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오랜만에 ‘말씀의 이삭’란을 통해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매주 여러분을 만났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썼던 것이 1999년이니 벌써 13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저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저는 몸이 건강하여 불의의 교통사고로 짧게 병상에 누웠던 적은 있어도 병에 걸려 입원생활을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병원은 저와 상관없는 별도의 공간이며 운이 나쁜 사람들이나 가는 격리된 수용소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새 5년째 투병생활을 하게되었으니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금언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 요즈음입니다.
2008년 여름, 저는 드디어 ‘내 차례’를 맞아 암이라는 병을 선고받고 가톨릭 신자로서 앓고, 가톨릭 신자로서 절망하고,가톨릭 신자로서 기도하고,가톨릭 신자로서 희망을 갖는 혹독한 할례식을 치렀습니다.
저는 이 할례식을 ‘고통의축제’라고 명명하였으며 앞으로 한달동안 ‘말씀의 이삭’란을 통해 아직도 출구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고통의 피정 기간동안느꼈던 기쁨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주보의 지붕 위로 올라가 외치려고 합니다.
저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어 닥친 이 태풍은 다름 아닌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오로가 말한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러분 중에 몸이 약한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가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1코린 11,30)’이라는 말씀을 떠올렸던 것입니다.저에게 있어 암의 선고는 미국작가 N.호손이 쓴 간통한 죄로 ‘A’란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사는 여주인공의 낙인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머리를 깎은 천사와 같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 때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제 귓가에 속삭이셨습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 그 순간 저는 비로소 죄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병원 안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 아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가정 속에서 소중한 우리의 아빠, 엄마, 딸, 아들,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온갖 병으로 스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엄숙한 시간」에서 노래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 (...) /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입니다.우리들이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입니다. 우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울고, 내가 굶주리고, 내가 슬퍼하고, 내가 병으로 십자가를 지고 신음하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바로 우리 곁에서 이렇게 위로하고 계십니다.
“슬퍼하지 마라.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하늘나라가 너의 것이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최인호 베드로님께서 2012년 1월1일에 서울대주교 주보에 발표한 글입니다.
신자로서 작가로서 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이후 세월이 지나 며칠 전 ,선종하시기 전에 얼마나 병의 고통에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병자성사를 마치고 웃음을 지으시며
'감사 합니다'를 연거퍼 신부님께 하셨다는 기사에 저 또한 감사했습니다.
요 며칠동안 그분의 흔적을 찾으며 많은 감동속에 있습니다.
1955년 10살되는 나이에 세상을 품어 주시던 아버지를 잃고,
32년후 1987년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면서 가톨릭에 입문하셨습니다.
한창 활동중이던 42세 작가의 결심이 어느 경지에 있었을지 ..감히 상상해 봅니다.
이제는 천상에서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고 계시겠지요...
지상에 남은 우리는 영혼의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전지 전능하신 분께서 언제 우리를 부르실지 모르는 하늘아래 살고 있습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이 생의 마지막을 이분처럼 준비하고 싶습니다.
엄숙한 시간 - 릴케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방중에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한밤중에 까닭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두고 웃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까닭 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는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옥인 선배님! 안녕하세요
인사가 정말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늘 감동의 글과 사진과 음악을 올려주셔 볼 때마다
쉼을 누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주홀글씨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원의 글씨로 새기기까지
그 분께서 겪으셨을 고통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을 기꺼이 감사로 이웃에게 흘러 보내셨다는
그 분의 흔적을 옥인 선배님을 통해 알게 되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늘 우주적인 주 품안에서 건강하십시요
옥인후배 고마워요.
요즈음 최인호베드로님의 별세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울적했었는데, .......................
1972년대에 "별들의 고향"이 조선일보에 연재 되었을때
제일 먼저 새벽부터 연재소설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곤 하였지요.
"I love you"
"Me too" 웃으며 떠나다.
큰제목의 신문 머리기사를 보았을대 큰별의 떨어짐을 안타까워 했다.
작가로 죽겠다던 다짐처럼 당신은 열심히 사시다 가셨습니다.
