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전편 한 여자 (19) 빛나고 즐거웠던 어느 날 (Un di' felice, eterea)
-70.-
붉은 포도주 빛 채양이 쳐진 호텔 야외 카페 레스토랑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던 클라우스와 오르넬라가 다가가는 제이드와 율리오를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 이렇게 제이드를 보니 저절로 옛날로 돌아가는군.. 하하하!" 클라우스의 말을 듣던 오르넬라도 덧붙여 말한다. "글쎄말이에요.파파. 제이드는 살이 좀 불은 것 같지만 느낌이 여전하네요. 제이드! 이렇게 유지하는데 무슨 비결이 있는 거야?" 제이드보다 몇 살 연하인 오르넬라는 예전에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냈듯이 자연스레 말을 놓는다. " 아니, 없는데.. 살이 찌어서 요즘
신경을 쓰는 중이야." 여자는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수줍어하며
오르넬라에게 역시 말을 놓으며 대답한다. " 제이드가 미술전문가가 되었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예전보다 더 환해졌구만. 살이 오른 것도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이고..
" 클라우스가 말을 하며 여자를 유심히 본다. " 그렇지요.. 모네의 그림 속 여인 같네요. ㅎㅎ 참 세월에 따라 우리들이 이리 변해갔어요. 저는 공연기획일에 묻혀 외모는 신경도 못쓰는데.. 제이드는 미술과 더불어 즐기는 것 같아 보기 좋네요." 부녀가 하는 말을 들으며 여자는 아무 소리를 못 한다. 이 부녀는 여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만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하나, 여자는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났기에 아직도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로렌스옹이 그런 여자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 자, 시장한데 음식을 시키자고.. 그런 후에 얘기를 나누지." 화제를 돌리며 식탁에 놓인 메뉴판을 펼쳐 여자에게 건넨다. 여자는 별로 식욕이 없어 건성 보는데, 로렌스옹이 종업원을 불러 식 전 음료수로 트리에스트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되는 프로세코를 주문한다. "제이드, 점심은 간단하게 샐러드와 마카로니로 할까? 저녁에는 클라우스가 예약해 놓은 생선전문집으로 가서 즐기고.." " 예, 그렇게 하지요.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 지금은 간단히 할게요." " 오케이. 내 그럴 줄 알았지 허허!" 두 사람의 대화하는 모습을 클라우스가 관심 깊게 보다가 입을 연다. " 허! 율리오! 어찌 제이드 맘을 그리 잘 읽나.. 역시 오랜 세월을 두고 익숙해진 사이가 보기 좋구만." " 그렇게 보이나? 허허허! 오늘 아침에도 카타리나가 그러더군.. 우리 둘이가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
같다고 ..허허허!" " 클라우스 선생님, 요즘은 로렌스옹을 자주 못 찾아 뵙고 있어요. 이번에도 한참 만에 뵙는 것이에요." " 허? 그래도 매일 만나는 사람들 분위기이구만.. 허허허!" 정말 그런가? 맞아. 로렌스옹이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온 지가
벌써 몇 년인데.. 클라우스와 제이드는 오르넬라와 로렌스옹이 음식과 음료를 주문하도록 맡기며 느굿이
서로 웃음으로 마주 대한다. 아무 말이 필요 없다. 예전에 두 사람이 즉흥연탄곡으로 피아노 치었던 멘델스죤의 ?무언가’ 처럼... 프로세코병이 세개의 잔으로 준비되어 온다. 아니? 왜 석잔? 제이드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니, " 제이드, 내가 알코홀과 시가를 못 하는 지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오. 그러니 내 신경쓰지 말고 건배들 하고 마시지..." 식사후에 달콤한 향내가 나는 시가를 피우시던 그 멋진
모습을 이제는 볼수가 없다니.. 여자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이자, 로렌스옹이 종업원을 불러 잔을 한 잔 더 가져오라고 한다. " 클라우스 칭칭 만이라도 하자고.. 제이드를 재회하는 기념으로..." " 좋지!' 종업원이 잔을 가져오자 클라우스가
