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

 

점자책은 쌓아 놓지 말고 세워서 꽂아놓아라,” 松庵할아버지께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시면서 하신 유언의 말씀을 되뇌이면서 시각장애인들은 경각에 달린 순간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진정한 애맹정신이라고들 한다. 인천시 강화읍 교동면 상용리에서 1888426일에 9남매 맏이로 태어나셔서 일제와 육이오를 겪으시고, 1963825일에 서거하셨으니 송암은 참 어려운 시절을 살으시며 빛을 발하셨다고 여겨진다. 얼마나 암울하고 힘든 세월이었을까? 할아버지는 강화도 보창학교와 한성사범(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편입됨)에서 수학하시고, 졸업 후 1905년에 어의동보통학교 교사, 191326세에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발령을 받으셨다. 청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성제 이동휘께서 망명에 동행을 권유하셨으나, ‘대결은 행동이지만 도전은 실력배양에 있습니다. 저는 남아서 후진양성에 힘쓰겠습니다,’ 하고 의연히 소신을 밝히셨다 한다.

 

 

전국에서 시각장애 학생들을 모아서 입학시키고 가르치시는 일은 당시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어 말살정책을 펴는 일제에 맞서, 어찌 앞못보는 장애자들에게 다시 일어를 배우고 일본글을 익히라 하느냐며, 맹학생들이 한국어를 쓰고 한글을 익히도록 탄원하여 허락을 받았으니,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처럼 전국에서 모국어가 사라지고 있던 그 서슬퍼런 시절에 장애자 학교에서는 한국말과 글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송암은 1920년 수제자 몇 명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만들고, 드디어 1926111일에 훈맹정음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참고: 송암의 한글점자는 19971217일 국가의 시작장애인 문자로 정부가 고시함). 피지배국민은 인권조차 없는 암담한 현실일진대, 송암의 의연함은 위대한 철인이요, 훌륭한 신앙인이며, 위대한 교육자이고 애국자이셨다고 숭모하게 된다 (송암 선양사업 일환인 묘지이장과 생가복원이 인천시 조례를 통과하였다).

 

 

어머니 박정희님은 송암 할아버지의 장녀로 살으셨다. 1923425일 출생하시고, 2014123일 소천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제생원 교사들의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지만, 성장기에는 송암이 영화학교 교장 시절 기거하시던 인천시 율목동 25번지에서 사셨다. 송암께서 전국의 시각장애인들 누구나 쉽게 찾아오라고, 당시 일제시대임에도 대문에 크게 태극을 그려놓은 한옥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경성사범 심상과 시절, 일본학생 한국학생 중 단연 수석이니, 화장실에서 불을 켜놓고 공부한다는 비아냥도 받으셨다는데, 졸업 후엔 인천송림학교 교사를 하시다가 평양으로 시집을 가셨다. 시부님 유듀환목사님(독립유공자)은 독립운동한다고 늘 수감되고 매맞고 사시는 형편이니, 평의전 출신의 젊은 지바고 서방님의 월급은 타오는 즉시 빚 갚기에도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식구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여인네들의 기지에 의한 것이었다. 들에서 나물을 캐고 중국인들의 농장에 가서 감자를 사다가 열 무더기로 나누어 하나는 우리 식구가 먹고, 아홉 무더기를 팔아 사온 값을 충당하는 지극히 양심적인 좌판을 벌였다.

 

 

경성사범 졸업 시에도 국어_무용_미술 특기상을 타셨던 어머니는 평양의 대동강 능라도 을밀대 등 너무 아름다운 산하를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달력을 손수그림으로 만드시곤 했는데, 한 달이 끝나기도 전에 평양철도병원 간호사들 사이에 달력그림 쟁탈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한명씩 출산할 때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여, 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 그 환경을 낱낱이 그림과 글로 기록하셨다. 책의 제목은 <명애>, <현애>, <인애>,<순애> 등이었고, 책에는 목차에서 무슨 콘텐츠를 담고 있는지 열거하고 (: 너를 낳을 때의 세계정세, 너를 낳을 때의 가족들,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애기 때의 음식, , 장난감 등등) 각각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니, 일제와 625전쟁을 치르는 민초들의 삶이 그대로 서술되었다 (현재 국립여성사박물관에 상설전시 중).

