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랑 주머니   이정록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몸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 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사그랑 주머니 : 다 삭은 주머니라는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모양만 남은 물건을 이르는 말)

 

 

 

     몸과 맘을 다

 

 

장독 뚜껑 열 때마다

항아리 속 묵은 시간에다 인사하지.

된장 고추장이 얼마나 제맛에 골똘한지.

술항아리 본 적 있을 거다.

서로 응원하느라 쉴 새없이 조잘거리던 입술들.

장맛 술맛도 그렇게 있는 힘 다해 저를 만들어가는데.

글 쓰고 애들 가르치는 사람은 말해 뭣 하겄냐?

그저 몸과 맘을 다 쏟아야 한다.

무른 속살 파먹는 복숭아벌레처럼

턱만 주억거리지 말고.

 

 

 

 

-이정록 시인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어머니 학교라는 시집을 다시 읽었어.

시집이 뭐냐 하면 사서 보는 책이란다.

음악은? 씨디를 사서 듣는 것이고. 음악회에 가서 듣는 것이고.

 

세상 한 귀퉁이 이런 분들이 안 계시면 세상은 얼마나 되짚어 볼 수 없는

허전한 곳일까 생각해 본다.

이 봄, 시집들 한 권씩 <돈 내고 사고>, 씨디 한 장 <돈 내고 사라고> 

주제 넘은 이 연사 친구들에게 외칩니다.

잘들 지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