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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다녀 왔다.

미친듯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비가 때도 없이 오고 바람이 많은 곳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은 거의 태풍 수준이어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덕에 해안도로에서, 숙소에서 파도 치는 바다를 실감나게 볼 수 있었으니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3년 전에 좋지 않은 병으로 투병을 한 가까운 선생님과 함께 한 여행이었다.

몸은 많이 축났지만 잘 회복되었고, 늘 그렇듯이 우리는 그 선생님 집에 항상 모여

같이 먹고, 얘기하고, 웃으며 지낸다.

언제나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고, 푸근하게 잘 웃고, 늘 뭘 좀 먹일까 이런 생각으로 사는 분이라 -그 집에 가면 따뜻하게 밥을 먹겠지- 하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종종거리며 그 집을 들락거린다.  


이번 정기 검진에서 다른 곳에서 좋지 않은 것이 발견됐고,

3월 말에 다시 수술 날짜를 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3년 전 그 선생님의 투병을 함께하면서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걸 잘 알고 있다.


병원에 다녀 온 날 그 선생님 아들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여행이나 다녀 옵시다!

선생님은 어이가 없는 듯이 한참 날 바라보더니

에이 씨 그러자! 했다.

그날 비행기표를 끊고, 렌트카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그리고 곧장 떠났다.


첫날은 너무나 바람이 세서 차 안에서도 윙윙 소리가 났다.

제주 바람 대단하다.

무조건 좋은 걸로 잘 먹고, 천천히 다니면서 여기 저기 구경을 했다.


말이 나오면 하고, 말이 안 나오면 안 하면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좋은 횟집에서 회도 잔뜩 먹고, 보말국수도 먹고, 갈치 정식도 먹고,

해녀의 집에서 갓 잡아 온 전복, 해삼, 돌멍게도 먹고, 진한 전복죽도 먹고.

소주는 한라산이나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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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귤 농장을 하는 친구가 있다.

3년 전에 자리를 잡았는데 제주도에 가면서도 농장에 가 보지를 못했다.

이번에 가서 35년 만에 남편도 만나고, 농장도 돌아 보면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

친구 남편도 오래 되니 친구와 똑같다.

늙어가는 친구를 만나는 일이 주는 이 편안함이라니....

헌출했던 사람이 키도 줄고, 일하느라 허리도 좀 휘고, 노동에 익숙한 손매듭이며.

잘 손질된 농장을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니 친구 남편이 허리가 휠만도 했겠다 싶었다.

허리 통증 치료받으러 서울을 오가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일 중독자라고 친구는 시간만 있으면 눈을 째린다.

남편도 마누라 안 볼 때 일하느라 그 고생이 제일 심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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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네 동네에 있는 그야말로 제주도 흑돼지 집엘 갔다.

이 친구는 서울에 올 때 선생님을 본 적이 있고,

또 선생님도 겨울이면 이 친구네 농장 귤을 사시기 때문에 서로 잘 안다.


정말 맛있다! 제주 흑돼지.

고기를 구워서 갈치 액젓에 찍어먹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모두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부터 웃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에 서로

막 웃게 되었다.

마치 무슨 마술에 걸린 것처럼 누가 한 마디만 해도 웃고, 서로 웃는 거 보면서 웃고,

통통 튀는 농담에 맞장구에 깔깔거리며.

너무나 즐거웠다.

그 선생님은 원래 농담을 잘 하고 탁탁 웃기는 얘기를 잘 하시는데

그날 저녁 선생님의 그 사이사이 치고 들어가는 농담은 정말 일품이었다.

나는 너무 깔깔 웃다가 더워서 옷도 다 벗고 반팔만 입고 있었다.


일에 지쳐 늙어가던 그 친구 부부도 모처럼 실컷 웃었다고 이게 웬일이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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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만큼 웃었던 것일까?

마치 무슨 은사를 받은 것처럼 정말 순수하고 즐겁게 웃었다.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듯했다.


선생님도 그날 너무 즐겁게 웃어서 속이 다 뻥 뚫렸다고 하셨다.

5월에 고사리 뜯으러 다시 오세요 하는 친구 말에

그래야겠어요 하시며.


그리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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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다 가고 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무슨 일에 화들짝 놀라는 나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놀라게 된다.


우리 친구들과 다시 처음 만났던 쉰 살 즈음엔 우리에게도 젊음의 끝자락이

조금 남아 있었다.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서슴없이 흔들리던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 모습을 잘 기억한다.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지금 우리는 몸짓이 좀 둔해졌지만, 맷집이 좀 더 늘었고, 사는 건 견디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견뎌내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하는 생각도 그렇고.


고사리를 캘 수 있는 5월 여행을 꿈꾼다.

5월이 가능하지 않다면, 8월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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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제주 막걸리 진짜 맛있다.

제주에 가면 꼭 마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