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CC 사진과 컴퓨터 클럽 ㅣ 포토 갤러리 - 게시판담당 : 김영희
조간을 펼치니 어, 강력하게 끌리는 사진이 실렸다.
신안군 하태도에서 전민조 님이 1972에 찍은 <섬 어린이>라는 사진이다.
저 어린 두다리를 바닷물에 담그고, 무슨 심부름을 하는 걸까?
선배에게 배운 것은 (평생 사진 찍는 일,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사진을 찍는 게 평생 해도 될 일이라고 일깨워준 선배가 있다. 선배가 없었더라면 취미로 사진 찍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됐을 것 같다. 그분은 바로 전민조 선배다. 선배와 10년 남짓 사진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진가를 안 것은 회사에 들어온 지 5년쯤 지났을 때였다. 선배는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를 롤모델 삼아 따라 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진적인 발전은 물론이고 ‘흉내 내기’도 힘들었다. 그때부터 전 선배가 ‘장인(匠人)’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장인 하면 떠오르는 ‘열정’ ‘고집’ 그리고 ‘인간미’가 있었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에 자부심을 갖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선배는 마치 큰 도서관 같았다. 부족함을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채웠다.
사진 찍기란 ‘인생 마라톤’과 비슷한데 고작 5년을 했다고 뭘 기대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때 마침 평생을 부산 자갈치시장 상인을 찍은 최민식 선생이 쓴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란 책을 보게 됐는데 선생은 사진을 ‘사상의 감정적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도 내가 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한 계기가 됐다. 사진은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하지만 사진가의 생각이 무엇을 어떻게 찍는가를 결정하기에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내가 찍은 사진에 대해 최소 몇십 분은 얘기하려면 갈 길이 멀었다.
올챙이 기자 시절 전 선배로부터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적인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는 해낼 수 있었다”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유진 스미스의 말을 많이 들었다. ‘엄청난 노력을 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사진도 인생처럼 ‘도전’과 ‘극복’을 반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 선배의 미소와 닮은 사진을 소개한다. 이 사진도 역시 ‘도전’과 ‘극복’의 산물이다. 좋은 장면을 찾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섬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비 오기 전 해변에 말려놨던 땔감을 황급히 옮기는 게 소녀들은 즐거웠는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1972년 전남 신안군 하태도에서 찍은 이 사진이 몇 년 전 전시됐을 때 한 중년 여성이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이종승 전문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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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70217/82908940/1#csidx44c8a036c99825d9486b8481f09188a
<섬어린이> <나무처럼> 두장의 사진 중 나는
<섬어린이> 사진 액자를 방에 걸고 싶다 .
엄마가 시키면 어떤 일이라도 즐겁게 하던 그 시절,
엄마에게 들을 칭찬에 온세상을 얻을 것처럼 들뜨던.... 그 시절, 내가 나로써 incubate 되던 시절을 회상하게 해주는 사진이다.
다양한 정보 물어오기 대장 유순애 교수!
좋은 사진, 좋은 글 고마워.
링크 걸어놓은 것까지 다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
http://www.loeyeol.com/siteagent/news.donga.com/Series/70070000001044 그간 실린 이 시리즈 물을 살펴보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올해 1월부터 시작된 시리즈네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인물 사진이란 ‘사진가와 피사체가 서로 좋아하는 사진’이다. 세상에 알려진 인물 사진 중에 몇 장이나 사진가와 피사체가 서로 좋다고 생각했을지 의문이다. 널리 알려진 윈스턴 처칠의 화난 듯한 인물 사진은 평론가들로부터 처칠의 특징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처칠은 그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처칠에게서 파이프를 빼앗고 촬영한 탓에 사진에는 처칠의 불만이 가득 묻어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해도 사진가와 피사체가 서로 ‘이 모습이 나를, 당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라는 사진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피사체가 좋아하는 사진, 사진가가 좋아하는 사진은 많을 수 있고 그 사진이 사진가와 피사체의 의중과 달리 잘 찍은 사진으로 알려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사진가와 피사체가 만족할 수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좋은 카메라만 있다면 서로가 만족할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마음’이라는 말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15년 전 겨울 필자는 필자보다 40세 많은 친구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걸 지켜보며 그가 살았던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의 잘생긴 금강송 아래에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앞으로 나무를 찍어 봐라.” “저는 사람을 찍을 겁니다.” “사람은 항상 똑같지가 않아. 나무보다 못해….” “그래도 사람을 찍을 겁니다. 사람에게만 있는 맑음을 찍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농부 철학자 고 전우익 선생이다. 선생은 그런 나를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열심히 찍어 봐라”고 격려해 줬다. 나는 사람 찍기가 힘들 때 이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저세상에 가 선생을 다시 만날 때 ‘열심히 찍었습니다. 사람도 찍을 만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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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oeyeol.com/siteagent/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1044/3/70070000001044/20170106/82204725/1#csidxa14277364b27eac9eb722430aba08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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