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고인은 1970년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작가였다. 세련된 문체로 '도시 문학'의 지평을 넓히며 그 가능성을 탐색, 황석영·조세희와는 또 다른 색깔로 1970년대를 평정했다. 절정의 역량, 보기 드문 대중성을 과시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한편 유족으로는 아내 황정숙씨와 딸 다혜씨, 아들 도단씨가 있다. 장례식장은 서울 성모병원에 차려졌다. 장례미사는 오는 28일 오전 9시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경기 분당 메모리얼파크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별들의 고향' 최인호 등단 50주년에 암으로 별세(종합)
소설 '고래사냥' 등 잇단 히트작…2008년 침샘암 발병 투병 중에도 소설·산문집 등 꾸준한 집필 활동연합뉴스 입력 2013.09.25 21:14 수정 2013.09.25 21:50
소설 '고래사냥' 등 잇단 히트작…2008년 침샘암 발병
투병 중에도 소설·산문집 등 꾸준한 집필 활동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소설가 최인호 씨가 25일 오후 7시2분 별세했다. 향년 68세.
암 투병 중이던 고인은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서울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은 소설 '별들의 고향'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겨울나그네' 등을 잇달아 펴내며 1970년대부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이 가운데 많은 작품이 영화와 TV 드라마로 제작돼 큰 인기를 모았다.
고인은 사상계 신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차례로 받으며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양쪽에서 두루 평가받았다.
'잘 나가는 작가'로 성공을 거둔 그는 80년대 중반쯤 가톨릭에 귀의했다.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황폐해지는 내면이 고인을 종교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고인은 '잃어버린 왕국'과 '길 없는 길' '상도' '해신' 등 역사와 종교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내놨다
이후 2008년 침샘 부근에 암이 발병해 수술받고 치료받는 등 개인적으로 시련을 겪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히 작품을 집필해 2011년에는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냈다.
투병 중에도 묵상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비롯해 '최인호의 인연' '천국에서 온 편지' 등을 낼 만큼 집필과 출간을 꾸준히 했다.
고인은 2004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글 쓰는 일이 즐겁다. 앞으로 적어도 10년간은 무지막지하게 쓸 계획"이라고 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고 그 사이 암 투병이라는 '복병'을 만나기는 했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를 통해 암 투병 사실을 밝힌 작가는 지난해 7월부터 주보에 글을 다시 연재하기도 했다.
올해도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연재 글 등을 묶어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을 펴냈다. 산문집에는 암투병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후 착잡했던 마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에 대한 기억 등이 솔직하게 실렸다.
고인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지방으로 피정을 다니며 글을 쓰는 등 호전된 건강상태를 보여왔지만 결국 등단 50주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nari@yna.co.kr
(끝)
2012년 7월 8일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최인호 베드로┃작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62년 전이었던 1950년 7월.
우리 가족은 출애굽(出埃及)을 단행하였습니다.
모세였던 엄마의 지휘 하에 큰 누이를 비롯한 여섯 가족은
숨어 지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서 청계산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다섯 살의 어린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해 떠난 출애굽처럼
불과 며칠 동안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40년의 고난과 맞먹을 수 있는
그 숨 막히는 탈출과정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것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아니었지만,
다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마흔 살초반의 엄마가 스무 살의 다 큰 처녀에서부터
이제 겨우 두 살의 젖먹이까지 거느리고 나룻배를 구해 도강에 성공한 것은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펼쳐 물을 가른’모세의 기적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강을 건너자 짐을 실은 수레바퀴는 모래사장에 빠져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섯 살의 저까지 수레에 달라붙어 온 가족이 비 오는 모래밭을 간신히 벗어나자 곧 어둠이 내렸습니다.
피난 가고 없는 빈집에서 엄마는 우리를 위해 밥을 짓고 모기장을 쳤습니다.
하룻밤 잔 곳은 누에를 기르던 양잠실이었는데,
사방에 누에가 죽어있어 싸락눈이 내린듯하였고, 비릿한 냄새가 났습니다.