죽기전까지도 "말씀의 이삭"코너를 책으로 묶기 위해 정리 중이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님이 오셨다. 이젠 됐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주님 최베드로에게 길이 평안함을 주시옵소서....................
김정화 선배님 오랫만이에요
안녕하시지요?
정말 고인이 가신 후 며칠동안 곳곳에 소개되는 생전의 얘기들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어요.
가족사랑이 참으로 아름답게 비쳐지는 산문집들은 앞으로 구해서 읽으려고 해요.
십 여년 전에 연이어 누님 두 분을 하늘나라로 보내던 심경이라든가,
어머님 돌아가시고 30 여년 후에 어머님의 편지를 읽고 느끼는 아들의 심경..
열살에 돌아가신 아버님에대한 추억..
'가족' 이라는 자전적 소설..
선배님께서 올려주신 내용도 참으로 따스한 모습으로 어른 거립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는데 건강유의 하세요.
반가웠어요.
옥인후배 멀리 빈에서 우리 같이 최베드로의 추모하며......
오늘 조선일보<30일 월>기사 소개 할게요.
유고시 남기고 떠난날....하늘도 울었다.
고최인호 장례미사 열려
'30년 지기 ' 안성기씨가 시 낭송
?장례미사는 정진석추기경이 집전했다.
추기경은 "선생이 병자성사를 마치고 활짝 웃으면서 하신 말씀은
"감사합니다"였다면서
"감사합니다는 반대로 우리가 선생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의 글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휴식이었고, 힘이었고 감동이었다"고 추모했다.
고인이 남긴 유고시
?먼지가 일어 난다.
살아난다.
당신은 나의 먼지
먼지가 일어 난다.
살아야하겠다.
나는 생명, 출렁인다.
<9월10일 오전7시 15분 병상에서>
구술한것을 부인이 받아 적은 글
투병기간 내내 그는 환자가 아니라 작가로서 죽겠다고 다짐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70년대 말에 최인호 선생이 월간 샘터에 연재하던 소설 '가족'을 매달 교정보고 편집하는 일을 하면서 처음 선생을 만나던 때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찌 인생이라는 시간은 이리 빠르고, 선생마저 이렇게 죽음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게 하는 것인가.
최인호 선생은 꼭 원고 마감 직전에 원고를 보내셨는데, 원고가 들어오면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난필로 유명한 선생의 글씨를 한 자 한 자 알아보고 다시 썼으며, 바쁘면 입으로 소리 내어 내게 대필시키기도 했다.
소설 '가족'의 최초 독자인 나는 늘 선생의 아드님인 도단이와 따님인 다혜와 함께 사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선생은 가족의 일상사를 세세하게 끄집어내어 글을 썼다. 일상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 내느냐 하는 것이 글쓰기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상의 삶 속에 진정 문학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선생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사랑은 시작된다는 것 또한 내겐 큰 가르침이었다.
선생은 후배들에 대해 사랑이 많으셨다. 내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을 때는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소설이 당선되었다니, 정말 축하해. 열심히 써. 이제 넌 내 후배야. 시인이 소설가가 되려면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어."
선생의 말씀과는 달리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때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가 직접 내게 축하 전화를 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최인호 선생은 이제 김수환 추기경의 품에 안겨 그동안 참 많이 아팠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법정 스님과 찻상을 마주하고 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작설차 한잔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슬며시 어느 술집에 들러 '별들의 고향'의 경아와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이런저런 이승의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라도 한잔하고 있을지 모른다.
최인호 선생님! 이제 그곳에서 '길 없는 길'을 찾으셨는지요.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하고 껄껄껄 호방하게 그 유머 넘치는 웃음을 다시 터뜨리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어쩌면 선생님이 가신 천국이야말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일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작은 나무 책상 하나 마련하셔서 천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죄다 소설로 써서 보내 주세요. 그러면 이곳 출판사들이 분명 다투어 출간해 드릴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선생님을 떠나보낸 그 많은 독자들이 더이상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글에서 최인호 베드로님을 추억하는 가까움을 느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