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거리를 걷다
아스팔트 사이에 핀 노오란 민들레꽃을 보면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바람을 기다려 씨앗을 날려 보내는 모습이
꼭 우리 아버지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벌써 6년을
아버지는 누워 계신다.
파킨스 병으로 운동장애를 겪고 있는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도 싫은지 바깥출입을 끊으셨다.
학창시절 김구 선생님을 따라 다니며 평생을 바람처럼 살았던 분인데 정말로 기가 막히다.
어느 날 집에 가면
아버지는 눈도 뜨지 못하고 누워 계신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요즈음 식사도 잘 드시지도 않고 기력이 엉망이란다.
겁이 덜컥난다.
그래도 손녀딸들이 와서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눈을 뜨고 웃으며 "우리 병아리들..." 하신다.
그러면 아이들은 "삐약 삐약 " 하며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빰에 얼굴을 부빈다.
내 동생은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심술이 나는지
"아버지는 우리는 싫은가 봐" 한다.
우리 어릴 적
배우 김진규와 비슷해 잘 생기고 멋장이인 아버지는 무척 엄하셨다.
물론 딸만 내리 일곱을 두셨으니 행여 잘못 될까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을까?
우리는 그 때 9시가 통행금지 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언젠가 아버지께서 입원 중 병문안을 온 내 친구들은 우리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라며
"산학아! 너는 왜 아버지를 닮지 않았니? 아버지를 닮았으면 대단했을텐데.." 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업때문일까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면 눈에서 불이 번쩍나 감히 아버지 눈을 쳐다 보지도 못했다.
그런 우리 아 버지가 병때문에 세상과 인연을 끊으신 것이다.
세상을 잃은 대신
아버지의 세상은 우리 가족이 전부가 되었다.
좀 기력을 찾으시면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일이 잔소리를 하신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면 이제는 왠지 안심이 되고 옛날 큰소리 치던 때가 그리워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 주말에도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은 동생은 입술이 부어터져라 불만을 쏟아낸다.
"아버지는 나만 미워해"
같은 피를 물려받은 형제도 다 제 각각이다.
우리 막내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얼마나 살갑게 하는지.....
주말이면 집에 와서는 아버지의 손톱 발톱 다 다듬어 드리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정성껏 맛사지까지 해 드린다.
또 셋째는 아버지 병수발로 지친 엄마를 모시고 일본등으로 온천여행을 한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 정도 엄마와 엄마 친구들까지 모시고 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맏이인 나는 그런 것을 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아버지의 손을 괜히 쑥스럽다는 이유로 잡아 드린 적도 없으니 이런 불효가 어디 있을까?
지금은 대포동 미사일로 알려진
함경북도 그 언저리 명천이 고향인 우리 아버지는
백두산 자락에 집이 있어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중 방학이면 고향에 가서 말을 타고 놀았다고 하신다.
제사가 있는 날이면 집주위의 산을 다 막아놓고 다른 사람의 범접을 막고 제사를 올렸다고 가끔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전쟁이 터지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셨으니
평생 가슴 한켠에 아픔을 쌓아두고 사셨음을 모르는 자식이 있을까?
그동안 받은 국민훈장등 메달을 장농 속에 쌓아두고
아버지는 어떤 생각에 싸여 누워만 계신 것일까?
그런 우리 아버지는
자식이 크게 잘못 한 일도 그 자식이 자기 아이들만 잘 키우면 무조건 "잘했다" 하신다.
얼마 전에 조카아이가 26살 이라는 앳된 나이에 당당히 국제기구에 들어갔을 때
"장한 우리 손녀딸..."이라며 말을 맺지 못 하셨다.
만약에 당신의 딸 중 한명이라도 그런 자리에 들어 갔으면 정말 효도를 했을텐데.....
내일이면
다시 어버이 날이다.
나이가 들수록 회한이 앞서는 것은 내가 바로 그 길을 따라가기 때문일까?
언제나 아프다고
언제나 힘들다고
친정에 가서 철없이 쏟아내던 그 많은 말들이 恨으로 남는다.
