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의 <토지>에는 알다시피 여러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이미 월선이에게 마음을 준 용이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 악을 쓰며 포악을 부리는 강청댁과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고 질긴 임이네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인데.

 

강청댁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새벽에 호박을 따러 간 강청댁이 누가 따갔는지 없어진 것을 보게 된다.

가뜩이나 이런 저런 일로 심통이 있는대로 난 강청댁이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욕설과 함께  내뱉는데.

 

이런 짓 할 사람 한 사람 뿐이다! 내 이놈의 손, 그냥 손모가지를 뽀사뿌리고 말겠다!

였던가? 그놈의 손 썩어버려라! 였던가?

 

아무튼 그 장면이 나는 재미있었다.

호박 하나 갖고 뭐 이리 목숨을 거나 이런 무심한 생각도 좀 있었다.

그 부분을 읽을 때 나도 임이네가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박경리 선생의 이런 섬세한 표현이 재미있어서 작가들은 참 대단하다 이런 생각도 했다.

 

 

농사(랄 것도 없지만 우쨋든)를 짓기 전에는 그 강청댁의 마음을 정말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봄에 씨를 심은 호박에서 신기하게도 싹잎이 나더니 줄기가 번지더니 연한 초록등처럼

너무나도 예쁜 호박이 꼭 손톱만하게 열렸다.

마치 후광이라도 비치는 듯 그 호박 주위로 연둣빛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누가 볼 세라 사진을 찍어 놓고 호박잎으로 단단히 여미고 왔다.

 어라? 그런데 별 관심도 두지 않았던 다른 곳에서 벌써 한뼘이나 되는 호박이 커 있었다.

신통하기도 하지.....   아직 작으니 한뼘 반 정도 되면 따야겠다 하고 집에 왔다.

 

며칠 뒤에 가 보니 그 호박들이 없어졌다.

우찌나 화가 나던지 그냥 강청댁 생각이 절로 났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남이 길러 놓은 호박을 그렇게 따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강청댁처럼 똑같이 욕을 할 수는 없으나 분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뒤늦게 소설의 그 구절을 이해하다니!

 

호박 하나 2000원이면 산다고 하지만 이게 어떤 호박이냔 말이다.

첫 임신을 한 각시 보듯 얼마나 살뜰히 쳐다 봤는데.....

 

분하다!

어찌나 부아가 나던지 한동안 밭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만 만나면 글쎄 내 호박을 말이지......  아니 세상에.....

그러면 사람들이

아니 내가 따 갖고 간 거 아닌데 왜 나한테 그렇게 화를.....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사실은 나도 몇 년 전에 산소에 갔다가 너무나 예쁘게 달려 있는 주인 없는(주인이 왜 없냐고!) 호박을 따 온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뭐 이런 고해성사도(?) 하고 그랬다.

  

작년에도 할머니가 억울한 얼굴로

세상에 누가 호박을 다 따갔어..... 하실 때도 그 심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미련한 이 중생이 자기가 겪으면서 완전 공감!

 

한동안 가지 않은 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온통 풀로 뒤덮여 있었고,

오이, 방울토마토, 가지들이 다 쓰러져 있고 호박이며 토마토며 여주 같은 것들도 다 엉켜 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추도 정리하고, 오이 넝쿨도 세우고, 방울토마토 가지도 일부 자르고

잇고, 크게 자라 터져버린 가지도 따고 하다가.......

 

앗! 그러다가 그 밑에 크게 자란 호박을 발견했다.

앗! 또 하나 발견했다.

횡재를 한 듯하였다.

입이 귀에 걸리더니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그때 어떤 험상궂은 남자가 나타나더니

그거 왜 따요? 하는 거였다.

난 품 안의 호박을 끌어 안고

이거 내가 기른 건데요

했다.

그 남자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다가 간다.

이상한 남잘세......

 

나중에 길에서 만난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할머니 아들이란다.

할머니가 호박을 누가 따 가서 너무 상심해서 집에서 말씀을 하셨나 보다.

그게 신경이 쓰인 그 아들이 엄마 없을 때  누가 따 가나 하고 와 본 것이었다.

50 넘은 총각이라는데......

ㅎㅎㅎ

 

왜 이렇게 밭에 안 왔어? 어디 놀러 갔었어?

하는 할머니의 물음에

호박이 없어져서 하도 신경질이 나서 밭에 오기도 싫었어요.

 

할머니와 코를 벌름거리며 한참 심정을 나눴다.

 

어쨋든 내가 길러 따 온 애들을 보시라!

이런 게 없어지면 분하지 않겠니?

모르겠다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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