밤새도록 쌕쌕이 소리가 나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쿠앙쿠앙 폭음소리가 나도
저는 내일이면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켄터키 옛집의 검둥이처럼 마루를 구르며 세상모르고 잤습니다.
다음날 일찍 아버지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아아, 그무덥던 긴 여름날.
햇살은 눈부셨고 길은 가도 가도 끝없이 옥양목의 빨래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더위를 먹어 배는 남산만큼 튀어나왔고 머리에는 헌데가 나서 견딜 수없이 아팠지만
저는 뒤뚱뒤뚱 오뚝이처럼 걸었습니다.
한고개를 넘으면 엄마가 말했습니다.
"저 고개만 넘으면 아버지가 있다.”
이 말 한마디면 다섯 살의 어린이였지만 저는 벌떡벌떡 일어섰습니다.
아빠를 만날 수 있는데 더위쯤 대수랴.
물렀거라, 대갈장군(어릴 적의 제 별명입니다.) 나가신다.
훠이훠이 물렀거라. 골목대장 나가신다.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법조인의 신분을 숨기고 전란을 피해 미리 피난 와
수염을 기르고 밀짚모자를 쓴 농군 모습의 아빠가
성황당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미친 듯이 뛰어나와 맞아주던 모습을.
저를 헹가래 쳐서하늘에 번쩍 들어 올렸다가 부둥켜안던 그 우주와 같던품속을.
그렇게 우리 가족의 출애굽은 끝이 났고 그해 여름 한철을 청계산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요즈음 저의 화두는 바로 이 다섯 살 때의 기억입니다.
저는 그때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 하나로 무더위와 부스럼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도없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고개 하나 넘으면 아빠가 있다는 말 한마디만이 생명이요, 힘이요, 구원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고갯길 저 너머에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저보다 더 저를 사랑하시는 영혼의 하느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순일곱의 어른인 저는
다섯 살의 어릴 때보다 더큰 두려움과 고통과 불안과 미혹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18,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순일곱의 저는 훨씬 지혜롭고 똑똑해졌을지는 모르지만
다섯 살의 철부지였던 그때의 저보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오니
주님, 저를 다시 한 번 물과 성령으로 단순하고 순진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비나이다. 아멘.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
윗글은 작년 7월에 제가 마지막으로 최인호 작가님의 글을 읽었던 것을 옮겨왔습니다.
이제는 실제의 모습과 새로운 글을 만나지 못하지만
고인이 남긴글을 통해 항상 만나기를 바랍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편찬에 즈음하여....
교보문고 북뉴스 - 최인호,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열정은 불타올랐다."
"나는 이 작품을 평생 동안 스승이자 벗이자 수호신인,
사랑하는 나의 아내 황정숙 아나스타샤에게 바칩니다."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
단편 '벽 구멍으로'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1972년 [별들의 고향] 조선일보 연재 최연소 신문 연재 소설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
글쓰기를 멈출 줄 모르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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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을 바꾸었습니다.
처음 위에 올린 음악이 너무 슬프게 들려서요.
( 더 듣기 원하시면 지금 들리는 동영상을 멈추게 하고 윗 처름 동영상을 키세요)
오늘은 호세 카레라스가 부르는 소망이 깃들인 헨델 작곡 "Ombra mai fu'곡입니다.
"Ombra mai fu" is the opening aria from the 1738 opera Serse by George Frideric Handel.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중에서
'그리운 나무그늘이여'( 옴브라 마이푸)의 가사입니다.
흔히 기악곡에서는 라르고(Largo) 로 불려지고 있지요..
The title translates from the Italian as "Never was a shade".
It is sung by the main character, Xerxes I of Persia, admiring the shade of a plane tree.
Frondi tenere e belle | Tender and beautiful fronds |
나뭇잎이여 부드럽고 아름답구나
나의 사랑스런 플라타나스 나무의 나뭇잎
너희에게 운명이 미소짓게 하자
천둥, 번개, 그리고 폭풍우가
결코 방해하지 않으리 너희들의 사랑스런 평화를
부는 바람도 너희들을 더럽히지 않으리
이러한 나무의 그늘이
결코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네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더 부드러운.
