받아 옮긴다.
" 제이드씨! 맞지요?"
" 예, 그런데 어떻게?"
" 로렌스옹이 며칠전 전화 주셨어요. 오실거라고요. 반갑습니다. 꼬마아가씨가 있다고 하셔서 바로 알아 보았지요. 허허허!"
민속옷 쟈켓을 입은 주인은 연상 웃으며
"우리 산장에서 처음 맞이하는 한국분이십니다. 편히 쉬도록 해드릴게요"
그가 인도하는 안으로 들어가며 주위를 보니 고즈넉하다.
호텔은 완전히 목조로 되어진 전통 산장이다.
"그럼, 2층에 마련된 방에서 잠시 쉬시고 7시에 저녁식사하러 내려오시지요. "
" 예. 나중에 뵐게요"
종업원이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니 와우! 탄성이 나온다.
방문 바로 건너편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여자를 가볍게 하늘위로 올려놓는 듯하다.
창가로 가까이 가니 멀리 보이는 잘츠부르그시가 동화책에 나오는 정경이다.
" 엄마! 와! 여기 너무 좋다! 와와!!'
딸애도 탄성을 연방하며 손뼉까지 친다.
짐을 들고 있던 종업원이 모녀의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 편히 쉬십시요" 인사하고 나간다.
종업원이 나가자마자 여자는 방을 찬찬히 둘러본다.
커텐, 소파, 침대보, 전등갓이 모두 꽃문양이 잔잔한 같은 천이다.
벽에는 잘츠부르그 명소 그림들이 고풍스런 액자에 걸려있다.
침대옆 화장대는 거울이 오팔형이고 화장대 다리가 날씬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다.
소파탁자는 높이만 약간 낮고 같은 양식의 것이다.
여자는 하룻밤만 자려고 했던 생각이 산장분위기에 젖어 좀 더 며칠 있고 싶어진다.
일단 가방을 열어 저녁식사에 입을 옷을 꺼낸다.
딸애를 간단히 세수시킨다음 묶었던 머리를 풀어 내리고 크림색 샤폰 원피스를 입힌다.
" 엄마, 우리 어디 파티갈 거에요? ㅎ"
" 그럼, 여기 아래 식당으로요. 공주님 ㅎㅎ 잠시 소파에 앉아 계시고요. "
여자도 흰색 블라우스와 롱스커트로 갈아입고 살짝 화장을 한 다음 시계를보니 벌써 내려갈 시간이다.
" 공주님, 그럼 나가실까요 "
" 엄마! 정말 파티에 가는 기분인데 ㅎ"
복도로 나오니 고가구들이 적당한 곳에 놓여있다.
아래로 내려오는데 로비로부터 즐거운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모녀를 본 주인이
" 아. 저기 제이드씨가 오시네요. 마에스트로 클라우스!"
클라우스? 어머! 저분이 ...
지난 번 비엔나에서 우연히 만났던 분이 여기에는 웬일로?
여자는 그를 보면서 목인사로 살짝하는데,
" 제이드! 여기서 우리 또 보네요 . 허허허! 자, 어서 이리 와요. 우리 식구가 여기서 묵고 있어요."
클라우스가 반갑게 맞이하며 곁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를 소개한다.
"나의 사랑하는 외동딸 오르넬라에요. 오르넬라! 내가 말했던 파울의 반주자 제이드이다."
" 아!... 파울의 구원자! ㅎㅎ 반가워요."
잘룩한 허리를 강조한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모습처럼 표현도 특이하다.
" 안녕하세요.반가워요"
여자가 오르넬라하고 얘기하는 동안 클라우스는 은지를 데리고 손짓으로 대화한다.
" 제이드씨! 전화통화를 먼저하고 식당으로 가실래요. 비엔나의 파울 로렌스 교수로부터 전화왔었어요. 제이드씨가 도착하는데로 연락달라고..."
아니, 내가 여기 올 것을 알고 있었나? 괜히 이곳으로 왔나?
잠시 망설이다가,
" 좋아요, 식사 후에는 늦은 시각이니 지금 하지요."
"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 그럼 다른 분들은 식당으로 가 계세요."
두사람의 대화를 흥미있게 듣고 있던 오르넬라가 한마디 한다.
" 아니, 파울은 비엔나에 있으면서 제이드 행동반경을 꿰뚫고 있나 보네요 ㅎㅎ.
파! 그럼 우리 먼저 식당으로 가지요. "
"제이드, 우리가 꼬마아가씨를 데리고 먼저 갈테니 전화 천천히 하고 와요"
클라우스가 은지를 덥썩 무등태우며 말한다.
" 은지야, 엄마가 파울아저씨와 전화하고 갈테니, 이 분들과 같이 가 있어. 괜찮지?"
" 응. 근데 빨리와. 말이 안 통해서 "
" 그래."
모두 자리를 떠나자 주인이 전화를 한다.
"여기 잘츠부르그 산장 호텔입니다. 제이드씨가 옆에 있어요. 바꾸어 드릴게요"
수화기를 건네준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아인이에요"
여자는 연주회를 위해 지어진 이름 '제이드'가 통상적으로 불리는 것에 부담이 되어 본명을 강조하며 현재는 연주회와 무관한 여행중임을 인지시킨다.
"......아인.. 아! 제이드,잘 지냈어요? "
평소와 달리 잠긴 목소리이다.
어디 아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