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제비 한 쌍 (雙燕).........수묵화.....1981년
"당신 도대체 뭐 하는거요?"
"으응~ 저 말이지요 오늘 한번만 당신이 날 좀 봐줘요 며칠전 당신도 보시고
감탄해 마지않던 우관중화백의 책이 와서 보고있는데 그냥 오늘은 책만 보고싶은데
그러면 안되나요...."
그렇게 때도 걸러가며 하루 밤을 밝혀가며 우관중의 그림과 글이 실린 책을 읽었다.
도저히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눈이 피로해도 읽지않으면 안되어서였다.
실로 오랜만에 밤을 홀딱 밝혔는데 피곤은해도 행복한 마음이였다.
오래전 다 타버려 재가 되버렸다고 생각던 내게 아직도 불꽃이 꺼지지않고 남아있는가!
누군가가 "건강해서 할 수 있지요"그리 말해주었었다.
아직은 버티어 주는 건강에 내 스스로에게 감사하게된다.
제목의 주제 "제비 한 쌍"은 제목도 모르고 보면서 그림이 아늑함과 편안함을 안겨줌에
한참을 그림속에 머물러 보던 그림이다.
알고보니 우관중화백 자신이 대표작으로 꼽은 작품이란다.
한폭의 그림과 한편의 산문시를 읽어 내려가는것 같았다.
역시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170만자 정도의 문장을 실은 우관중 전집이 발표되었단다.
책의 머리말에서 그가 그토록 글을 많이 쓴 깊은 뜻을 알게되었는데 발췌해서 올려본다.
[시화의 결합은 중국이 가진 독특한 전통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예술은 음악을 지향한다고 주장했다.
바꿔 말하면,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리듬과 균형으로 '추상적 음악'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음악이 아닌 '시'인데, 예술의 맹주가 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 사 흥망성쇠가 변화무쌍하다. 나는 인민의 감정 속에 감춰진 생생하고도
진정한 예술을 찾기 위해, 형식과 예술 사이를 방황하며 싸워왔다.
나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각기 그 성격이 뚜렷한 '두상'들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화접목과 이산도해는 내가 자주 사용하는 창작기법으로, 약동하는 마음 속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형상을 이용해 표현하는 것이 힘들 때에는 종종 언어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마음속 영감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급한 마음에 재빠르게 스케치로 옮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고 했던가
우관중화백의 글을 읽고나니 그림이 더 보인다
혹자는 그림은 그냥 보고싶은데로 보면 된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말도 맞긴 하겠지만 그림의 이야기를 설명 받으면 더 가깝게 이해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왕 대문으로 나왔으니 우관중화백의 그림들을 올려봅니다.
은희언니 덕분에 무식한 제가 공부 많이 합니다.
댓글은 쓰고 싶어도 이렇게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좀 챙피해서리....................................ㅎㅎㅎ
근데 혜경언니의 폭 넓은 박식함이야 이미 제쳐둔 거지만 산학이도 정말 박학다식의 표상 같다.
암튼 대단한 인일이에요.
은희 언니의 밤을 꼬박 새우실 수 있는 그 열정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진짜 멋져부려~~~~~~~~~~~~~~~~~~~~~~~~~
명옥이가 너무 겸손한거 아닌감~!
나도 모르니까 그냥 보아서 관심이 가면 찾아보게 되는거지
명옥인 음악에서도 피아노전공이고 육십중반에도 꾸준히 활동하니
그처럼 멋진 일이 어디 있겠나 싶은데말야.
난 희순이한테도 방금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꿈꿔왔던 일을 훌륭하게 이룬 예술인들의 작품을 보고 듣고 읽는 걸로
대리만족을 느끼고 행복한 시간을 갖을 수 있으니 많이 감사하는 마음이야.
희순이처럼 "잠이 부족하면 암에 걸린다고 하더라" 하고
걱정과 조언을 해주는 친구가 있어 고맙고 해요.
명옥아 고마워...............
유명옥 선배님!
김은희 선배님은 지금도 밤을 꼬딱 새우며 책에 빠져 사시고
김혜경 선배님은 지금도 대학에 적을 두고 다니실 정도로 학구열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저는 그냥 들은 풍월로 아는 척을 하는 좀 뻔뻔하다 할 수 있겠네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부는 왜 그렇게 하기가 싫을까요?
심지어 노래교실도 다녀 본 적이 없으니 말 해 무엇할까요?
