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이 상투적인 물음에도 그녀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저는 호박전을 좋아해요. 동글동글한 것이 예쁘고 맛있더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하고 많은 음식들 중에서 호박전을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다.
큰아들의 여자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던진 질문과 그녀의 답이었다.
사실 나도 호박전을 좋아한다.
아니, 모든 종류의 전을 다 잘 먹는다.
그래서 어떤 전이든 한입 베어 맛을 보면 반죽이 잘 되었는지, 기름은 적당히 둘렀는지,
불 조절은 잘 했는지 등을 금방 안다.
그런 내게 호박전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대답은 일단 낯선 아가씨에 대한 호감지수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 아가씨가 우리 식구가 될 것 같은 예감마저 스쳐갔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유난히 전을 잘 해먹었다.
황해도 사람인 아버지는 녹두빈대떡을 아주 좋아하셨고,
경상도 출신 어머니는 달달한 배추전을 즐겨 드셨다.
계절 따라 동태전이며 동그랑땡, 호박전, 버섯전, 누름적, 산적, 육전,
해물파전, 굴전, 깻잎전 등을 골고루 해먹었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시기여서 기름 냄새 풍기면 부유한 느낌이 들곤 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녹두빈대떡을 만들려면 꼬박 이틀 걸렸다.
녹두를 맷돌에 갈아 반으로 쪼갠 후에 밤새 물에 담가 놓는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물에 뜬 껍질을 잘 골라 낸 후 물과 함께 맷돌에 곱게 갈아낸다.
현무암으로 된 맷돌을 나무 삼발이에 잘 앉혀 놓고,
둘이 맞잡아 호흡을 맞춰 돌려야 녹두가 곱게 갈려 나왔다.
맷돌질은 대개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가 딸들의 손을 감싸 쥐고 부지런히 녹두를 가는 사이,
어머니는 빈대떡에 넣을 재료를 준비하셨다.
잘 익은 배추김치 송송 썰고, 고사리는 대충 썰고,
돼지고기 굵은 채 썰어 양념하고, 숙주나물은 데쳐서 숭숭 썰어 넣었다.
경상도아내가 황해도남편에게 배워서 만드는 녹두 빈대떡은 최고의 명품이었다.
고소하고 바삭하고 아삭한 식감에 감칠맛까지 고루 갖췄다.
우리 집에서 명절에 전을 지지는 일은 그리 녹녹한 작업이 아니었다.
손이 크신 어머니가 준비하신 갖가지 재료들을 맛있게 노릇노릇 지져내려면 인내심이 많이 필요했다.
처음 전을 부치기 시작할 땐 고만고만한 딸 넷이 모두 팔 걷어 부치고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따끈한 전 몇 개 집어먹고 나면 슬슬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내빼곤 했다.
끝까지 프라이팬 앞을 떠나지 못 한 건, 요령 없는 둘째 딸인 나와 총지휘자인 어머니뿐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전을 부치다 보니 나도 곧잘 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에도 나는 전(煎)을 자주 부쳤다.
생일이며 명절이며 손님 초대 등 큰상을 차릴 때면 손이 많이 간다고 전을 빼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름 냄새를 풍겨야 잔칫집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덕분에 우리 아들들도 나처럼 엄마 옆에서 전 부치는 걸 거들어 주며 자랐다.
전은 금방 지져낸 것을 뜨거울 때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던 엄마의 말씀도 내 말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변했다.
요즘은 집에서 전을 거의 부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박전을 좋아한다던 아가씨를 며느리로 들이고 난 후부터
명절에도 부침개판을 벌리지 않는다.
명절 쇠러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대전에 오려면 아이들은 길에서 이미 지친다.
집에 내려오기 직전까지 직장에서 종종걸음 치다가 오는 건 아들이나 며느리나 똑같은 입장이다.
그런 판에 전까지 부치라고 하면 힘들다고 며느리 입이 나올까 저어되었다.
그렇다고 며느리를 본 마당에 나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부치자니,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시어머니 심보가 터져 나올까 봐 염려되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고되고 힘들면,
마냥 너그러운 시어머니 노릇을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매스컴에서 떠드는 명절 스트레스 제 1위가 ‘시댁에 가서 전 부치는 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과감히 명절에 집에서는 전을 부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깟 전을 부치느라
모처럼 집에 온 아이들과 얼굴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 따라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고속도로 귀성전쟁을 겪고서야 간신히 만난 식구들 아닌가.