프로세코를 따른다. 크리스탈 같은 수포를 이르며 반짝인다. 삶에 이런 순간이 필요 할 때도 있다듯이.... " 자!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 그가 잔을 들며 선창하자 모두들 건배를 한다. 6월의 한낮이 정스럽게 무르익어간다. "제이드, 우리가 잘츠부르그에서 만났던 때 기억하지?" 오르넬라가 묻는다. " 그럼.. 그때 나는 잘츠부르그에 심취하여 붕 떠 있었는데ㅎㅎ" 여자가 치아를 드러내며 빛나게 웃는다. " 아, 제이드 딸이 이제는 아주 어른이 되었겠는데.." 클라우스가 새삼 상기했다는 듯이 말한다. " 그럼 어찌 잊겠소. 그 똘랑하기가 ... 허허허! 제이드하고는 또 다른 성격이었잖은가
." 그렇지, 딸애는 나하고 다르지. 지금 내가 클라우스와 만나는 줄 알면
놀랄거야 .. 여자가 생각에 잠기며 바닷쪽으로 시선을 준다. 옛날에 파울과 이곳에 왔었을 때는 연주를 목적으로 방문했었기에 여행을 즐길 여유가 없었지만 여기
이 야외 카페 레스토랑에서 길건너 골목 안에 있는 베르디 극장을 보며 식사를 하며 나름대로 즐겼고 저 바다 멀리 보이는 미라마레 궁과 항구에 산책하는 보행자들을 보며 이국의 정취를 누렸었지.. 한참 후 몇년 전 2월 쌀쌀한 일기에 미하엘과 그의 친구들과 더불어 와서는 바로 바다에 접하여 파도를 바로 바라보는 호텔에서 지내면서도 겨울한파에
곳곳을 제대로 못 보고 아쉬움을 가지고 돌아갔었는데.. 그리고는 또 그 같은 해 한여름에 아쉬움을 메꾸려고 다시 왔을 때는 여기 이 호텔에 며칠간 느긋이 머물며 곳곳에 정을 두었었지. 바로 호텔이 여기 자리잡은 '이탈리아 유니온광장'에서 밤마다 열리는
축제에 열광하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고... 여자뿐이 아니라 동석한 모두는 음식이 나오기 전에 나름대로의 상념에 젖어 대화를 멈추었는데, 드디어 음식이 마련되자
일상적인 대화하며 식사를 즐긴다. 바로 얼마 전에도 만났던 사람들처럼... 여자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여자는 서둘러 디스플레이에 뜬 이름을 본다.미하엘이다. 빠르게 로렌옹을 쳐다본다. 받어 봐!' 라는 눈빛을 보고 자리를 떠나서 실내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 왜 이리 늦게 받고 , 또 목소리는 모기소리만해? .... 지금 트리에스트에 왔어요. 식사 중이에요. .... 거긴 왜? .... 나중에 얘기 할게요. .... 내가 오늘 일이 일찍 끝나서 지금 케른튼으로 가려고 하는데, 가도 못 만나겠는데? 직접 트리에스트로 갈까? .... 아니에요. 예정대로 내일 와요. 나 지금 옛날에 존경하던 어른을 아주 오랜만에 만나고 있어요. .... 어른? ... 미안해요. 지금 통화 오래 못 해요. 나중에 다시 해요. ....??? 그럼 제이드가 시간여유 있을 때 해 주지. ... 예, 안녕! " ???" " 식사 중 자리 뜨어서 죄송해요.내일 로렌옹과 만날 약속된 사람이어서요."여자가
담담히
대답하는데, " 제이드는 사람복이 많은가 봐요. 예나 지금이나.ㅎㅎ" 오르넬라가 의미있는
시선을 주며 말한다. "........" 예나 지금이나... 아무 말도 안 하고 여자는
오르넬라의 말을 안으로 되 삭인다. (계속)
-71.-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도 어려서부터 가족관계가 탄탄한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자신감이 저절로 내재 되어 어떤 일에나 당당할 수 있다. 자칫하면 자신과 연관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줄 알고 대하는데...그것이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오르넬라가 좀 전에 여자에 대하여 '예나 지금이나' 라며 표현함에 여자가 잠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18년이란 기나 긴 세월 후에 다시 만난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어찌 '지금’의 여자에 대하여 단정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자는 오르넬라에 대하여 이러고 저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지금은 클라우스하고만 얘기하는데도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이 아닌가.
여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식사하는 모습을 세사람들이 주시한다.
? 제이드, 피곤한가? 아침부터 두 번이나 비행을 하였으니...“ 로렌스 옹이 다정다감하게 묻는다.
? 아니에요. 로렌스 옹께서 피곤하시겠어요...“
? 그래, 나는 올라가서 좀 쉬어야 겠군. 클라우스! 제이드를 그리도 보고 싶어 했었으니 저녁 식사 전까지 데이트하구려. 허허허!“ 제이드와 클라우스에게 두 사람만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의미로 말을 한다.
