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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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였다.
혼자 운전하고 가면서 라디오를 듣다가 깜작 놀랐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을 100으로 볼 때
자식이 부모에게로 향하는 마음은 0.7에 불과하단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이렇게 두 마음이 차이가 날 줄 몰랐다.
믿고 싶지 않은 수치였다.
1984년에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의 유학길에 두 아들을 데리고 따라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미국이 천국이라도 되는 줄 알고 동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미국에 가면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근사한 파티를 하며 사는 줄 알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를 타고, 아들 가진 부모는 버스나 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에서 국비장학금 780불을 가지고 한 달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다달이 내는 집세가 500불이 넘었다.
수도세, 전기세, 자동차 보험료 등을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생활비를 보태줄 사람도 없으니 먹고 살려면 내가 나가서 일해야 했다,
하지만 아직 기저귀도 못 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는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친정엄마를 미국으로 오시게 했다.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을 집에 두고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 오셨다.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나는 미국 돈을 벌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는 유학생 가족 신분이어서
현금으로 일당을 받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중국집 접시닦이, 주방 보조, 야채가게 캐셔, 모텔 청소, 빈집 청소 등
가리지 않고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막일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나는 거침없이 해냈다.
미국에서 영어 못하고 운전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다.
내가 밤낮없이 일하러 다니는 동안 영어 한마디 못하는 엄마는 꼼짝없이 갇혀 지내셨다.
그런데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귀한 바나나며 갈비 등을 흔하게 먹는 것만으로도 호강하는 거라고 하셨다.
당신이 아이들을 돌보며 살림하는 것은 집에서 노는 거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다니는 것만 대단한 고생인 줄 아셨다.
덕분에 나는 막일을 하러 다니면서도 늘 당당했다.
엄마는 괜히 미안해 하셨다.
2011년엔 작은 아들이 미국 유학을 떠났다.
직장에 다니다가 곧바로 공부를 시작하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게다가 로스쿨은 첫 학기가 매우 중요했다.
낯 선 땅에서 시행착오 없이 순조롭게 정착하려면
나의 미국 생활 경험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나는 빈혈이 너무 심해서 비행기를 타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도 철분주사 다섯 병을 연거푸 맞고 아들의 유학길에 따라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학교에서 가까운 아파트를 싸게 구했다.
자동차도 적당한 것으로 잘 샀다.
아들은 예상보다 훨씬 씩씩하게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굳이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모든 일을 스스로 척척 해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냉장고 속에 반찬을 채워 넣는 정도였다.
아들이 볼일 보러 나가서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내 마음이 자꾸 쪼그라들었다.
몸도 부실한 내가 괜히 따라 와서 도움은커녕 외려 짐이 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자꾸 우울해졌다.
아들이 제 일을 잘 찾아 하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알 수 없는 소외감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아들도 없는 낯 선 집에서 혼자 청소하다가 문득 낯익은 여인을 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
영락없는 친정엄마였다.
거울 속엔 내가 아닌 30년 전의 엄마가 서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넘어왔다.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당시 친정엄마는 남편과 사별한 지 1년도 채 안 된 쉰아홉 살 여인이었다.
엄마도 같은 여자라는 사실을 나는 여태껏 헤아리지 못했다.
나이가 주는 외로움과 서글픔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저 자식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지는 존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그 나이 되어 겪어보니 그게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갚을 길이 없다.
엄마는 이미 아버지 곁으로 가시고 안계시니 말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글도 이렇게 잘 쓸까........
춘선이가 미국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머리숱이 많이 빠졌잖아요.
같이 갔던 찜질방에서 울음이 터질 뻔 했어요.
그 울고 싶은 증세가 아주 오래 갔다니까요.
하지만 그 고생으로 그 식구들 대복을 누리잖아요.
막내 아들까지.
에구~!
장혀~~~~!
내동네에서두 자리 잡으려면
얼마나 힘들게 뺑뺑이를 쳐야하는데....
산설고 물설은 머나먼 남의 나라에서
자리 잡느라고 얼마나 용을 썼을꼬.
어린것들 데리고,
엄마는 보이는것이 없지
내자식을 위해서라면...
그래도 잘 이겨내 오늘날 옛얘기 하며 지내잖니
이제 건강 생각하며 서방님과 예쁜손자,손녀
자라는것 보며 행복하게 지내기를~!
?
엄마는 자식을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데
자식은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하지 못해요.
자식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죠.
이를테면,
내가 낳은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내 엄마의 시간과 수고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자식의 심리에요.
뼈아프게 미안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뻔뻔함이 있더라고요.
부모에게서는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자식에게는 주는 것이 당연한 모순된 심리가 있어요.
본능적으로 삶의 시선을 온통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로만 향하고 집중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야만 종족이 보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럻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요.
자식의 눈에 부모는 그냥 부모일 뿐이에요.
효도라고 하는 것도 그저 자기 관점에서 부모를 바라보는 것에 불과해요.
그 나이가 되어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죽어도 깨우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말이지요.
환갑, 진갑이 지나고 자식들이 다 독립해서 나간 후에
품안의 자식이 아니어서 서운해하는 사람들도
자기 부모에게는 여전히 자식 노릇을 하고 싶어한단 말이지요.
부모가 걸어간 길을 따라 가면서
그 나이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부모를 이해하고 가슴을 쥐어뜯지요.
너무 늦었다고 한탄을 하면서 말입니다.
참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누누이 일러줘도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죽어도 깨우치지 못하니까요.
저는 이제야 비로소 엄마의 관점에서 엄마를 보게 되는것 같아요.
에효 ...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암튼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
내일 아침에 보면 후회할지도 모르겠어요.
?춘선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주르르 흐르네.
