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묵상본문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장21-29
해석도움
율법의 역활
그렇다고 율법의 목표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의"라는 동일한 목표를
위해 부과된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죄가 없었다면 인간은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룰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인간이 핑계할 수 없는 죄인이요 심판 아래 있음을 분명히 하는 기능을
하면서 오직 믿음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구약시대에는 인간이 율법아래 종처럼 매여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기간도 선용하셔서 율법으로 하여금 인간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초등교사와 같은 역활을 하게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속량하시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환히 드러내신 이후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라는 초등교사 아래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가 자기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함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 의식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눈에 예수님처럼 의의 옷을 입은 자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새 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혈통은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실패로 끝나고 믿음이 완성된 상태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이방인들과
비교해 어떠한 우월성도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에는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의 구분도 없게 되었으며 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으면 우리는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또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방기도-모로코 박덕형 정신자 선교사
박 선교사는 태권도 순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통해 맺어진 관계가 복음 안에서 돈독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탁구 렛슨 등 스포츠 사역이 은혜가운데 지속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성경공부 그룹도 인도하고 있는데 이 모임이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선교사 자녀인 다애(15), 재언(14), 다영(11)이의 학업과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세요
기나긴 묵상-
생각하면 모든 종교는 선악간에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르쳐 주어 그 종교를 가진 이로 하여금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와 책임감을 주고 있습니다
무슨 종교를 가졌든지간에 진정한 종교인들이라면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란 이상향을 자기 몸으로
육화시키려는 열정과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법과 도덕성에 탁월한 고등 종교일수록 자기를 희생시키며, 자신의 유익이나 자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하등 종교일수록 종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에 약하며 사회적인 모랄이나 양심적인 도덕관에
있어서도 한없이 희미합니다
대신 그 허술한 자리들을 미신과 기복으로 메꾸어 우리들이 가장 소원하는 복을 줄 수 있다고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질타를 받는 가장 큰 요인은 성문법과 도덕과 윤리에 가장 탁월한 고등 교리적인 종교를 뛰어너머
인간 생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영생의 창조학이라 말해도 여전히 부족한 기독교를 종교화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복과 미신 투성이인 하등 종교로 전락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이 오늘날 살아계셨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다시 역류시킬 것인가?"로 고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울은 가장 숭고한 율법을 지닌 유대교이든 그렇지 않은 이방인의 종교이든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선상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구약 성경(율법)
으로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율법에 한없이 열심이였던 사람이였습니다
허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부터는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의,구원)을 주려 함이라"고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이어 율법 위에 <믿음>을 재차 거론함으로 율법조차 <믿음>의 중요성을 알도록 초등교사 노릇을 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3장23-26
여기서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믿음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고심하게 됩니다
그저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분으로 인간을 그런식으로 만드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믿음장이라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1절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먼 장래의 일인지라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믿도록 역사속에 실상을 주십니다
나아가 공간적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신지라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도록 역사속에 증거도 주십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 첨부터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그의 역사적인 삶속에서 다양한 실상과 증거들을 주셨습니다
임신할 수 없는 부부가 이삭이란 아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아들을 날마다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지며 입술로 입맞추며 살았습니다
그 아들이 허상이였을까요? 실상이였을까요?
나아가 그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고뇌는 잠시였을뿐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실상으로 준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아들을 번제로 드리면 그 분은 능히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릴 것이라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행동을 유발케 만듭니다
허나 이 믿음은 무조건 믿는 믿음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75세부터 120세가 되도록 시마다 때마다 일어나는 삶의 사건들속에 친히 개입하여
당신을 계시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결과로 생긴 믿음입니다
행동이 믿음을 유발케 만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행동하는 믿음을 유발케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그 아이에게 손도 대지 말며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그가 이삭으로부터 집중되었던 눈을 들어 살펴본즉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한 수양을 보게 됩니다
수풀에 뿔이 걸린 한 수양!
아브라함에게 그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그는 이삭대신 하늘로부터 준비된 그 한 수양을 번제로 드리면서
장차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증거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어떠한 것을 증거해주셨냐면 "아브라함이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 보고 기뻐한 것(요한복음8장56)"에
관해 증거해주셨습니
오늘날 우리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유발케 하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인 실상과 증거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믿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도록 수많은 선지자들과 여러가지 기적과 기사와 실상과 증거를 주다 주다 끝내 최종적으로 준
실상과 증거가 있다면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다시 말해 믿음의 본체로 믿음 자체이신 예수님을 역사속에 주신 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3장으로 돌아가 믿음을 묵상함으로 긴 묵상을 바치려합니다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는 말씀속에 믿음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도 내 맘속에서부터 샛별처럼 예수님께서 떠오르기전까지는 율법과 여러 초등교사 아래 매인 바 되어
율법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등교사 밑에서 매도 맞아가며 살았습니다
무지 무지 많이 맞았습니다
왜 그리 유별나게 때리시는지 그 이유를 요즘들어 알 것 같습니다
그 채찍의 고통으로부터 날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해방자 곧 메시야만을 바라 볼 것을 유도케함이였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내 속에도 샛 별처럼 떠올라 내게도 율법의 때가 아닌 메시야의 때가 올 것을 사무치도록 만들기 위함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 종내는 나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첨에는 메시야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이젠 보고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이상 나를 걸핏하면 율법으로 걸고 너머뜨리는 율법의 초등 교사밑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대신 메시야가 직접 보낸 가장 탁월한 우주적인 스승님이신 성령님의 법 아래 머무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법은 율법의 법과는 달리 생명의 법입니다
성령님은 진노와 정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과 초등교사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에
법은 법이로되 생명을 죽이는 법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