5기의 임경선 선배님도 논어도 배우고 플룻도 배우고 클라식음악도 정기적으로 공부하고있잖아요.
유명옥 선배님은 피아노로 일가를 이루셨고요.
선배님들 이력만 나오면 제 어깨가 다 으쓱거립니다.
암튼 대단한 인일이예요.
타이후의 거위 떼 (유화) 1974년
우관중화백의 작품들중에 프랑스유학 시절에 수학하고 그린 그림들중
문화혁명당시에 파괴되어 사라진 유화작품들이 궁금한데
대신 70년대에 그린 유화중 몇점을 올려 보려고 합니다.
그가 움직이는 생명체를 그리는데 얼마나 섬세한 마음을 쓰며 작품을 대했는지를
이 거위떼를 그리는 과정을 묘사한 글을 읽고 옮겨보려합니다.
우관중화백이 송대 유명화가 이공린의 작품속 인물과 마필의 정교함이 살아있는듯 생생하다 하면서도
말이 무리지어 있는 그림은 쥐떼에 가깝다고 하면서
개체의 형태는 중시하면서 그 개체가 이루는 전체적 형상의 효과는 간과했다고 평을 했읍니다.
중국전통화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
눈앞의 타이후 거위 떼를 바라본다. 새하얀 생명체들이 수면 위에서 첨벙거리니
출렁거리는 고깃배 위에서 나는 비틀비틀 그림을 그린다.
호수와 산이 모두 춤을 추고 자유로이 노래 부르는 듯하다 . 흥분된 마음으로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겨우 거위 한 마리를 붙잡아 재빨리 스케치하였다. 비록 세세한 묘사는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은빛 수면 위 새하얀 거위 무리의 집산과 충돌, 그리고 추상적 운치를 포착 할 수 있었다.
검은색 고깃배는 작품 속에서 색채의 균형을 맞추며 안정감을 주는 지레이자 저울추이다.
붉은색의 부리는 흰색 거위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대충 찍은
듯해도 사실 매우 조심스럽게 붓을 놀린 부분이다. 그림이 완성되었을때 나는 마치 해발 3000미터 고봉을 한 번에
올라간 듯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이런한 작가의 고생스러운 긴장감은 관람객들에게 유쾌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으리라.
.............................................옮겨옴....................................
저 멀리 화면의 흰점이 뭉쳐진 듯 보이는 거위떼들과 배의 모습들
얼마나 많은 숫자의 거위 무리들인지 넓은 나라 대국이지만
우관중화백의 그림만 보아도 대단합니다..............그림속의 거위떼의 움직임이............
은희언니~
요즘도 밤을 새워 책을 읽는 언니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나이 드는것의 슬픔중 하나가 희노애락의 감정이 약해지고 열정이 식는다는 것인데 언니를 보니 저절로 기운이 나네요.
저도 예전엔 그림이 좋아서 화랑의 잡지를 몇년씩 구독해서 읽고는 했는데 ~애들 유치원때니 까마득~
두어해전에 했던 샤갈전도 언니가 홈피에서 미리 공부시킨 덕분에 가서 보니 훨씬 이해가 쉽더라구요.
제비 한쌍이라는 그림은 정말 마음의 때가 닦이는듯 고요하고 차분해지네요.
그리고 수수를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을까요?
지금 차마시며 음악 들으며 그림 감상하니 얼마나 좋은지요~
선배 언니 잘둬서 호강하네요.
화림이도 그랬구나..........
그래 나도 삼십대 때에 아이들 유치원가고 할때 대학때 제대로 못한
그림공부 개봉동에서 청와대 근처인 누하동으로 대학대
스승님(청전이상범화백의 아드님이셔)께 삼년 좀 넘게 다녔었지.
그러나 그때의 열정은 아이들 키우는데로 돌아서야했지만
화림이 말대로 옛일이 되어 까마득하다........
그림 그리는 일은말이지.
이제는 그래도 대가들의 그림을 찾아보며 대리만족하니 그것도 감사한일이지뭐냐
화림이가 그림에 관심이 있다니 더 더욱 열심히 올려볼게.
오늘도 산이 재우고 세시간동안 중국싸이트에 찾아들어가 한문해석해 가면서
그림 잔뜩 삼백여점이나 실어왔네.
세시간이나 걸렸어요.......... 그러다보니 새벽 두시가 되어오네그려....ㅎㅎㅎ
다른 블로그에는 없는 그림들 가져오니 뿌듯해요.
