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
묵상본문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 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사무엘상6장13-21
해석도움
용납된 블레셋의 속건제물
벧세메스 사람들은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언약궤가 되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결단코 인간에 의해 실추된 채 내버려질 수 없음을 증거해줍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저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끌고 온 소와 수레의 나무로 번제와 속건제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에게 임한 재앙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확인한 블레셋 방백들은
조용히 에그론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편,블레셋이 보낸 속건제물은 속건제물로 합당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속건제물로 오직 "생명 있는 짐승의 피"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모르는 이들의 무지함을 용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 없는 자에게는 그 양심으로 심판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판받은 벧세메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 중 일부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에서 미신적으로 사용하였고, 이제는 불경건한 호기심으로 그것을 열어보려
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쳐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없어서 금쥐와 금종기를 만들어 보낸 블레셋 사람들은 용납하셨지만,
율법이 있으면서 그것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엄중히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벧세메스 사람들은 크게 애곡하게 되었고, 마치 블레셋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여호와의 궤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아바나답은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신자 중에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드리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옮겨버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생명나무 GT
여호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자이십니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두 젖 소가 벧세메스에 이르자 더이상 가지 못하도록 서게 만드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허나 그 기쁨이 변하여 애곡이 되는 것을 봅니다
성경이 말하길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사 죽임을 당했다 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죽임 당한 이유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이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때로는 하나님께 의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의혹들이 제대로 해결받지 못할 때 알게 모르게 반항이 생기고
그 반항심은 나아가 하나님을 지독히 원망하게 만드는 쓴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하길 너희가운데 쓴 뿌리가 있나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바로 이 쓴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성경을 보면 이게 웬 말인가?
어인 일로 무지하고 착한 백성들이 죽어나가야만 하는가?
아니 하나님은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지옥에 관해서는 도무지 믿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 세상 힘들게 살다 죽는데 죽어서까지 지상보다 더 힘든 삶의 연장터인 지옥이라니 말도 안돼!
그럴바엔 앗쌀하게 사람을 만드시지나 말지...
참으로 나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던 내가 질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24살때부터였습니다
24살이 열살 스무살보다 더 성숙한 나이라서 변한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나이에 찾아 와
친히 내 모든 의식세계에 간섭해 주신 사랑때문이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전환점이 100% 변화를 완성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 때를 시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면 어찌되는 내 생각을 전환시켜 변화받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나고보니 나도 벧세메스 사람들 못지 않게 하나님을 불경건하게 대한 적이 많았습니다
무지하여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스스로 무거운 멍에를 만들어 지고 살기도 했습니다
낮 잠자는 것 조차 부끄러워 낮에는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속 옷 갈아 입기를 내 양심의 청결과 병행시켜 꼭 그 때 그 때 갈아 입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법속에 갇혀 살기도 했습니다
무지하여 하나님 말씀을 때로는 부적처럼 가슴에 부치고 살기도 했습니다
입술로 주문처럼 달달달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웬지 내게 미칠 화와 재앙을 물리쳐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런 어리석고 미련하고 무지한 나임에도 이렇듯 죽지 않고 산 자에 땅에 있는 것은
내 모든 허물과 실수와 죄악들을 송두리째 가져가 나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중보자로서의 제사장 역활에 충실한 예수님의 모형적인 인물이 있을 때는
그 진노의 잔이 너머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실제적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시대와 다를 바 없이 하나님 앞에 많은 범죄를 행합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우리들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든든이 서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반가이 맞았던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해 죽는 것을 봅니다
불에 데인 아이는 불을 조심스레 다루는 법을 배우기보담은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실패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마음보담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두렴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하여 그 두렴으로부터의 벗어나기 위해 그 궤를 모실 다른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별 수 있을까요?
사람 사람이 다 그 사람이거늘...
그럼에도 우린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고 ,그래서 그런 사람을 우상시 여기며 찾아 헤메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궤(여호와의 거룩한 성품)"를 담당하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두터운 휘장을 찢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셨다 했습니다
거기 들어가심은 순전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 함이라 했습니다(히브리서9장24절)
여기서 하늘의 성소란 단순히 위치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 나타나시는 역활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다면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진정으로 하고픈 말씀이 무엇인가를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터운 휘장을 자기 몸으로 찢으신 것처럼,
우리의 단단한 육피를 찢고 들어 와 하나님의 성소인 내 맘속으로 들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날 위한 중보자로 하나님 앞에 밝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날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저 머나먼 하늘 보좌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깊이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최후의 그 날에 이르면 우린 보좌 위엄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을 볼 것입니다
허나 주님께서 지상 사역 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깊이 상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임종하여 가는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천국이 있는가 하면
천국이 내 생전에 내게로 오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천국을 수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어주신 회개와 간구의 영!
그 영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오순절 다락방에서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단단한 육체의 껍질을 찢고 들어 와 살게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머무시니 당연히 그 때 이후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이야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현대 과학조차 머나먼 거리와
그 먼 거리를 가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을 단 한 순간으로 단축시키고 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공간과 시간의 장벽을 허무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 오늘도 나는 구약 시대의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여호와의 궤가 무섭고 두려우니 누가 이 여호와의 궤를 모시고 갈꼬? 라며
내가 모시고 가야할 여호와의 궤를 남이 감당해주길 바라고 있는지는 아닌지 생각해보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