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황해도가 고향이신 우리 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많은 토지와 가족을 모두 북에 두고
맨몸으로 피난 오신 슬픈 실향민이셨습니다.
남쪽에서 다시 가정을 꾸리시긴 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계셨습니다.
경제적 기반도 없고 장사 수완도 없는 아버지가
걸핏하면 술에 취해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부르며 우시는 바람에
우리 집은 불화가 잦고 가난에 찌들었습니다.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같았습니다.
남한에서도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았지만 아버지에겐 북한에 있는 자녀들이 진짜였고,
길만 뚫리면 언제든지 달려갈 태세였습니다.
술이 깨면 다시 술을 찾던 아버지에겐 안정적인 직장도 없었습니다.
풍족하지도 화목하지도 않은 집안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사춘기 때 저는 늘 우울했고
가끔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제 삶에 변화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던 제가 삶의 기쁨과 희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너무 갈급했던 저는 밤낮없이 기도하고, 말씀도 읽고,
은혜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성경공부,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상기도, 부흥집회 등...
그런 저를 식구들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미친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동생들과 어머니는 교회로 인도하였는데,
아버지에겐 감히 예수님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이 거칠고 강한 분이시라 본인 주먹을 믿을지언정
예수 따위는 절대로 믿지 않으실 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입니다.
제 눈에는 아버지가 골리앗보다 더 크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습적으로 덜컥 병석에 누우셨습니다.
피난 후 고생하실 때 망가진 폐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받기를 권했습니다.
아버지는 의외로 순순히 세례를 받으시고,
수줍은 얼굴로 본인이 좋아하는 찬송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저는 아버지 입에서 이 찬송이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북에 있는 우리 고향집은 마당이 아주 넓었어.
내가 어릴 적에 어느 선교사님이 우리 마을에다 교회를 짓고 싶어 하셨는데,
우리 오마니가 마당 끝을 내어 드렸지.
그래서 우리 집이랑 교회가 붙어 있었단다.
덕분에 나는 가끔 교회종도 치고, 교회마당도 자주 쓸었지.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제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고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아프신 아버지를 두고 저는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하여 미국으로 갔습니다.
제가 미국에 간 지 반년 쯤 지난 1985년 3월에 아버지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임종은커녕 장례조차 모시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 형편에다 기저귀 차는 어린 아기 둘을 데리고 오는 것은 무리라고,
식구들이 제게는 알리지도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한 성품이라 가족들 속에서도 늘 외톨이셨는데,
생전에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오래도록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부흥회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성가대석 맨 앞줄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열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빛나는 하얀 옷자락과 그 뒤로 아름다운 천성이 보였습니다.
감히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눈부시게 흰옷을 입은 분께
우리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한번만 보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영화 속의 화면이 돌아가듯 어느 담 모퉁이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아,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땅에 엎드려서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아버지께 직접 해드리지 못했던 말들이 눈물과 함께 계속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눈물콧물을 다 쏟으며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실컷 하고나니
말할 수 없이 속이 후련하고 평안해졌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내느라 아버지의 겉모습은 완악하고 강퍅하게 변했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따스한 분이셨음도 성령께서 기도 중에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 진작 그 마음 알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김 희 재 권사
춘선선배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네요
눈물 콧물 닦으며 글을 읽어 내려 가다
저도 아버지를 만납니다
고향집 마당가를 서성거리는
희재 권사야 ~!
죄송해 하지 말아.
네가 남편 잘섬기고 두아들 잘키워 손녀까지 보고
건강하게 잘살아가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것을
보여 드리는것이 진정한 孝이니깐.....!
잘살고 있는 너를 보시면서 너를 위해 기도 하실꺼야.
춘선아~
너의 진솔한 글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게 한다.
저절로 친정 아버지와 시아버님이 연상되는구나.
친정 아버지보다 더 많은 세월 모셨던 아버님~
난 친정아버님보다 시아버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몇분의 일도 값지 못했어.
요즘도 가끔 "아버님 죄송해요" 중얼거린단다.
우리가 그랬듯이 우리 애들도 우리 죽은 다음에 "죄송해요" 하고 있겠지~
사람 사는것이 다 비슷해.
지금 네가 아들들 훌륭히 키워내고 교회에서 중추적 역활을 하고 있으니 아버님이 얼마나 기특해하고 계시겠니~
춘선이 화이팅이다.
춘선아~네 글을 읽으니
울 아버지가 눈에 어른거리면서 눈시울이.....
효도하려니 곁에 안 계시니
아쉽고
안타깝고
만져볼 수 없어서.......
춘선후배가 희재권사인거야?
글을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몰라....
풍요로운 땅 황해도 고향땅을 그리면서 우셨던 그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셨는데. .......
아버지께서 예수 영접하시고 본향으로 돌아가신 그 대목에서
목이 메었어.....