내 아이들이 속을 썩일 때마다
"그래 내가 부모에게 못 했는데 무엇을 바랄까" 라며 반성도 한다
몸이 약하다고
맏이 라면 벌벌 떨던 우리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합 니다.
산학아!
그래도 부모님 아직 생존해 계시쟎아?
너희 형제자매들이 부모님께 하는 거 보면 난 정말 자식도 아니다.
우리집은 일단 장남인 오빠가 든든하게 버티고 계시니까 뭐 친정 걱정은 안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께서는 내가 많이 보고싶으셨을 것 같네.
내가 집에서는 워낙 수다장이라 죙일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하고 그럼 아버지가 참 즐거워 하셨거든
아이구 나도 아버지 생각난다.
예전에 봄날 어딘가에 댓글로 아버지 이야기 쓴 적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운동선수시면서 엄청 생활력도 강하시고 상당히 매서운 분이셔서 남들은 좀 무서워 했는데
엄마나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께 정식으로 야단 맞거나 혼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가 철없이 행동해서 마음에 안드셔도 언제나 철들면 나아진다고 오히려 다둑여주시곤 했다.
엄마가 월요일에 오시는데 생각해 보니 이 집 이사온 게 2004년 8월이었고 넓은 집 갔다고 두분이서 와 보신 게 끝이었다.
그 후로 건강이 나빠지셔서 통 못오시다가 우리 아들 결혼식에도 엄마만 오빠네 식구랑 오셨지만 그 날은 콘도에서 주무셨고
다른 동생식구들은 모두 당일치기로 다녀갔다.
이 집에 주무시러 오시는 건 이제 겨우 두 번째인 셈이다
작년에 아주 오랫만에 조카 결혼식장에서 사촌 여동생을 만났는데(작은 아버지 딸) 그 동생이
"큰아빠가 큰언니 무지 예뻐 하셨는데....... "
하더라구.
근데 산학이 넌 왜 번번히 사람을 무장해제 시켜서 속을 다 들어내게 만드니?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도 바쁜지 이제야 늦게 답글을 씁니다.
죄송합 니다.
선배님의 아버님께서는 인천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유명한 체육인이셨지요.
스포츠 맨들이 지금도 여자들에게는 최고의 남편감으로는 치듯이
선배님의 아버님께서도 당연히 그러하셨겠지요.
우리가 무척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박지성의 신부가 과연 누구일까 였잖아요.
제가 교편을 잡고 있던 남자 학교도 농구와 유도가 유명했는데
선수들 한명 한명이 모두 순수하고 착하고 의리있고 성실했습니다.
물론 그 중엔 우리나라 대표 선수로 여러 명이 활동하기기도 했고요.
당연히 결혼들도 잘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배님의 밝은 성격이 아버님을 꼭 닮은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아버님이 애지중지 하셨고요.
그런 아버님이 어버이날 같은 날이면 얼마나 그리우실까요.
그래도 어머님께서 딸네 집을 방문하시네요.
오랜만에 어머님과 알콩달콩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겠지요.?
좋은 시간 되십시오.
산학 선배님!
아버지를 향한 중심이 반듯하신 선배님은 정말 효녀이십니다
김 구 선생님을 사모하며 따르셨다는 산학 선배님의 아버님을
저는 대한민국 역사를 아는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존경합니다
내년이면 분단조국 70년입니다
70년이란 숫자는 매우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 바벨론 포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나자 그들을 해방이 되었습니다(기원전 538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대한민국도 분단 70년이 되는 내년엔 좋은 소식이 들려지길 사모합니다
아버님께서 부디 통일의 그 날을 맞이하여
고향 땅을 밟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순정 후배님!
논에 사는 우렁이는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어미 우렁이의 속을 다 파먹고
껍질만 남은 어미 우렁이가 논 위에 둥둥 뜨면
우리 엄마 헤엄 잘 친다고 좋아라 했답니다.