구입한 책에 그림이 많이 안 실려서 아쉬웠는데 그나마 그 책에
실린 그림도 찾기가 어려웠는데 오늘 드디어 몽땅 찾아냈어요.
........"?구하라 그러면 얻을것이니라"
?우관중 화백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보게하려고 기증을 많이하고
돌아가시는 날도 그림을 아들시켜 기증했다니 이렇게
내가 가져다 여러 사람들이 보게 하는일도 좋아하시겠지.
푸춘강의 고깃배 (유화) 1963년
우관중화백이 1947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마치고 귀국한 해가 1950년이고
문화대혁명기간인 1966년 부터 삼년간 그이후 십년
1966년 그이전도 중국이 불안한 시기였으니 그림그리는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가는 미루어 짐작이간다.
육십년대엔 좌경사상에 위배가 안되는 그림을 그리자니 풍경화를
그렸다는 글을 읽은듯도 하다.
우화백의 육십년대의 그림의 관한글을 실어봅니다.
...............................................................................
60년대, 나는 유화로 강남지역을 그리곤 했다. 하얀 담장, 검은 기와,
서로 얽혀 있는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봄기운 자욱한 이곳 경치는
결코 서양 유화작품 속에서 찾을 수 없는 풍경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
......................중략....................
서양화법으로 중국적 소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중국의 "기운생동"에
서양의 추상적 표현기법을 융합하고자, 민간공예의 심미관과 현대 서양의 과장,
자유분방함을 결합하고자 해외 중국화가들은 국외에서 작업하고있다.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이 유화와 캔버스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서양예술의 식민지라고 할 수는 없다......................중략............
...................퍼옴..................................................
어느 나라이든 전통과 새로운것의 충돌은 꼭 생기기 마련이지 않을까
불협화음이 아닌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긍정적인 결과로 나온다면
예술의 혼혈이 무슨 죽고 살 문제가 되랴~!
이렇게 멋진 그림으로 탄생되는데 말이다.
쟈스룬부사(유화) 1961년
티베트에 평화를 위해 중국화가 세명이 뽑혀 가는중에 참가해 라싸에 5,6개월
머무르며 그린 쟈스룬부사 전경 그림이다.
그곳에 가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복권에 당첨된 이상으로 기뻤다고 한다.
우관중화백의 잘 알려진 작품들은 관심있는 미술애호가들에겐
많이 알려져있다.
나는 전통중국화를 그리던 그가 프랑스 유학시절이나 유학후 그린 그림이 매우 궁금했다.
47년도에 떠난 유학생활 1919년생이니 그의 나이 28세 약관의 나이가 지나 이립의 나이도 안된
청년이 사회주의국가 중국에서 유럽의 예술세계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는
짐작만 들을 뿐 작품은 어떻게 표현되었을지 궁금했는데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드디어 중국싸이트로 어찌어찌 찾아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온 50년에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2010년도에 세상을 등지는 그 시점까지도 붓을 놓지않았다고 한다.
확실한 우관중 예술세계가 확립된후에 그림이 어느 과정을 지나 이루어졌는지를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어 흥분되었었다.
어제는 그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집 산이할아버지 왈 " 뭐니 뭐니 해도 당신은
건강한 사람이야 " 야단은 안 치고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내게 응원겸 독려를 해준다
결명자와 구기자를 다린 물을 권하고 가시오가피 두충등을 다린물을 가져다준다.
아침겸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다시 장마가 시작된 충충한 날씨에 평화로운 휴일 달콤한 시간이다.
손주들 식구들이 가고나니 한적한 이곳 수안산방에서.................
우관중화백의 대형 작품전시회의 실제의 작품면모를 사진속에서나마
느껴보게됩니다.
책속에 그림 몇점도 보이는군요.
스케치하는 모습
우관중화백의 초상화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지요)
김은희 선배님!
당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너무 좋아해 3000여점을 수집하였으나
단 한가지를 손에 넣지 못하자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에는 손에 넣고
죽을 때는 그 작품을 관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은
여러명의 서예가를 시켜 똑같이 쓰라한 것들이 남겨진 것이라고요.
왕희지의 진품은 지금도 관 속에 남아 있을까요?
당 태종이 왕희지를 알아볼 정도로 예술가적 안목이 대단하였으니 양귀비같은 미인을 총애할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그리고 올려주신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저는 아무래도
프랑스 유학 후의 작품에 마음이 더 가네요.
그러니 당연히 문화혁명 후의 작품은 더 기가 막히겠지요?
