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내가 시집왔을 때 시모님께서는 내게 늘 치송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갑자기 바뀌어진 삶의 스타일에 적응하기도 버겨운데
"얘야! 넌 치송부터 하거라!"가 노래이셨습니다
맨처음에 나는 치송이란 말이 당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허나 이내 시모님께서 루즈를 바르거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그 말이 치장의 사투리라는걸 알았습니다
일단 치송을 시작하면 성격상 머리카락 한 올에서부터 내 맘에 들때까지 합니다
허나 그 치송이 내 처지와 어울리지 아니하다는 걸 안 후 까이것 다 치워버렸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주신 말씀은 아내된 내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의 치송은 외모에 국한되어있지 않습니다
외모의 치장을 비유로 내면을 치장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근데 아내들의 롤 모델로 사라를 소개하는 걸 봅니다
사라가 뭘 어찌했길래 그랬을까 묵상해봅니다
나는 그녀를 생각하면 왕들이 흠모할만큼 이뻤다는 것과
그래서 두 번씩이나 팔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리뭉실하게 생겼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남자는 보통 한창 이쁜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남자가 아내의 아름다움을 보존 유지할 수 있도록 공급해주려면 그것도 보통 힘겨운게 아닙니다
허나 베드로는 남편의 능력여하에 영향을 받는 치장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아내들은 변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야!
내가 너 말고 딴 남잘 만났어봐-
나도 한 미모하며 여지껏 살 수 있을거야!" 이런 악따구니는 초입부터 사절입니다
아름다움을 위한 치송의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베드로가 권면하는 치송은 거룩한 순종입니다
그는 분명 사라가 자기를 왕에게 두번씩이나 파는 무능력한 남편 아브라함을 어찌 섬겼는가를
떠올리며 이 말씀을 주셨을 것입니다
사라는 그런 남편을 선악간에 판단하지 않고 자기가 섬길 주로 모시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세번씩 부인한 자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기를 믿고 따르는 부인을 생각하며 썼을 것입니다
성경 어딘가에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합니다
아내가 얼마나 자기를 졸졸졸 따라주었으면 데리고 다녔을까 싶습니다
세상 어느 남자가 자기 부인을 곱게 단장시키며 살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허나 남자의 그 절절한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 장본인이 그 누구도 아닌 자기가 데리고 살고 있는 아내였다는 걸
세상의 딸들은 몰라도 사라의 딸들이 100% 알면 좋겠습니다
부부사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원수지간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원수지간으로 만든건 결코 남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만든 건 순전히 여자인 것입니다
남자는 그런 여인의 유혹에 너머가준 것 뿐입니다
남편이 미운 아내일수록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그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말씀이 진리인지라 그대로 믿듯이
아내들은 자신으로 인해 남편이 그 멋진 왕관을 사단에게 빼앗긴채 살게 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건에 동참한 건 첫 이브만이 아니였습니다
인류의 반인 모든 여성이였습니다
그걸 충분히 충분히 이해하면 남편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이 여자로 인해 사단에게 빼앗긴 왕관을 찾아오는 일에 힘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왕관의 특징 중 가장 눈여져 주목해야 할 것은 아들의 왕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아버지의 그 모든 것을 누리며 끊임없이 사귀며(소통) 살 수 있는 자는 아들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 자녀된 권세를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을 절절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 품에 안기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의식하든 못 의식하든 사단에게 내 준 영역이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은 여자가 아들을 낳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여자가 아들 딸 놓고 사는건 자연적으로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허나 성경에서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건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는 그 아들을 낳지 못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철저히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허나 드뎌 마리아에 의해 이브로부터
면면히 출발한 그 상징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나라이신 아들이 실체적인 현실 나라로 임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주 노골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너희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으며
자주 자주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들로 택한 자들이 어린아이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강조해주셨습니다
사라가 남편의 얼토당토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여
매춘부처럼 전락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 그를 구원해 준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어느정도 순종해야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삶의 사건입니다
아내들은 철장권세를 지니신 아들 예수님을 관념적으로 아는게 아니라 삶속에서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내의 삶을 주관하는 남편을 통해 경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때론 자기를 주관하는 남편의 손과 마음이 얼음처럼 찰지라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나마 순종의 관계로 엮어 있어야만 주께서 뜻하신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시는 주님이 분명하면 할 수록
남편은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시는 주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비로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에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 이루는데 없어서는 아니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 용서는 다른 장소에서의 용서가 아닙니다
다른 장소에서의 용서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답니다
그 장소는 필히 갈보리 산 위에서의 용서입니다
내 인격에 피가 흘러도 용서해야하는 일!
남편과 관련된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는 일!
사라가 어떠한 남편을 용서하며 그를 주로 섬기며 살았는가를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면,
아내가 주님의 눈부신 신부가 된 것을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되는 자는 남편입니다
남편은 그 때 비로서 자기가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 쏟아낸 수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잠을 이리도 오래 잤는지 머리를 긁적일 것입니다
남편에 관한 모든 것들은 주께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남편보고 이래라 저래라하는 아내라면 아직 철장 권세를 지니신 주님을 왕으로 모신 자가 아닙니다
아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은 자꾸만 헛발질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는게 아니라 자꾸만 긁어 부스럼만 만들도록 인도하는 격이 됩니다
베드로가 오늘,
아내들에게 권한 치송은 아내가 먼저 자신의 내적 치송없이는
결코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철장권세의 아들을 낳아던 여인의 라인에 서기까지
치송하려면 걸리는 세월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치송을 포기하는 자는 매사에 두려워하는 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