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본문-

여호수아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 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여호수아 1장1-4


2014년 1월호 생명나무 GT책을 아직 받지 못해 당분간 해석 본문을 올려드리지

못하게 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대신 저의 묵상을 올려드립니다


모세의 죽음과 여호수아의 등장


율법의 중보자였던 모세마저 율법으로는 결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 역사적인 비화를 또 다시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그는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출애굽이란 엄청난 과업을 

성취한 후,그 많은 회중들로 형성된 광야 교회를 40년 가까이 여호와의 율법대로

목회하였음에도 약속의 가나안 땅을 지척에서 바라 보기만 하고 못 들어간 사람입니다

율법은 이렇듯 가기 싫다고 뿌리쳐도 기어코 강제로 사망의 자리까지 끌고 갑니다

이 지긋 지긋한 숙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만드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고 기록한 바울이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으로부터라는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갈라디아서 6장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큰 글자보다 더 입체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펼치시며

내게 "율법를 대표하는 모세가 죽은 것을 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가 여러 율법을 지키다 하나를 지키지 못해 가나안 땅을 코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의도적인 죽음의 잔을 왜 마셔야만 했는지 성경을 주의해보라 하십니다

  

결국 모세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 올라오셨을 때 엘리야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가운데 나타나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만이 모든 믿는 자(모세, 엘리야, 나, 우리들)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호소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모든 생애속에 차곡 차곡 축적된 온갖 감정들의 찌꺼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목젖까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기도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내 비참함이 어느정도에 이르렀기에 내가 나를 첫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로 선정하였을까?

바울이 왜 그토록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했을까?

나는 나 자신을 보며 더욱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갈수록 더해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누구보다 더 나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각각 자기 짐을 

지라고 말씀했던대로  내가 져야 할 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결산해야 할 내 짐을 누가 대신 져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각각 각인의 입을 열어 다 자신들의 것만을 청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 작업을 나는 지상에서 다 하고 가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였습니다

 

감당할만큼

날이면,

날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통치권안에 있는

나를 여기서부터 말씀의 위엄과 능력으로 작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으사

이사야 선지서의 말씀 그대로 칠 배의 달빛과 

하루 해가 일곱 날의 해를 방불케하는 전능자의 빛으로

매 순간 순간 멈추지 않고 내 구석 구석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 전능자의 빛이 내 심중의 깊은 곳들을 뚫고 들어가노라면 

그저 매사에 참고 견디기만 하느라 내 자아를 꽁꽁 묶어 한번도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한채 구석에 처박아 놓은 것을 비롯하여, 

온갖 양상에 의해 일그러진 또 다른 자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이 아무리 억울하고 불쌍해 보여도 종내는 나란 죄인의 분신이기에 

반드시 죽여야 마땅한 본질상 진노와 저주의 자아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즉시 처단해야 함에도 오래도록 냉혹하게 버려 둔 자아를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풀어 내어 치료해주고 싶은 맘만 간절해 질 때가 있습니다

내 몸이 아플 때 그런 간절함은 극에 도달합니다

그럴 때 나는 영낙없이 모세보다 더한 분노와 혈기로 방자한 입김의 대접을

공기속에 쏟아 붓습니다

쏟지 말아야 할 것들을 쏟아 붓는 격입니다

나로인해 애매한 공기가 더럽히지는 현상입니다

 

허나 그런 실수 연발 속에서도 나는 더욱 더 결심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무리 일찍부터 생매장 당하듯이 비참하게 팽개쳐진 여린 자아들일지라도 

모조리 다 죽일 것을 결심합니다

가장 완벽한 치료는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신과나 상담자들을 찾아 치료를 받아도 무방합니다


허나 내게는 가장 탁월한 처방전을 내미시는 의사 선생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늘 함께 계시니 그분을 신뢰함이 훨씬 쉽습니다

그러나 신뢰한다하여 이내 치료받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죽는게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분명 예수님 공로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입성했으나

아직도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 중의 일부가 요동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를 보며,

나의 속사람은 즐거움과 담력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

지금,

지상에서,

가장,

먼저,

시급하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고해드립니다

 

나의 속사람은 나를 너무나 잘 알아

그 자가 바로 <나>라고 보고해줍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내가 아무리 죽일래도 죽여지지 않는 분노와 혈기 방자한 자아를

긍휼히 여겨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신 품에 안고

죽여주시는 긍휼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도무지 다시 살 수 없는 나를 주님 품 안에서 

예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으로 살려 주시는긍휼함을 받습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육체로 지키느라 수고했다면 이제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말씀)이 내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식을 누립니다


모세의 죽음도 엄밀히 파고들어가면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죽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가 변화산상에 엘리야와 함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일 것입니다

 

율법의 중보자인 모세 곁을 떠나지 않고 수종들었던 시종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죽자마자  여호와께서 그를 찾아 와 말씀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신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경사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말씀을 주시니 불순종의 일곱 두목들이라 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의 일곱족속들을

능히 멸할 수 있는 거룩한 힘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임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할 능력이 없었으나 

예수와 함께 죽임을 당한 후에 얻게 된 새 생명에는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확신케 됩니다  


 나도 율법을 지키지 못해 가나안 입성을 코 앞에 두고

죽임 당했던 모세처럼 반드시 죽어야 마땅한 범법자였습니다

허나 믿음이 온 후로는 약속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와 믿음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여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약속의 땅, 곧 지상에 임한 천국(교회)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업은  해지는데부터 해뜨는 데까지라는 지리적인 언어가 

상징하는 바 대단히 광활한 우주입니다


아무 공로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아

가나안 땅(교회)에 입성하게 된 것을 또 다시 들려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임에도 이리 자주 들려주심은 내 기억이 자꾸 희미해짐으로

인해 연약해지는 심령을 전능자께서 너무나 소상히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