 

 

이 책은 후에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라고 하여 KBS 일요스페셜(19991217일자) 방영 후 수 회 책으로 출간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절망은 없었다. 허락된 형편에서 아주 열심히들 기쁘게, 좌절하지 않고 사셨던 모습이다. 1947년 이미 사회 전체가 빨갛게 변한 북녘고향을 뒤로 하고, 온 가족이 어머니 친정이 있는 인천을 향해 걸어서 남하하였다. 핵가족 끼리끼리 남하하는 길은 다시 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염려되었겠으나, 목사님 할아버지 부부와 여섯 아드님 가족이 모두 무사히 율목동 25번지에서 차례로 해후하였다. 우리 가족의 엑소더스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은 놀라운 은총을 이때 체험하였다.

 

 

인천은 피난민인 우리 가족을 따듯하게 품어 주었다. 피난민의 아이들은 교수와 의사, 화가, 대학총장, 장관 등 견실한 대한민국 시민으로 자랐다. 지금은 아버지 여섯형제의 자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지만, 모두들 율목동 25번지를 <우리 할아버지집>으로 부른다. 이곳에 우리 유씨 모두의 원적이 있다. 나는 율목동 25번지에서 나서 아버지께서 병원을 신축하신 화평동에서 자랐다. 화평동과 화수동 화도감리교회는 우리 가족의 고향이다. 손금처럼 지리도 훤하고, 윤회네 옆집 살던 누구말이야... 하면 다 알아 듣는다. 어머니는 60년간 화평동을 넘어 동구까지 아니 인천의 아이들 누구라도 그림(수채화) 지도를 하셨고, 몇몇 사모님들이 힘을 모아 청년 윤학원 선생님이 어린이합창단을 지휘하도록 후원하셨으며, 동네 아주머니들 옷을 만들어 주시고, 한 부모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시고 교육도 하셨다. 교회유치원 원장 30,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를 60년간 하시면서 (나도 아마 12년쯤), 수많은 사랑의 씨 문화의 씨를 인천에 뿌리셨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교회의 절기는 우리 집 잔치같았다. 무대장치를 하고 연극과 합창과 율동 등 학예회를 주관하셨고, 선물을 나누어 주셨는데, 나중에 아버지께서는 교회를 지금의 멋진 새 건물로 짓는 일을 맡으셨다. 조용한 아버지 성품으론 놀라운 일이었다. 아버지 병원의 1번 단골환자는 길영희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어머니의 처녀시절을 불란서인형이었다고 회상하시면서, 인중제고 교가 가사를 붓글씨로 써서 병원 벽에 붙여주시기도 하셨다.

 

 

조부모님, 부모님들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셨다는 존경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송암할아버지께서 창안하신 한글점자, 식민지와 전쟁의 와중에서 출산과 양육, 또 가족의 먹고 입는 모든 것을 맡아야 했던 젊은 어머니의 육아일기 등 너무도 대단한 이노베이션이다. 어찌보면 절망 그 자체인 상황 속에서 항상 지혜롭게 우주의 섭리를 간구하는 겸허한 삶이었다. 나도 긴 호흡으로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이상)

 

 

 

글쓴 이: 유순애 (e-mail: say1000@pcu.ac.kr)

인천향우회 부회장, 인일여고 7

배재대학교 생물의약학과 교수, 건강 컨설턴트.

(https://biomedical.pcu.ac.kr/?VP=content&DB=professor_01&PageID=81_302)

이노비즈 함초코리아 다사랑 함초연구소장 (www.hamchokorea.com)

실험실벤쳐 藻類환경자원연구소(www.care.re.kr)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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