이처럼 부모 속을 다 파먹고 있는데 효녀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는 돌고 돌기 때문에
앞선 사람의 실패를 교훈삼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에 70년이 지나야 해방된 아픈 역사가 있네요.
세계의 전쟁사도 들여다 보면 50년마다 전쟁이 있었다고 역사는 말하네요.
그래도 요즈음 전쟁은 안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만큼 인간은 갖은 사고로 죽어가고 있다고요.
대한민국도 내년이 분단 70년이고
이스라엘이 70년이 지나 해방이 되었으니
대한민국도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하셔야만 하는 일을
때를 놓치지 않고 그때! 바로 그때 하셨으니 행운아이시고
위대한 분이시고, 한도 원도 후회도 없으실 것 같아요.
어버이 날이군요!
저도 어머니께 꽃바구니 만들어 보내드리려 합니다. (큰딸네서 생신 지내시고 오늘 집에 오심)
순애야!
너를 보면 늘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자녀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다" 라는 사실이란다.
너의 어머님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익히 알고있는 유명한 분이지만
실은 너의 아버님께서 더 대단한 분이셨지.
나는 지인수에게서 너의 아버님에 대해 자세히 들었는데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 중 절반이 무료환자였다고.
오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쓴 김진명이라는 작가가 나와
세월호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했는데
한 마디로 "사람보다 금전"을 중요시 한데서 문제가 벌어졌다고 하더라.
대학에서도 인문학을 줄이는 현상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그런 면에서 볼 때
너의 아버님은 대단하다.
"금전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한 분이시니까.
정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표상임을 누가 부정할까?
산학선배님 글을 읽으니
그렇게라도 살아계신 부모님이 부럽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계급만 높아지고
형제지간에 왕래도 소원하여 때만 되면 외롭습니다.
선배님 글 읽으니 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도산학선배님의 아버님은 살아계셔서 부럽습니다.
비록~~~병상에 게시지만요...
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도산학선배님이
그 자애 때문에 이렇게 글이 따뜻하군요^^
어버이날에, 가정의 달에 부모님이 더 생각나는 것은
어쩜 요식 행위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때에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은
꽃이 피는 계절에
아름답게 그분들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는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더 가슴에 많이 두게 되네요^^
살 때는 어머님과 친하지만요...
아버지...저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집니다.
이인희 후배님!
꽃이 피는 계절에
부모님을 기리는 것이
엉뚱한 생각이라니요?
어느 시인은
"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라며 화창한 봄날 한숨지었다 합니다.
봄은 살아 있다는 기쁨과 살아가야 한다는 아픔이 엇갈리기 때문이라고요.
얼어붙은 땅속에서 새싹을 틔우며 잔인한 4월이 오듯
5월, 환희의 계절에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엉뚱한 생각이 아니랍니다.
우리는 만날 때 헤어짐을 생각한다고도 했잖아요?
인희 후배 말처럼
아버지는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십니다
맨처음 저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 했지만
결혼을 하고 남편과 살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김현승님의 시에 이런 귀절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반이다" 라고요.
우리 산학이의 글을 읽으며 한참
시간을 끌어야 했어요.
내아버지가 생각나서....
은초 만 했을때 이웃집 노점에서 사탕 한개 훔쳤다고
회초리를 휘두르며 밤 11시까지 잠을 안재우는
엄마를 야단치며 나를 품에 꼭 끌어 안은 울아부지.
초딩 입학식때 벨벳 원피스 입히고
가슴에 수건 매달아 사진찍어 주며 만면에 미소짓던 울아부지
나 시집 가던날 내방에 들어가 하염없이 우셨다는 울아부지....
울아부지는 남자형제들 틈에 끼인 나를 유난히 챙기셨다.
아버님의 산학이에 대한 사랑이 이해되어 나도 지난날의 그리움에 빠져보았네
아버님의 건강이 좋아지시길 바란다.
김순호 선배님!
요즈음 결혼식 풍경 중 하나는
엄마는 울지 않는데
아빠들이 울고있는 풍경인데
선배님 아버님께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랑하는 딸이 아까와 시집 보내던 날 따님 방에 들어와 우셨네요.
