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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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 34번가에 있는 팬스테이션에서
9시 11분에 출발하는 도버행 기차를 타고 뉴저지 메디슨으로 향했다.
우연히 연락이 닿은 옛 제자 K가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가는 길이다.
뉴저지 트랜짓은 이층으로 된 쾌적한 기차였다.
링컨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림보다 더 멋진 갈대숲이 보인다.
이번엔 그저 뉴욕에서 직장을 잡은 아들이 어찌 지내는지 살펴보려고 온 길이었는데,
K 덕분에 기차여행을 하며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나지막하고 한적한 마을을 따라 기차가 달린다.
1시간이 지나자 드루 대학의 도시인 메디슨에 도착했다.
메디슨역에는 K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유서 깊은 그린빌리지 감리교회로 갔다.
1840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드루 신학교 학생이던 아펜젤러 목사가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며 목회했던 곳이다.
어둠에 묻혀 있던 우리나라에 복음의 빛을 전해 준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계셨던 곳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교회는 그리 크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성전은 미국 법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아담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였다.
근 200여 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 낸 역사적인 장소에 이렇게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태평양을 건너 멀고 험한 길을 헤치고 찾아 와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님 덕분에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신학자인 K는 그 교회 목사관에 세 들어서 살고 있었다.
덕분에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자취가 밴 목사관까지 샅샅이 다 구경할 수 있었다.
목사관은 소박하면서도 정갈하고 탄탄하게 지은 전형적인 미국 집이었다.
우리는 단풍이 곱게 든 숲으로 둘러싸인 뒤뜰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다.
집주인이 아직 박사 학위를 다 끝내지 못한 상태라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정원에 마련된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가득했다.
K가 손수 불을 피우고 고기도 직접 구웠다.
금방 구워진 따끈한 고기를 연신 내 접시에 먼저 놓아주며 극진히 접대했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다 하나님 덕분이다.
너무 감사하고 뿌듯하여 마음이 그득하다.
K는 30여 년 전에 내가 부평에 있는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할 때 담임했던 학생이다.
당시 나는 교회 바로 앞에 있는 목사님 사택 이층에서 살았다.
아직 교회를 신축하기 전이라 장소가 부족하여 주일이면 우리 집을 분반공부 교실로 쓰곤 했다.
평일에도 우리 집엔 오가다 들러서 놀다가 밥 먹고 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그 교회에 몸담은 것은 고작 1년 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교회 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만든 연극은 여러 편이었다.
나는 교회 연극에 미쳐 있었다.
대본 쓰는 일부터 무대감독, 연출까지 다 내 몫이었다.
성경을 토대로 한 연극은 만드는 과정이 길고 힘들었지만 다들 열심이었다.
학생들의 공연에 온 교회가 함께 울고 웃으며 환호했다.
연극은 신앙고백이 되었다.
K는 특히 나를 잘 따랐다.
그는 매우 영특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연극을 만들 때마다 조연출 역할을 톡톡히 해내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게다가 또래들에 비해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었다.
보통 아이들이 생각지 못하는 질문도 참 많이 하곤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적절한 대답을 해 주려고 애썼다.
당시 내 나이는 겨우 서른 살 조금 넘었다.
K는 고등학교 1학년,
겉보기엔 반듯한 모범생이었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어린 내가 무얼 안다고 그렇게 확신에 차서 상담해 주곤 했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 내 힘이 아니었을 것이다.
교사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고자 노력하는 나를 어여삐 여기사,
성령께서 매 순간 도와주신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조숙했던 저는 진지하게 대화할 상대가 없었어요.
제 대화 상대가 된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제게 해 주셨던 말씀을 지금도 다 기억해요.
선생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
자연스레 속에 있는 말을 술술 다 하게 만드시거든요.”
헤어지기 전에 K가 내게 한 말이다.
이 말에 나는 또 도전을 받는다.
앞으로 다시 30년이 지난 후에도 옛 제자의 대화 상대가 되도록
꾸준히 연마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겠다.
김 희재 권사 (편집위원)
춘선아~~~
감명 깊은 글 잘 읽었어.
30년전의 고등학교 학생이 지금은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구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만든다.
오늘 하루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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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고등학생이 이번에 만나 보니 45살이라네요.
정확히 28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에요.
늘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영특한 학생이었는데
한국에서 목사 안수 받고 목회 하느라 공부가 늦었나 봐요.
이제 논문 마무리 짓고 교수가 되려고 알아보고 있더군요.
따지고 보니 저랑 15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그 때 아주 왕어른 노릇을 했었는데
요즘 같으면 연상연하 커플도 될 수 있는 나이였어요.
왜 그렇게 어른 행세를 하며 지레 늙었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이 오히려 젊어요. 제가 ~
참 웃기죠? ㅎ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조선으로 떠나시기 전에 목회하시던 교회라니
정말 감회가 깊었겠네.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물설고 낯 선 이국 땅
인천에 상륙한 후 공식적인 첫 예배를 드린 곳이
인천 내리의 어느 가정 집이었다는데
그 예배가 씨앗이 되어
인천에 내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해요.
바로 그 아펜젤러 목사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30년 전의 옛제자를 만났다니
얼마나 감회가 깊었을까?
그 제자가 질풍노도 같던 사춘기 시절,
자신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주신 선생님을 만나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
선생님과 제자의 아름다운 해후가
앞으로도 따뜻하게 계속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전부터 내가 갖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제목하나를 고백하자면
나의 손주녀석이 교회나 학교나 학원, 또는 사회 어디에서든
(희재권사님 같은 )좋은 친구나 선생님, 선배들을 만나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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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12월 13일자
대전 천성 감리교회 주보에 실린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