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울에 오십년 가까이 살면서
염리동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흔한 벽화마을이려니 하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벽화는 초입에 몇 개 달랑 보일 뿐이었고
대단한 비탈길과 계단으로 3시간 동안 땀을 엄청 흘려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달동네였습니다.
어두워지면 문밖에 나서기가 두려웠던 동네.
자동차도 힘겹게 올라가는 언덕길 그리고 계단.
그렇지만 주민들의 간절한 뜻에 전문가들의 지혜가 더해져
의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주민들이 밝고 즐겁게 사는 마을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애쓰시는 '염전골 사람들'의 사업들이
좋은 결실이 맺기를 기원합니다.
권오인 선배님!
선배님이 올려주신 사진을 보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염전이 많았네요.
박경리의 "토지"를 보면 수인열차를 타고 소래의 염전으로 데이트를 가서 하룻밤 남녀가 묵고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백정의 아들과 봉선이란 기생의 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이런 곳은 보존을 해야 하는데 했습니다.
송도의 아암도도 길 위에 나앉았고
갯벌도 없어지고
염전도 없어지고
개발만 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제 서울 친구는 송도로 데이트를 왔다가 아암도에 걸어 들어갔는데
그냥 물이 들어와 나오지를 못 해
결국은 결혼을 했습니다.
맨날 하는 말 "그 놈의 아암도때문에...."이라고요.
그런데 그것도 전설이 되어버렸네요.
두 분의 대화를 엿 듣다 보니
어럼풋이 옛생각이 많이 나네요
먼저 근무 하던 직장은
중국인들이
농사를 짓고 계시는
양배추 밭 옆이 었 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은
그 양배추 를 몰 래 캐어 먹으려다
소 굴레라고 하나요
휘어져 있어
어께에 맞으면
무척 아파했던 기억이 . . .
많은 매를 맞고도
그래도 손에 쥔 양배추를 놓지
못하던
참
살기 어려운 시절의
모습들이 스쳐 가네요
가끔은 망둥어 낙시를 하기도 했구요
동네 부스럼쟁이들은
까까 머리를
염전 물에 담그며
고통을 참던
그 어려웠던 시절이
이곳 주안에 뭍혀 있는 추억의 주안 입니다
아마 지금 선인 재단이
중국인 묘지 터 라고 기억이 되네요
꼬마들은 놀이터가 없어
그무덤가 에서 술레 잡기를 하며 놀던 모습들이 . . .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짠해 지네요
주안에서 누렸던 추억들을 되살리고저
함께 하려 하는 데
조금은 벅차네요
이해와 잃어진것에 대한
추억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면 가파른 비탈을 만나게 되지요.
일제 말기에, 한국전쟁 이후에, 도심개발에 밀려나
그 험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한 두 가구씩 떠나서 빈 집이 많이 생긴 곳도 있고,
그래도 제2의 고향인데 가꾸고 살자며 팔 걷어붙인 곳도 있고,
몇 시간 돌아다녀도 주민 한 명을 만나지 못하는 곳도 있고,
아침부터 외국인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골목도 있고,
사진은 왜 찍느냐며 쫓아내려는 곳도 있고,
날도 더운데 찾아주어 고맙다고 얼음물 따라주는 곳도 있고. . . . .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어느 곳이나 우리 이웃들의 진한 삶의 흔적들이
마을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버킷리스트 일곱번째 페이지에
"서울의 벽화마을"을 올려놓습니다.
감사히 잘 보았 습니다
저희 복지관 위치 역시
인천의 소금 생산지 인 염전골 입니다
몇년전 부터
염전골 사람들 이란 마을 만들기 모임을 구성하여
마을 벽화 만들기
텃밭 만들기 등 등 사업을 시작하여
작품을 보는 내내
새로운 생각들이 정리 되어
염전골 사람들과 더불어
지역을
어떻게 표현 할것인가
도전이 되네요
마을 만들기 작업 중 사람이
제일 힘듬을
한번 더 느끼며
인간 = 인( 人) + 간 ( 間 )
이것 이상의
아름다운 조합이 있을까
그러면서 남겨진 숙제........
최상의 목표가... 이곳에 있었네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