무조건 내 편이었던 아빠가
벨벳 원피스 예쁘게 입히고 가슴에 흰수건 달아 주실 때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어제
가족 모임에서 조카사위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4살짜리 아이가 어떤 남자 친구가 너무 좋다고 하길래
"그럼 너 누구하고 결혼할래?"했더니 "준수하고..."하는 말에 괜시리 열이 받쳐
"그래? 그러면 준수네로 가서 살어" 했더니 거침없이 팬티바람으로 나가서 놀랐다고요.
어릴 적부터 우리는 그렇게 철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도 받은 사람만이 줄 줄도 안다고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손주들에게 돌려주는 선배님.......
존경합니다.
아이 참
오늘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산학이 글을 읽으니
잊고 살았던 부모님 생각이 나네.
돌아가시고야 철이 들었는지...
부모 안 계시니 많은 후회가 생각나네.
최선을 대 해 드렸어야 하는데
한선민 선배님!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라던 옛어른들의 말씀이
백번 옳은 말임에도
실천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가슴을 칩니다.
그래서 효자는 하늘이 낸다고했나 봅니다.
지금은 가고 없는 내 남편도
시어머님이 이것이 흰색이다 하면 검은색임에도 "네, 흰색입니다" 라는 효자였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야속하고 무척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남편이 지혜로왔구나 합니다.
분명 검은색임을 모를리 없건만 억지를 부리니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해결이 날까요?
"네" 라고 하면
무조건 내 편인 아들이 있어 그냥 흐뭇한 것이지요.
가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몇 마디 안 했음에도 자기만 잘났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것을 보면 기가 딱 질립니다.
사방이 벽이지요.
그래도 훗날 내가 죽은 후엔
내 아이들도 그 때야 철이 들겠지요.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정이 많은 김광숙선배님!
선배님께서는 재잘재잘 거리며 부모님을 얼마나 기쁘게 해 드렸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을 한다는 선배님의 글귀가 가슴을 칩니다.
물론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어찌 짐작이나 할까요?
얼마전 신문 칼럼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산에 송아지를 끌고 나갔다가 송아지를 잃어버려
다음 날, 아버지와 어미소를 데리고 산에 올라 갔더니 어미소가 얼마나 구슬피 울던지
그 소리를 듣고 송아지가 덤불 속에서 나오더랍니다.
전날 그렇게 불러도 감감 무소식이던 송아지가 어미소의 울부짖음을 듣고 나온 것이지요.
그 날, 아버지도 나도 어미소도 송아지도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고요.
어미소의 애끓는 마음이 송아지를 살렸습니다.
지금
세월호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부모의 마음을 그 누가 있어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산학후배의 글 반갑게 읽었어요.
산학후베는 아주 행운아 입니다. 아즉 아버님 어머님 다 생존해 계시니 말이예요.
난 아버님 얼굴도 모르고 살었지요. 바로 육이오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 자랑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백두산 자락에 사셧고 국민훈장을 받으셨다니 더욱 궁금합니다,
모두 산학후배 칭찬을 하는데 그 훌륭한 부모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숙자 선배님!
편안 하시지요?
우리들 부모님 세대는 전쟁을 겪는 등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도
대한민국의 초석을 세우셨습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 그리고 베트남 참전으로 눈물의 달러를 모으는 등
그 디딤돌로 오늘의 우리가 편히 살고 있으니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표현이 될까요?
선배님께서는 전쟁통에 아버님을 잃으셨으니
어머님께서 얼마나 힘들게 선배님을 키우셨을까요.
선배님께서 살던 소래 이야기를 들은 것이 벌써 몇년 전이네요.
저는 우리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것을 볼 때마다
백두산 자락에서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던 호쾌한 분이
전쟁 통에도 살아남은 분이 병으로 저렇게 방안에 갇혀 계시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해서 눈물이 납니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누워서 고향땅을 달리고 있을까요?