..................................
이젠 천상에서
지상의 우리에게 '그리운 나무 그늘'이 되어 주실 작가님에게 헌정합니다.
선생을 선망하던 여고시절
어느 평론가가 예견한 短命,
보란 듯 뜨겁게 사신 분…
최인호 베드로 형제님. 저녁장을 보다가 선생의
선종(善終)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두망찰한 가운데 문득 마트를 채운 사람들의 활기가, 일용의 먹거리들이 담긴 장바구니가, 살아가기 위한 나날의
노역과 노력이 퍽 낯설게 보였습니다. 가던 길이 뚝 끊긴 것 같은 당혹스러움은,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이었을까요? 여러 해 전, 선생의 발병
소식을 전해 듣고 그저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선생의 책을 사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평생을 성실한 작가로 살아온 분에 대한 경의와 애정,
선생이 겪고 있을 병고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저 나름의 방식이었지요. 세상과의 불화, 자신과의
불화로 앙앙불락하던 청소년 시절, 선생을 처음 알았던 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청춘이란 원래 그러한 것인지 어쩌다 명동이나 광화문쯤에서 우연히
부딪히기도 했던 선생 역시 저처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불만과 냉소로 늘 찌푸린 얼굴이어서 지나치고 나면 혼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지요. 여고
시절, 친구의 형이기도 한 선생은 화려하고 조숙한 재능의 소년 문사였고, 이후 문단의 무서운 신예로, 장안의 이목과 화제를 집중시키며 사랑을 받는
국민적 작가로, 진실한 신앙인으로의 생애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의 젊은 시절, 발표되는
편편이 강한 폭발력으로 문단을 흔들던 소설들을 주시하면서 어느 평론가는 선생의 생물학적 단명(短命)을 우려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그
앞에서는 모자를 벗을 수밖에 없는 천재성, 뛰어난 재능이란 일종의 금기(禁忌)이기도 한 것. 그 비극적 숙명에 대한 두려움이었겠지요. 그러나 선생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평생 뜨겁게 작가의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추악하지만 아름답고 야비하지만 거룩한' 생과
인간에 대한 사랑, 긍정과 희망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그가 남긴 것의
총화라고 하지요. 작가로서의 50년 세월, 선생은 100권이 넘는 책을 썼고 선생의 붓은 지금, 이곳으로부터 수백년, 천년의 시공간을 아우르고
경계를 지음 없이 광활하게 펼쳐졌습니다. 선생이 일궈낸 그 세계에서 저마다의 길을 따라 살고 사랑하고 죽어간 사람들은 또 얼마인지요.
이태 전 초여름으로 접어들던
어느 날 선생은 종아리가 드러나는 반바지에 운동화, 긴 팔 셔츠에 모직 목도리를 두르고 털모자를 쓴 좀 이상스러운 패션으로 함명춘 시인과 함께
저희 집에 오셨더랬지요. 많이 수척해지셨지만 선생 특유의 솔직 담백함과 유쾌함은 여전한 '러키보이'였습니다. 그날, 선생은 빨리 병이 낫고 저는
근사한 연애 소설 한편 완성하여 단풍놀이, 꽃구경, 달마중 가자고 약속했었지요.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천년을 산다 해도 만년을 산다 해도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의 신비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겠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다 달리고 우리 앞에
놓인 책장을 다 넘기고 우리에게 주어진 잔을 다 비운 후에도 정다운 마음에 깃든 이야기는 살아 있는 법. 제게 문학과 신앙의 길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우리의 일과 사랑이 바로 기도임을, 그 귀한 비밀을 알려주신 베드로 형제님. 주님의 평화 안에서 편히 쉬소서.???
오정희씨
?아침에 메일 체크를 하는데 무언가 휘--익 하고 지나가는데
최.인.호 . 별. 세...
도저히 기사를 볼 엄두가 나지않아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얼마전 인연이라는 책을 보면서 엿장수 하느님 하면서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젖어오네요
최인호 베드로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