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사는 일 어디나 언제나 비슷하겠지만
유난히 이번 올해는 시간 보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다.
지난 4월 그 엄청난 일로 인해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마음 한 켠이 묵직할 것이다.
웃음이 나오지도 않거니와 웃어도 뭔가 허전하고, 무슨 일을 해도 소리내지 못하고
답답하고 안타깝고 속상하고 부끄럽고 화가 나고 그런 미진한 기분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이런 마음이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사라져도 아니되겠지만.
난 중 3 국어 C반(제일 낮은 반)을 맡고 있는데
오늘 수업받는 아이가 결석을 하는 바람에
남은 아이를 데리고 학교 뒷산에 올랐다.
이 아이는 매우 총명하고 사리판단을 잘 하고
주위상황이나 인간관계에 아주 민감한 총기를 갖고 있는 아인데
문장을 전혀 쓰지 못한다.
기가 승해서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고(지금은 좀 안 그렇지만), 분하면 잘 운다.
이 아이는 매일 일기를 쓰는데 졸라맨 비슷하게 선으로 된 그림을 그린다.
그래도 그 그림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그 아이가 그림을 그려 나한테 툭 주면
내가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해서 확인한 다음 글로 써 준다.
다 쓰고 난 다음에
-이 내용이 맞아? -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 내가 그 아이에게 검사받는다.
3월에 일어났던 학교폭력 사건도 이 아이의 그림일기에서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았다.
-여기 증거 있잖아!-
했더니 가해자 아이가 아무 말도 못했다^^
우리반에서 내맘에 제일 드는 아이다.
마음이 따뜻하다.
-너 청소야- 하면 귀찮다고 언제나 투덜댄다.
난 웃으면서 암말도 안 하고 내 일을 한다.
그러다 가만히 보면 벌써 하고 있다.
게다가 내가 회의를 하거나 일이 있거나 해서 오후에 교실에 없으면
방과후 수업 끝나고 교실 둘러 보다가 (보통 아이들을 그냥 집으로 간다)
걸레를 빨아서 칠판 밑도 닦고 책상도 닦아 놓는다.
아이의 그림을 보고 글로 옮기며
그 공간의 사이에서 그 아이의 맘을 읽으려 애쓴다.
아직은 단순한 생활의 나열이지만
시간이 가면서 언젠가 그 아이의 그림일기에도 자기의 감정이 드러나겠지.
4월 이후의 무서운 일을 겪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은 우리들이 받아야 할 업보일 수도 있고,
가치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맹목에 대한 냉담의 결과일 수도 있다.
요즘엔 아이들이 전에 보던 것과 많이 다르게 보인다.
오늘도 학교 뒷산 중턱에 있는 토끼장에 있는 토끼에게 풀과 빵을 주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정말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에른스트 슈마허의 그 책, 읽었구나
크고 편리하고 효율을 중심으로 달려온 지난 사 오십년의 산업화에서
그 폐해를 돌아보며 인류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경제학자로서 설파한 것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제는 자연과 이웃을 생각하며 대안적인 삶을 추구해야 하는 때이지만
원래 인간이 이기적이라 그런지
자기 자신에게 당장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으면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 거 같애
지난달 대학로에서 1974년 울릉도 간첩조작 사건을 치유연극화 한 '상처꽃'을 보았는데
처음 나온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정확한 대사를 다 기억 못하지만,
'그들이 좌파이념을 가진 사람을 잡으로 왔을때,
난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난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동자를 잡으러 왔을때,
난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학자와 예술가를 잡으러 왔을때
난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난 학자도 예술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때,
난 억울해서 도와줄 사람을 찾았지만 내 옆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뭐 이런 내용인데
물론 이 글은 나찌정권 때의 이야기지만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되는 나의 모습, 대부분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래도 작은 것을 추구하는, 우리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희망을 살아내는 이들을 보며 절망하지 말아야지.
걷기 모임에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