그리운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지금까지 혼자 겪었을 이산의 아픔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까요?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중 전쟁이 터지고
학도 의용군으로 나가 참전한 공로로
전두환대통령때부터 호국영웅 표창장을 받으셨는데
대통령이 갈릴 때마다 꼭 같은 상을 받고
이번 박근혜대통령 때에는 연세가 참작이 되었는지 상이 아닌 훈장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것이 별것 아니라 하시며 장농 속에 그냥 넣어두고 있지만
아버지같은 분들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 상을 받으면
나라에서 여러 혜택이 있지만 (집을 살 때 차를 살때 세금감면등)
우리 아버지는 더 어려운 사람이 받아야 한다며 한번도 그 혜택을 받은 적이 없답 니다.
참으로 곧은 분이지요.
우리 친정집도 허름한 송림동 72번지에서 55년을 지금까지 한 곳에서 살 정도이니 말 해 무엇 할까요.
우리 아버지가 말씀은 안 하지만
안방 벽에 걸려있는 낡은 사진 두장을 보면
그 시절이 아버지에게는 제일 좋은 시절이 아니었나 합니다.
김구 선생님과 단체로 찍은 사진 하나와
김구 선생님과 둘이서 찍은 사진 하나.....
학창시절 학생운동 하던 꿈 많던 시절이었겠지요.
이제 우리들 아버지 세대가
꿈도 사라지고 분단의 아픔을 여전히 간직한 채 서서히 물러나고 있습니다.
스물 다섯살 이후 시집와서 명절때도 못 찾아뵙고
큰집 외며느리 노릇하느라 자식노릇 못 한 생각이 나서 가슴 아프네.
시부모님은 내 가슴에 안겨 돌아가셨지만......
날 낳아 기르신 분들은 돌아가실때는 뵙지도 못했네.
팔자가 그러려니 하지......어쩌겠어 주어진 데로 살아야 주위사람들이 더 편하더라
이 나이되어보니 더 맞는다는 생각이야.
이젠 아웅다웅 할 기운도 시간도 없지싶어요.
어제 정말 모처럼 꽃밭찾아 일산다녀왔네..........그래봐야 서너시간...
부지런히 친구랑 대명포구로 가서 생선사다 저녁준비했네
짬짬이 스맛폰으로 찍은 사진 카톡으로 보내보는 재미에 빠져 사느라
내가 종종 카톡으로 시끄럽고 요란하게 오는 소리에
궁시렁 거렸는데...내가 요즘 그 짓에 빠져사네....ㅎㅎㅎ
실시간 중계방송하듯 찍어보내기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어요.
그 결과물 몇장 올려볼게...........
열흘여 뒤에 우리 좋은일로 만나자....ㅎㅎㅎ
김은희 선배님!
언제나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이제는 생활속에 녹아 여러 사람을 편하게 해 주시네요.
그런 중에도
무엇 하나에 푹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은혜로움입니다.
선배님의 남다른 음식 솜씨도 당연히 그 중에 하나이고요.
그리고
긴 겨울을 지내고
오랜만에 나선 나들이는 또 얼마나 설레였을까요?
저도 며칠 전 용문산 지나 중원산 중 도일봉이라는 산기슭에서 산책을 하다 왔는데
찔레꽃 향기에 마음까지 달떠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고 왔습니다.
벌써 여름이더라고요.
선배님께서 계신
수안산방의 여름도 지금 한창이겠지요?
권칠화님!
사랑에게 가려면
첩첩 산봉우리를 넘어야 한다는
내가 좋아하는 정호승님의 "미안하다" 라는 시가 요즈음 새삼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님의 미안하다)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넘어도 넘어도 또 넘어야 하는 고갯길이지요.
슬픔이 많은 세상
나를 포근히 감싸 줄 그 사랑은 언제나 올까요?
늦게라도 와서는 내게 "미안하다" 라고는 할까요?
내일이 어버이 날입니다.
많은 회한이 있지만 그래도 못다한 말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고 싶었습 니다.
사랑합니다....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