장한 엄마 춘선이~
난 지난번에 엄마가 입으셨던 11년전 한복을 입고 남동생 아들 결혼식에 갔는데~
내가 살이 많이 쪄서 내 한복이 도무지 안맞아서 ~ 암튼 어쩜 칫수가 엄마랑 똑같아 졌는지 ~ 신기할 정도였어.
그날은 하루 종일 저절로 엄마 생각이 났어.
근데 ~ 평소에 거의 잊고 살았던 엄마~ 이런 글을 읽음 그때서야 생각나는 엄마.
내리 사랑인걸 알지만 자식은 그 십분의 일도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모든 엄마는 주지 못해 안달이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아마 그 말은 부모된 입장에 선 사람들이 한 말일거다.
우리 자식들의 잘못은 단 하나...
당신들을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영원히, 아니 아주 오래
우리곁에 있어 줄거라는 어리석은 착각....이라면서
'디어 마이 후렌즈' 중에서 고현정이 독백하는 장면을 열심으로 베꼈지요.
토론토 아파트에 홀로 사시는 친정엄니가
자주 찾아뵙지 못해도 엄마는 늘 그곳에 영원히,
돌아가시지 않고 계셔야만 된다는 착각의 믿음 속에서 산답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나는 오늘 넘 우울합니다.
솔직히~
넘 슬퍼요.
오늘 아침에
정혜숙 소천 소식 듣고~
또~ 친한 친구가 머리와 심장에 이상이 있어 수술하고자 입원했다는 소식 듣고~
글구
춘선이의 '내리사랑' 읽으니
웬지 그냥 눈물이 나네요.
전에 저의 시모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시모님께서 칠순을 좀 넘긴 그 즈음에
형제 간에 모여서 앞으로의 집안일들을 의논하며
몇 가지 계획을 말씀드렸더니,
시모님 말씀이,
"언제? 나 죽은 다음에????"
그때 언성이 좀 높으셔서 다들 당황해 했었지요.
그 계획은 결국은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야 겨우 실행이 되었지요.
?예전에 엄마는 자식들을 편애한다고 투덜대면 하시는 말씀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더냐?" 전 이렇게 퉁명하게 대꾸를... "많이 깨물면 더 아프고... 살짝 깨물면 덜 아프잖아..." ??? 그렇게 말해놓고는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멋져뿌러...ㅎㅎ
열 손꾸락 깨물어 봐봐!
.
.
.
새끼 손꾸락이 젤 아프다.
난 진짜루 깨물어 봤어.
두꺼운 엄지 손꾸락은 별 감각두 읎두먼.
근데 가운데 손꾸락을 깨물어 보려니
손꾸락이 길어 내목을 치받으며 들어가더군
가운뎃 손꾸락이 젤 쎈거 가텨.
내가 순서루 하믄 셋째거든.
울 엄니한텐 내가 젤 힘들었을꺼여.
하두 치받고 뻗대서리....!
그 손꾸락을 쏘파에 세워 아부지 앉으실때 찔러 대는 딸이 나여.
새끼 손꾸락은 입에 넣기 조차 에리두먼...
이러니 엄니 맘은 어떠시것어. ㅉㅉ
막냉이는 나보다 엄니 사랑을 10년이나 덜 받았응게.
고걸루 퉁쳐야쥐.
이거이 철들자 망녕나는거 아닌지 모르것네. ㅎㅎㅎ
?
대개 손가락을 깨물어 볼 때는
손 끝을 물어 보지 않나요?
손가락이 목구멍을 찌르도록 깊이 넣고 깨물어 보시다니....
우리 대장님은 스케일이 남다르시네요. 역시 ~
?ㅎㅎㅎ역쉬~ ~ 울 엄마가 막내이신데, 가끔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 어렸을 때, 수염 하얀 아버지가 늘 나한테 불쌍한 막내..." 하셨데요. 그 말이 이젠 이해가 된다고요. 막내여동생을 40이 다 되셔서 낳고보니 막내를 키우면서 그 측은지심이 이해된다고... 자식의 효도가 부모의 내리사랑에 따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윗 형제들이 보기에 다 같은 동생이라도 막내동생은
더욱 애뜻하지요.
딸 셋이 낳은 외손주 넷의 해산 구완을 친정 어머니가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 여동생이 둘째를 낳았어요.
돌봐줄 친정 어머니 없이 아이를 낳은 여동생이 측은해서
언니 둘, 올케 둘이 유난스럽게 법석을 떨었지요.
이미 제 자식들을 하나 둘씩 낳아 기르고 있으니
신기할 것도 법석을 떨 것도 없는데
여자 넷이 들러붙어 유난법석을 떨었던데에는
친정엄마 안계신 자리를 가려주려했던 마음에서 그랬을겁니다.
형들의 아우사랑도 내리사랑 아닌가싶습니다.
아버지 마흔아홉에 난 막내딸인 저는
엄마가 내나이 스므살부터 혼수준비를 해서
모다 구닥다리된 그릇이랑 혼수품을 들고 시집왔지요
당신들 살아실적에 시집보낼 수 있으려나 노심초사
그닥 효자가 못되었던 장남에게 저를 맡기는 것이
영 못믿어우셨던 거죠.
춘선 선배님 글에 저 또한 돌아가신 엄마생각에 울컥 했습니다.
목회한다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거든요.
모든걸 내어주고 빈 껍데기만 남아 너무도 앙상한 모습으로
이별을 고했던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희재작가님의 따끈한 글을 우리가 먼저 읽게됨이 영광입니다
?
이 글은 <계간 수필 가을호>에 나올 거에요.
어제 출판사로 원고 보냈어요.
책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여기에 미리 올려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