요즘은 매일 먹는 반찬도 적당히 남의 손을 빌려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풍조 때문인지 나도 점점 재료를 사다가 일일이 다듬어서 음식을 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니 직장 다니며 살림하는 새아가는 오죽할까.
이참에 손 많이 가는 음식 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 내 사고방식을 확 바꾸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새사람 핑계대고 나도 신세대들처럼
주방에서 보내는 나의 시간을 보다 합리적으로 재분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침 우리 동네 상가엔 대전에서 가장 전을 맛있게 부치는 손맛 좋은 전문점들이 밀집해 경쟁하고 있다.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가게에다 미리 예약해 놓고,
명절 전날 식구들이 다 모일 시간에 맞춰 따끈한 것을 찾아다 놓으면
고부(姑婦)가 두루 평안할 것이다.
며느리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맞은 명절은 추석이었다.
토란국이며 나물이며 고기, 생선 등 명절음식준비를 대충 해 놓고는
오후에 며느리에게 단둘이 외출을 하자고 했다.
대나무로 만든 아담하고 예쁜 채반을 챙겨 들고 나서며 나는 가만히 속삭였다.
“아가야, 지금 저어기서 우리 동서들이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 오자.
네가 좋아하는 호박전은 특별히 많이 부쳐 놓으라고 부탁해 놓았단다.
나랑 같이 가서 따뜻할 때 가져오자꾸나.”
내 말뜻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던 며느리는 눈치로 알아차리고 발걸음 가볍게 따라나섰다.
나는 부침개전문점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우리 동서들’이라고 부른다.
명절에 큰집에 모여 분주하게 전을 부치는 여자들은 대개 시댁에 온 며느리들이고,
촌수 따져보면 서로에게 동서가 되던 내 젊은 시절의 기억 때문인가 보다.
여하튼 며느리와 함께 대나무 채반을 들고 가서
금방 지져낸 따끈한 전을 입맛대로 골라서 보기 좋게 담아 오면
우리 집 명절 음식 준비는 완벽하게 다 끝난다.
그 덕인지 며느리는 명절에 시댁에 오는 걸 그리 힘들어하지 않는 눈치인 것 같다.
김 희재 : 계간 수필 천료 (1998년). 계수회, 수필 문우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팬클럽 회원.
미국 플로리다 탈라하시 한글학교 교장 역임
육군대학교, 한남대학교 한국어 강사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외 공동 수필집 다수.
현명한 시어머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고마워할까?
오랫만에 진심이 느껴지는 춘선이 글 읽으니 좋네.
좋은 글 많이 써라.
난 명절 전 날 전을 허리가 휠 정도로 잔뜩 부쳐서 명절 지나고 난뒤 먹다 먹다 나중엔 맛이 없어져 버린적도 있어.
미련 곰퉁이~ㅎ
것두 좀 젊었을때고 이젠 두접시 정도만 부친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정성껏 해주니 남편이 너무 많이 좋아져서 보람도 있고 ~
이뻐서가 아니고 죽고나면 내 한이 될까봐~ㅎ
며칠전 부턴 삼시 세끼는 너무 힘들다.
돌아서면 밥때니 한끼는 감자를 쪄주던지 빵이나 떡으로 떼우자 했더니 그동안 미안했던지 대번에 찬성.
그렇게 하니 한결 수월하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네.
세월 정말 잘도 간다.
어쨋든 가을이 다가오니 그냥 좋다.
어디론가 떠나면 코스모스며 고추 잠자리 파아란 하늘을 볼 것이고 숲의 향기도 느낄 것이고 ~
아~ 떠나고 싶다.
이제 한달만 고생해서 울 남편이 허리 지지대 풀면 해방이요.
우리집은 종갓집이라 완전히 온가족이 다 먹고도 남아
싸들고 갈 정도로 전을 부쳤구먼.
아 ~! 징혀
다 누가 했것어.
울 작은엄니들이 다 하셨지.
난 큰딸이라
어깨너머로 배운것만 해도 한두레반. ㅋ
시어머니가 조로케 며느리를 귀애하니
며느리도 그맘을 다 알꺼라.
아주 잘하는겨~!!!
전 부치는 냄새가 솔솔 나서 추석이 코 앞에 닥친 줄로 착각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지요.
오랫만에 보는 아들, 손자, 며느리와 둘러앉아 얼굴 보며 놀련다고
미리 미리 일 다 해놓고 우릴 기다리셨어요.
