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묵상본문 -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
보다 죽은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 4장6-11)
해석도움-
어찌 옳으냐:
하나님의 말이 통하지 않는 요나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박넝쿨이라는 교보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만든 임시 천막에 박넝쿨이 자라 덮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심히 싫어하고
분노하던 요나가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조금 더 편한 환경에서 시위를 할 수 있었가 때문이었고, 또 자기 원대로 하나님이 굴복당하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곧 벌레를 통해 박넝쿨을 통해 시들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다시 자기를 죽여달라고 불평을 쏟아 붓습니다
자기에게 작은 편의와 성취감을 주는 박넝쿨이 그에게 이만큼이나 소중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4절과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이는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분노가 얼핏 보면 하나님의 정의를 기준으로 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박넝쿨로 인해 분노하는 것과 똑같이 지극히 이기적인 감정에서 나온 분노임을 보여주기 위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죽기까지 성을 내어도 옳다고 주장하는 요나에게 직접 말씀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박넝쿨은 요나가 심지도 키우지도 않은 것입니다
또 아라비아에서 박넝쿨은 원래 금방 무성하게 자라고 또 금방 시들어 버리는 식물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런 박넝쿨이 주는 조그만 편리와 성취감도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향해 11절의 말씀으로 되묻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오늘도 11절의 질문으로 우리에게 개인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인류를 아끼시고, 그들이 회개하여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세계선교의 기초입니다
무슬림풀기-알라는 절대자이다
무슬림은 여섯 가지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경전, 예언자,천사, 마지막 심판의 날과 알라가 정해준
운명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슬림의 이 여섯 가지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어떤 유사한 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보여줍니다
아 중 몇 가지에 대한 이해와 바탕으로 기도할 관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알라와 하나님은 같은 분일까요?
아랍 그리스도인들도 알라로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뭐라 부르느냐보다는 실제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고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슬림의 알라는 많은 면에서 우리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성육신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그런 이해는 무슬림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무슬림들도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생명나무 GT
짧은 묵상-
하나님 마저 자기 중심적으로 형상화시키려는 요나의 집요한 애증을 전향시키려는
하나님의 작업은 실로 창조적입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는 하나님께 삐져 자기만의 초막을 짓고
악인들의 회개함을 보고 용서해 준 니느웨 성임에도 뭔가 다른 이벤트가 나타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었습니다
( 니느웨 성이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내 뜻을 절로 깨닫게 되겠지...라며 접으면 그만이였습니다
허나 하나님의 교육은 하나님의 교실안에 들어 온 학생들 하나 하나에 깊은 뜻을 두고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구원코자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걸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증명시키기 위해 그는 예비하신 구체적인 능력으로 다가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창조주가 아니랄까봐 시위하듯 하시는게 아니라 당신이 택한 요나를 끝까지 사랑하기에
철저히 준비된 사랑의 프로젝트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전엔 큰 풍랑으로,큰 물고기로 다가갔지만
지금은 한 포기 박넝쿨로, 한 마리 벌레로, 한 점의 뜨거운 동풍으로 다가가는 것을 봅니다
오늘 성경엔 하나님께서 (예비하사)라는 언어가 세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비 된 것들이 시각화된 박넝쿨로 나타났을 때 요나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다시 또 벌레와 뜨거운 동풍이 나타나자 요나는 혼미하다 못해 죽는게 낫다합니다
내 삶의 하나 하나가 여호와의 손에서 예비되어 나타난 사건이었을 때 나는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내 머리를 시원케해주는 사건들이 나타났을 때 나 역시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반면 내 머리를 혼미케해주는 사건들이 나타났을 땐 죽기를 사모했을 것입니다
왜 내 앞에 나타나는 사건앞에 그토록 일희일비를 했을까?
생각해보면 수많은 사건의 주체이신 하나님보다는 나타난 사건과 그 사건으로부터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내 자신때문이 아니였을까요?
큰 풍랑과 큰 물고기 사건을 만났을 때 요나는 하나님께 촛점을 두고 자신을 죽이기로 각오했으나
조그마한 박넝쿨과 벌레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음을 오늘 새삼 떠올리며 자잔한 일상속에 나타나는 사건
역시 그 사건을 예비케하신 하나님께 촛점을 두고 생각해보렵니다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나는 사건은 그 사건을 통해 악인의 멸망을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해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여, 요동치는 나의 요나적인 성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뜻에 전적 전향되길 사모하는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