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1장 3-4 


내게 있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구매력은 대단히 컸습니다 


과연 이러저러한 믿음의 시련을 거치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회의가 들 정도였으니깐요

마치 너무나 좋은 상품인지라 매우 고가격임에도 돈이 많음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상품이 과연 그 내용서 그대로일까를 더 의심하듯이 말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속에서 지혜가 부족하여 구할 때 

특별히 강조하듯 상기시켜 주는게 있습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우린 보통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혹 잘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일까? 

라는 선악간의 율법적인 틀에 갇힌 나머지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는 순간조차 

하나님께 올인하는게 아니라 내 생각과 내 상황에 올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과 나 사이에 

옳고 그름이나, 

책임감이나, 

죄책감이나, 

정죄감이란 내 자아의 율법적인 소산물들을 두고 생각하니 그러합니다


야고보는 문제와 나 사이에 오직 <믿음>을 둘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나도 해보았지만 정말 그게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가능해지더라고요

믿음의 시련이 있거나 없거나 일상적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정말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서 무진장 쏟아부어주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자 절로 가능해지더라고요 

하늘의 지혜로 갈수록 풍성해지니 믿음 또한 절로 자라더라고요


망하라면 망하라나보다

흥하라면 흥하라나보다

뭐 이런 식이 되더라고요 ㅋㅋㅋㅋ

그렇다고 내가 노력을 안합니까?

아네요 

나처럼 성실히 부지런히 사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일하는 시간이 많으니 청소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 흠이지 다른 점에는 흠이 없어요

청소하는 시간 아껴 책보고 글을 썼으니 이만했겠지요

안그랬음 평생 돼지 우리 안에서 돼지처럼 살다 죽었을거예요 

삶은 나로하여금 끊임없이 더러운 구석에 처밀어 놓곤 올라가지 못하도록

날마다 나를 끌어내렸지만 나는 그럴수 없노라며 오늘까지 온 것 같습니다


시련은 나의 젊음도 건강도 가져갔지만

지혜는 가져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혜는 풍성해져 인생의 고삐마저 아예 그 지혜에게 넘겨주게 되더라고요 

물량은 모르지만 지혜만큼은 정말 후히 주시는 그분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다보니

절로 그분을 믿게 되더라고요

지혜가 나보다 더 큰데 뭐 내가 안답시고 날 믿습니까? 

아니 그 분을 의심합니까?


그분이 이래면 이래도 흥

그분이 저래면 저래도 흥 

모든게 그처럼

흥입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지혜와 진리와 말씀을 각각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걸 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믿음의 아들이나, 진리의 아들이나 같지 않을까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켜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믿음을 주었을까?

생각해보면 역시 바울이 계시로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줌으로 믿음을 갖게

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라 함은 결국 말씀으로 구하라는 것이겠지요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라 하여 믿음을 물량의 후함으로 보면 아니될 것입니다 

후히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심중을 어찌 물량으로 대체시킬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주체자 되신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실 때는 다른 이유 없습니다

<당신 아래에서> 살도록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상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현상입니다


모세가 물이 없어 백성들이 자신을 향해 원망할 때 

그의 인내가 백성들과의 관계에만 치우쳐 폭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울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수기 20:10~12 


만일 하나님께서 모세의 혈기와 분노를 단순히 인내의 한계로 본 것이라면 

그렇게까지(가나안 입성 불가) 반응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혈기가 나오게 된 것이 당신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모세가 아론과 함께 그 반석 앞에 선 순간 

그는 <하나님를 믿지 못하는>백성들에게 노하는 것이라기보담은

지도자인 <자기를 믿지 못하는>백성들에게 노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되면 어느 순간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세가 그 반석 앞에서 지팡이로 치기만 해도 물은 나옵니다

허나 그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라!"고 말을 하는 모세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듭니까?

 

반석에서 물을 주는 이가 어느사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옮겨간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입니다

모세가 그러했다면 모세 외 다른 모든 이들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겠습니까?


근데 왜 두 번을 쳤을까? 생각해보면 

모세가 그런 말과 함께 지팡이로  반석을 쳤을 때 과연 물이 쏟아져 나왔을까?

만일에 반석을 치자마자 물이 콸콸 쏟아졌다면 굳이 한번 더 칠 필요가 있었을까?

모세는 그 순간 깨달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지팡이를 칠 때 그의 아찔함은 어떠했을까?(이건 내가 추론해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하여 물을 내십니다

허나 모세와 아론을 약속의 땅으로 출입시키지 않는 것으로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시키지 않으십니다

당신만이 생수를 주시는 거룩하신 자라는 것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정말 모세가 준 줄 알겠지요

어디 물만 그랬을까요? 날마다 내리는 만나도 모세가 준 줄 알았지요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내려와 사역할 당시 그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었다고 말씀하셨을까 싶습니다


야고보는 가난하나 부하나 그런 것들이 하등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시 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모든 상황을 뛰어 너머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온전히 기뻐하며, 온전히 인내한 결과  

나타나는 놀라운 현상을 두고  야고보는 진리의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람은

<진리>로 낳은 아들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믿음의 시련만이 진리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면 우린 분명 선택할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을 흔쾌히 환영하며 선택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