어머니가 목 빠지게 기다리시는 줄 알면서도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 내려가다가
경주 들러 반나절 놀고 간 적도 있습니다 (27년전 얘기)
그런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치매로 ~
부모는 시대 흐름 따라 자식을 배려하고,
자식은 부모의 속 깊은 마음을 헤아려 섬기면 더 말할 것 게 없지요.
나 자신은 어떤 며느리였나 뒤돌아 보니
나는 안 보이고
행여나 며느리 흉날까봐 어루덮고 감싸느라 바쁘신
우리 어머니만 보입니다.
제사나 차례때면 어김없이 부쳐댔던
외숙모( 날 길러준 엄마)의 녹두빈대떡이 그립네요.
제 이모님중 한분은 부평시장안에서 한쪽에 쭈구리고 앉아서
빈대떡장사를 했었지요. 그 어떤것보다도 지글지글 뜨끈한 빈대떡이
인기가 좋아서 한 다라이 해가시면 금방 동이날 정도였었지요.
빈대떡에 사방을 반듯하게 자르고난 꼬투리를
연신 집어먹던 기억도 새롭고요.
하지만 제일 맛났던 것은 제사나 차례에 사용할 것이라고
못먹게 하면, 따끈하게 갓 구워낸 파삭한 느낌의 녹두전을
손이 데일세라 이손 저손에 연방 바꿔가며
냅다 갖고 튀던 녹두빈대떡 맛이 최고였네요?!?!
다들 저마다의 추억이 담긴 부침개가 있네요.
손 데일세라 이손 저손 바꿔가며 먹는 따끈한 전이 최고로 맛있죠.
울엄마 빈대떡 생각이 간절합니다. ㅠㅠ
하아~
마침 배고픈 시간인데
전 이야기라니!!!
입에 군침이 화악 돌고
뱃속은 요동을 치네그려. ㅋㅋ
글 참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며느리가 없는 고로
명절 때 며느리 배려할 처지는 커녕
거의 모든 음식을 홀로 해야할 헹펜인데.....
그거시 참~
일 서툰 옆지기는 파를 다듬고 양파껍질 벗겨주는 정도이고
두 딸과 사위, 손주들은 명절 하루 지난 날 오후에
피용~ 하고 나타나는데
명절을 우선 시댁에서 잘 보낸 후에
친정에는 쉬러 오는 기분으로 오는 딸들 가족에게
뭔 일을 시키겠습네까? ㅎㅎㅎㅎ
'전' 이야기에 쓰셨듯이
오랫만에 만난 자매와 동서들 간에
이야기 나누고 회포를 풀 시간도 부족한 터인지라,
씽크대 앞에서 나비처럼 벌처럼 팔랑거리며 분주한 사람은
바로 엄마요, 장모인 저 하나로 족하지요. ㅋ
딸들이 나와서 눈치보며 일 거들려고 해도
이미 다 준비된 것 데우고 늘어놓는 정도이니 궂이 그럴 필요도 없구요.
딸들이 명절 끝에 친정집 떠나면서 늘 하는 말이 하나 있지요.
"에구~ 며느리도 없는 불쌍한 우리엄마!"
그런데 머 '불쌍'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씁쓸한 마음은 들 때가 있어요.
울집 사위들은 장모를 결코 딸들이 시엄니 어려워하는 것 만큼
어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좋게 말하면 살갑게 대하는 것이고
어찌 생각하면 장모에게 위엄이 없는 것이겠지요 ㅎㅎ
그렇거나 말거나, 그점을 전혀 상관하지는 않아요.
나는 그저 즈그들끼리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기만 하면.....,
그게 최고이고 가장 바라는 바이니까요.
글구 애들이 가기 전에 슬며시 문갑 위에 두고 가는 하얀 봉투를 만질 때
그 뭐시냐 (?) 낚시 할 때 비스므리한 손맛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요,
이 손맛의 미묘함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아주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한바퀴 원을 그리지요.
앗참
울집에서는 전은 조금 부치고 튀김을 많이 해요.
울 옆지기 좋아하는 음식 1순위가 새우튀김 그다음에 고구마 튀김, 오징어 튀김, 단호박 야채튀김 ....... 이렇거든요.
시집 온 후 계속 명절 때 마다 기름가마(?) 옆을지키며 수십년을 살았지요.
요즘은 양이 예전의 5분의 1만큼만 하니까 힘들 것도 없구요. ㅎ
이 글은 <선수필> 2017 가을호에 발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