? 그러잖아도 식사 후 우리 둘이만 오붓이 지내고 싶었는데, 역시 자네는
...허허허!“
? 파파!, 그럼 저도 방에 가서 쉬겠어요. '베르디 오페라 축제' 기획안을 좀 더 수정할 일이 있어서요.“
? 그래. 그럼 그리 하거라.저녁 식사 하러
갈 때 만나잖구나.“
오르넬라와 로렌스옹이 자리를 떠나자 여자와 클라우스는 자리에 좀 더 앉아 있는다. 여자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인가는 꼭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실제로 만나니 그간의 모든 시간들이 어디로 가고 이리도 클라우스가 가까히 다가오는 것인가.
클라우스도 마찬가지로 말을 안 하고 여자를 그윽히 바라본다.
얼마가 지났을까?.. 클라우스의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아! 자네? 기다리고 있었겠구만.. 내 바로 가겠네. 그럼! 여기 그란드호텔 카페이니 , 곧 보세!
통화를 마친 그가 일어선다.
? 제이드, 우리 베르디극장에 같이 가지.. 거기 감독에게 간다고 해 놓고 깜박하고 있었구만. 제이드를 만나니 시간이 동결된 듯하네.“
저도 그래요. 선생님. 여자는 일어나면서 그리 생각한다. 클라우스가 자신의 왼쪽 팔을 둥글게 휘면서 여자의 팔을 끼도록 한다. 언제 우리가 팔짱을 꼈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하라는 데로 팔짱을 낀다.
? 이리 제이드와 가까이 대하게 된 것이 꼭 꿈만 같군..예전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 무슨 연유인고.. 자네를 만나는 내내 그 생각이 나를 잡고 있네..“
? 선생님, 예전에는 제 곁에 항상 파울이 있었고 지금은 저 혼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 그렇기도 하구만...그 사람 파울... 흠...그런데, 제이드 스스로가 그 전보다 활짝 마음을 열어 놓은 듯한 게 더한 이유가 아닐까. 허허허!“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잘츠부르그 산장 호텔에서 지낼 때가 떠오른다. 산책하면서 오른손을 휘휘 저으며 웃음이 넘치던 그.. 그녀의 딸애가 졸졸 따라가면 덩실 안아주던 그..
어느새 '테아트로 쥬세페 베르디’에 도착하니 문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다가오며 인사한다.
"클라우스씨! 어서 오세요. 자, 따라오시지요."
왜 여기를 왔지.. 오후 텅 비인 극장에..
이 극장은 원래 바로크시대부터 있던것을 몇번 개명을 해오다 1901년부터 베르디 죽은 얼마 후에 그를 기념하면서 '테아트로 쥬세페 베르디’ 라고 개명을 했다. 매년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 오페레타페스티발이 열리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오페라펜들이 몰려온다.
또한 클라우스가 20대시절 1950년대 말에 이곳에서 지휘를 했었다. 이제 80세를 바라보면서 그 시절을 추억하면 감명이 깊은 것이다. 이번 축제에 오르넬라가 기획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차에 제이드를 만나는 곳으로 정하고 온 것이다.
극장 감독이 인도한 곳은 피아노가 놓여있는 리허설 홀이다.
? 그럼, 홀을 떠나시게 되면 입구관리인에게 열쇠를 맡기시면 됩니다. 좋은 시간 가지세요“
? 고맙네. 다음에 봅시다."
극장 감독이 떠난다.
"제이드, 내가 얼마 전에 율리오로부터 자네의 소식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네. 어떻게 음악활동을 접고 그동안 살아왔을까? 그립지 않았는가? 무대생활이...“
"..........."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피아노 앞으로 가 뚜껑을 연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멘델스죤의 '무언가 작품번호 30번의 1번'을 친다.
클라우스는 두 팔을 끼고 여자의 연주를 듣다가 중간부분에 이르자 여자의 옆으로 다가와 멜로디를 친다.
여자는 오른손 멜로디부분을 그에게 맡기고 반주부분을 친다. 그는 지휘를 하기 전에 피아노주자로서도 유망했었으나, 지휘에 몰두하면서 피아노 연주를 접었다. 그럼에도 웬만한 곡들은 악보 없이 칠 수있었기에 동료 지휘자들이 ' 자네 혼자 비밀스럽게 계속 연습하나?' .. 라고 말 할 정도로 실력이 높았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잘 어울리던 곡이 마쳐진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클라우스는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간다. 그가 침묵을 지키므로 여자도 한동안 건반만 바라보고 있다가 일어나 창가로 간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그녀가 그의 등 뒤에서 묻는다.
"..........." 아무 대답이 없다.
여자가 그의 바로 옆에 서며 그를 쳐다 본다.
어머나.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계속)
Mendelssohn - Lieder ohne Worte op. 30 nº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