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여성의 도전-윤정숙 여성민우회 대표...[여성/복지]
 
-윤정숙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윤정숙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 공동대표(45·서울 종로구 평동·☎02-894-6202)는 인천이 배출한 듬직한 여성운동계 중진의 한 명이다. 굳이 ‘인천이 배출했다’고 하는 것은 윤 대표를 비롯해 인천에서 태어났거나, 인천을 근거로 활동하던 여성운동가들이 여느 지역 여성들보다 중앙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민우회 출범때인 87년 평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지난 2002년 대표 자리에 올랐다. 민우회 15년 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그 기간 민우회가 국내 대표적 여성단체로 자리매김했다면, 윤 대표는 운동권 남편을 뒷바라지하던 아내에서 실력을 갖춘 여성운동가로 변모했다.

“24살에 엄마가 됐죠. 80년대 초, 운동가 남편의 아내로 사는 일은 ‘위험’과 ‘가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죠. 집을 떠나 있는 남편 대신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돌보던 어느 날 ‘나의 삶은 무엇인가’하는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운동가의 아내로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생각에 빠진 거죠.”
그때가 스물아홉. 용기를 냈다. 세상속에 다시 나가 부닥쳐보기로 했다. 어린 아이가 있는, 가계를 책임진 가장이라는 짐이 ‘나’를 찾기위한 욕구를 누를 수는 없었다.

막 출범한 민우회에서 사무직 여성부 일을 맡았다. “밤새워 교재를 읽고 교육과 상담을 해나가며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었죠. 일이 너무 재미있었고 행복했습니다.”  



민우회는 보통여성이 생활속에서 참여하는 대중운동을 모토로 내걸고 창립됐다. 여성운동이 중산층의 여유있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일반적 인식에서 벗어난 혁명적 선언이었다. 여성운동 대모인 이효재씨를 비롯해 한명숙, 이경숙씨 등이 주축이 됐던 민우회는 초기 100명 회원에서 지금은 10개 지부에 회원 1만명을 거느린 조직으로 성장했다.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운동, 사무직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교육·상담, 법정투쟁 지원, 결혼퇴직제 철폐운동 등 그는 회원들과 함께 여성의 권익을 찾고 지위를 높이는 현장에서 뛰었다. 남녀차별에 대한 법정투쟁이나 결혼퇴직제 반대운동 등 몇 년을 끌어 힘들게 결실을 얻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94년 여성민우회 사무국장때는 서울대조교 성희롱 사건 투쟁을 주도했고 여성계의 힘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인천 집과 서울 사무실, 강연 등으로 사방 곳곳을 오가랴, 가정 챙기랴 바쁜 일과의 연속이었지만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는 대학운동권 출신이다. “76년 대학에서 맞은 첫 봄은 세상을 바라보던 내 눈이 360도 바뀐 시기였습니다. 대학내외 동아리에서 수 많은 사회과학서적을 접하며 지금까지와는 너무 다른 세상, 삶의 방식을 보게 된 겁니다. 중산층 자녀로 유복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모범의 전형’이라고 할 정도로 조용하고 얌전했던 딸의 변화에 부모님은 당황해했지만, 딸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아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79년 대학에서 쫓겨난뒤 수배, 도망, 투옥이 연속됐고, 인천 부모님 집에 대한 감시와 미행은 일상화됐다. 더욱이 가난한 운동권 선배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양가는 같은 이유(운동권이라는)로 극심하게 반대를 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좌우 재지않고 하는 성격입니다. 고민은 오래하되 일단 결정하면 고집스럽고 우직하게 한 길을 간다고 할까요. 그러다보니 부모님들도 제 뜻을 꺾지는 못하셨죠.” 딸의 젊은 시절 고뇌와 어려움을 묵묵히 지켜봐오신 때문인지 부모님은 그와 가장 깊은 속이야기를 주고받는다.  
8년여 민우회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 또 한번의 회의가 찾아들었다. 여성운동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내 안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생긴 것. 난데없이 유학을 결심했다. 서툰 영어도, 학비도, 아이를 돌봐야 하는 책임도 큰 부담이었지만, 아버지에게 돈 1천만원을 빌려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신적·이론적으로 나를 충전시킬 필요를 느꼈습니다. 직업운동가로 있다가 유학을 가는 일이 쉽지 않았죠. 온갖 정보를 뒤진 끝에 여성정책학을 개설해놓은 영국 서섹스대학을 택했죠.” 현지에 도착, 하루 두끼 식사에 만족하며 영어공부에 매달린 그는 이듬해 정식으로 대학원에 입학, 원하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나를 성찰한 시기였어요. 삶과 운동·인종·종교의 다양성을 깨닫고, 편견에서 벗어나 생각이 넓어지는 값진 계기였죠. 나이나 결혼여부·학력 등 한국적 고정관념을 버리게 됐고, 사람을 그런 것으로 카테고리화하는 것이 부당함을 알았습니다. 힘있고 아름다운 40대를 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기도 했지만 많이 겸손해지기도 한 시기였습니다. 내 일과 나의 확신·신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죠.” 세계은행이나 유럽연합 같은 국제기구에 진출할 기회가 열려있음에도 불구, 그는 월 90만원을 받는 사무처장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값진 얻음을 국내 여성운동에 쏟아붓고 싶은 애정에서였다. “법·제도상으로 흠잡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 10여년 우리 여성들의 눈물과 땀과 헌신으로 여성운동은 무척 성장했죠. 이제는 생활속에서 바뀌어야 합니다. 성평등·인권이 삶에 뿌리내리고, 가정 학교 사회 모든 공간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지 않는, 남녀노소 다 행복한 사회가 돼야죠. 사실상의 평등과 인권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모든 출발은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나를 바꾸고 생활 속 작은 것을 바꾸다보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죠.”

현장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연구자, 연구하는 운동가가 되기 위해 또 다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윤 대표. 아시아권까지 눈을 넓혀 매춘, 빈곤 등 범 아시아여성문제 해결에 참여하려는 것이 앞으로 꿈이다. <손미경기자> mimi@incheontimes.com

 

 <후배들에게>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을 관리하는 여자가 돼라. 세상이 나에게 준 역할을 뛰어 넘어라. 사회 편견을 넘어 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아라. 강한 인내로 자기 삶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도 인간으로서 권리를 찾아야 한다. 가정폭력 등 반인권적 행위는 어느 공간에서도 있어서는 안된다.

 -결혼은 인생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결혼을 했더라도 절대 일을 놓지 말라. 일과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하다.

 

 <약력>

 ▷인천 인일여고 졸업(76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입학(76년) 및 졸업(84년), 영국 서섹스대학 여성학 석사(97년), 이화여대 박사과정중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직여성부장·사무국장·사무처장(87∼2002년),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2002년∼)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4-24 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