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해라 그러면

가을을 차지하리라 / 유안진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도심의 정오는 아직 폭염의 연장같은데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자니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아스팔트와 철강 시멘트와 유리벽 건물뿐인 어디에 풀벌레가 살고 있었나?

한여름에는 안 들리던 풀벌레 소리가 어김없는 섭리로 들린다

벌레 울음 한 음절에 묻어나는 가을 ! 저절로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뿌연 매연 너머 파란 가을하늘 한 자락이 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진다

가로수 잎새도 초록을 놓아버렸는지 짙푸르지 않다.

 

 

 

 

건물과 건물 사이 쌈지공원 낮은 담벼락을 위감은 담쟁이 몇잎이 붉그레 물드는 중이다

긴 잎자루의 끝에서 부터 붉음이 머뭇대고 있다.

하늘을 쳐다보니 마천루 귀퉁이를 넘어가는 구름 조각들도 무리지어 가고 있다

땅의 것들에서 왜 하늘을 쳐다보게 될까?  목숨이 하늘로 머리둔 까닭인가?

사람과 수목들 모두가 하늘 향해 발돋움해서 일까?

담쟁이를 보는 순간 차량과 인파를 비집고 풀벌레 소리 더 크게 들리는 듯,

수목과 사람 외의 벌레나 짐승들은

하늘로 머리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하늘 섭리를 이고 사는가.

 

 

 

어디든 비집고 생존하는 풀 한 포기의 삶도 사람 못지않게 치열하다

누구의 생존도 치열하지 않을 수 없으리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만,

직업(직장)에서의 생존도 가족간의 생존도, 신을 섬기는 신앙적 사제와 다름없다고들하지

내직장 내 직업이야말도 누구아닌 바로 나 자신에겐

최선의 일터와 천부적 직업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

보이든 안 보이든 끝도 없는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전쟁처럼 치르게 된다는 말이겠지

남의 떡이 더 크고 맛있어 보이듯이, 친구의 직업과 친구의 직장이 더 번듯하고

쉬워 보이지만, 결국에는 직업(직장)이든 가족이든,

현재의 내 것이 나 자신에게는 최고 최선이 된다고 감사하라는 뜻이겠지.

 

 

 

아내(남편)라는 소명, 엄마(아빠)라는 사명도 자신의 사명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지루하고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치러내야 하던가 말이다.

 

폭염 폭우와의 치열한 전쟁을 거쳐서 도달하는 가을하늘이, 찟기고

     벌레구멍 뚫린 담쟁이 잎새 몇 장에 담겨있다. 하늘의 하늘은 땅의 하늘로 내려와 계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