언젠가 미국에 왔었는데 못 만나고 갔었지?
그 때 참 많이 섭섭했었어...
건강하지?
?
맞아요, 춘자 언니 ~
제가 희재 권사에요.
언니도 황해도가 고향이시라고 하셨죠?
철이 들고 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큰 아픔을 안고 사셨는지 알겠어요.
공산당을 피해 며칠만 피신했다가 오려고 남하했는데
그 길로 영영 못 돌아가게 되셨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당시 북한에선 지주들을 잡아다가 모질게 고문하고
죄를 만들어서 죽이곤 했대요.
아버지도 끌려가서 얼굴, 손, 발을 제외한 온 몸이 다 피멍이 들도록 맞았대요.
간신히 손을 써서 풀려나긴 했는데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터라
할머니께서 잠시 피신했다가 오라고 야반도주를 주선해 주셨대요.
그랬는데 휴전이 되고 길이 끊어진 거죠.
요즘 <국제시장>이 인기였죠?
그 영화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흥남부두 철수만 제가 직접 보지 못한 사건일 뿐
나머지 일들은 자라오면서 다 겪은 일이고
특히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선 아버지 생각에 많이 울었어요.
테레비 앞을 떠나지 못하고 우시던 아버지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더라고요.
암튼....
지난번엔 몸이 너무 안좋아서 거의 죽을 뻔 했어요.
원래 계획은 LA에서 1주일 정도 머물고 오려고 했었는데
너무 아파서 비행기표를 패널티 물고 바꿔서 왔어요.
춘자 언니께 미리 이멜로 연락도 드리고 그랬었죠?
제가 가면 꼭 뵙고 싶다고요.
저도 너무 아쉽고 서운했어요.
20년 만에 미국에 갔는데 그냥 오려니 얼마나 아까운지...
그때 유학을 간 아들이 작년에 졸업을 하고
지금은 뉴욕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들이 미국에 있으니 제가 미국에 갈 날도 있겠죠?
건강을 잘 지켜서 다음번엔 꼭 만나뵙도록 할게요. 언니 ~
작은 나라의 우얏거나 단일 민족이라 하면서도 전쟁를 겪은 아픔이 제각각 다름을 느낍니다.
부산의 터 잡고 살면서 육이오 전쟁을 겪으신 시어머니는육이오전쟁은 ' 피난민이 억수로 밀려 온다.' 그 정도.
그런 시어머니가 육이오 전쟁 보다 더 진저리치게 무서워했던 것은 대동아 전쟁이었답니다.
정신대 안 잡혀가려고 나뭇짐속에 숨기도 하고, 어느 때는 너무 급해서 쇠죽통 속에 납작 엎드려 있고
그 위에 소 먹이려고 막 베어다 놓은 꼴망태의 풀을 쏟아 덮어 놨는데 심장이 얼마나 벌렁벌렁 뛰던지
풀이 들썩거렸을 거라고 그러셨어요. 대동아 전쟁이 제일 겁났다는 우리 시어머니.
친정 어머니는 나은 지 두어 달 된 시름시름 앓는 첫아들을 둥덩산처럼 싸서 업고 일사후퇴때 피난을 갔다데요.
결국 애기는 방공호안에서 명을 다 했지만 천지가 꽁꽁 얼어 붙었는데 삽한자루없어 그냥 버리다시피 했으니
친정 어머니에게 제일 무서운 전쟁은 일사후퇴.
피난을 가 본 적 없는 거제도 사람들 얘기 들어 보면 한국동란의 파장인 전쟁포로 수용과 흥남부두에서 태운 피난민의 행렬로
육지에서는 평온해진 전쟁이 한참 더 이어졌다고 합니다.
포로수용소는 ' 철망안의 전쟁터'라고 보면 되고 매일 죽어 나오는 시체로 옥포 앞바다를 덮었다고 하네요.
(시외삼촌에게서 들은 얘기, 더 참혹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안 할랍니다)
흥남부두에서 태운 피난민의 최종 목적지가 거제도라 지금도 일흔 좀 넘은 거제도 사람들은 그 상황을 다 기억합니다.
이북에서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상거지꼴이 된 피난민을 옥포에 한그룹, 장승포에 한그룹, 거제면에 한 그룹 내려놨다 하데요.
추운데서 살다가 따듯한데 오니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다 뜯어다가 자식 굶기지 않고 먹고 살더랍니다.
(올해 일흔 다섯살 된 거제면 출신의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
그 사람들중 더러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함흥 출신의 시어머니부터 대물림하는 큰 냉면집도 있고.
춘선 언니 아버지 이야기 끝에 줒어 들은 걸 장황하게 늘어놨습니다. 죄송함돠.
?
이 글은 2월 15일자
대전 천성감리교회 주보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