우관중 화백의 살아온 자취를 조금 엿보니 돈과 작품성의 연관도 흥미를 끕니다.
산학아~!
내가 좀 그림이야기나 문학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말이 많다 ....그렇치~!!!...ㅎㅎㅎ
얼마나 지겨웠을까나......전화 끊고 ...후회해요.
늙으면 조용해져야 한다는데 말야.
미국서 친구가 오늘 잘 보고있노라 응원에 전화를 해주고
오늘은 더 많이 고무된 상태야.......ㅎㅎㅎ
우관중화백의 확고한 예술관 인생관이 그림과 함께 더 큰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는 글이 있어 올려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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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관중 화백은 자유분방한 화풍(畵風)과 뛰여난 성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굽힐줄 모르는 고집과 예리한 말투로도 논쟁의 대상 이였습니다. 지난 세기 90년대,
당시 화단(畵壇)이 추구하고 있던 옛그림 모사풍과 고화(古畵) 필묵·격식의 답습 등에 대해
우관중 화백은 <필묵은 전무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비판했었는데
이 때문에 미술계는 설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오화백은 기자의 취재를 받은 자리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이런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회화의 기법에는 일정함이 없습니다. 회화 또는 예술에는 기법이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있다면 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감정만 표현할 수 있으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무관합니다.
필묵도 마찬가지입니다. 필묵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어떤 감정인가에 따라 필묵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어떤 필묵이 사용되든 감정만 잘 표현되고 효과만 좋다면 모두 좋은 필묵입니다.
반대로 답습만하고 옛 것을 그냥 베끼기만 하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허위를 늘여놓으면 바로 필묵이 전무한 것입니다."
우관중 화백은 몸매가 왜소하고 생활도 소박한 편입니다.
그래서 일찍 우산을 수리하는 노인네로 오해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는 90세의 고령까지도 정열적인 창작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관중 화백은 늘 가난만 두려워하지 않으면 헌신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성품이 유지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생전 인터뷰 내용입니다.
"이런 성품은 첫째,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활에 대한 요구를 낮출 수 만 있다면 최대한 생활에 대한 요구를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예술에 투자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헌신적 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관중 화백의 그림은 국제 예술시장에서 거래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또 생존 화가의 최고가도 끊임없이 갱신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관중 회백은 항상 "나의 작품은 가정의 유산"이 아니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최상의 작품을 여러 국립 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알려진데 의하면 우관중 화백은 타계 몇 시간 전까지도 작품 기증에 관여 했다고 합니다.
별세 당일 낮, 그의 아들 우가우(吳可雨)는 우관중 화백을 대신해 홍콩예술관에 다섯 점의 작품을 기증했는데
그중 4점은 올해 갓 창작한 신작 이였습니다.
.............................................
자기가 모처에 기증한 작품이 경매에 나가 이백억이 넘게 팔려나가도
담담하게 자기작품이 그렇게 돌고있다고 하더라고..........말하는 모습에
할말을 잃게 되더라..........
대단하신 은희 언니
우관중 화백에 완전히 심취 하셨네요.
밤샘 수고 하시는 덕분에 공짜로 즐깁니다 ㅎㅎㅎ
전시회장을 보니 작품의 크기가 쉽게 가늠이 되요.
어느 전시장이에요?
천정에서 내려 비치는 라이팅이 독특해요
과감이 스타일을 바꿔가가는 과정이 산학 후배 말 처렴
정말 동양의 피카소 입니다.
이젠 주무시면서 천천히 하세요.
?내가 출타도 드물고 그림을 끄적이기엔 실력이 딸리고
좀 해보면 마음에 안들고 그렇다고 우두커니 있자니 갑갑하고
혜경이가 어느때는 부럽기도 하지.........
카메라 서껀 장비가 무겁지만 대상을 찾아 사진을 완성하고
무언가 열중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일이라고 봐요
종종 서양화에 매력에 빠지기도 하고 했지만
모처럼 동양쪽 현대화가들을 만나보니 소일꺼리가 생겨서 재미가 있어요.
중국에서 수입한 우관중화집 아홉권은 한자와 영어로 되어있다해서 머뭇거리게 되는데
문고에는 없어 좀 미리 살펴볼 수가 없기도하고
우선 번역본 한권이 있다해서 구입해서 읽었어요.
워낙 글솜씨도 좋아서 중국에선 산문집도 여러권 나왔다고 해요.
그림도 좋지만 읽다보니 아침 이더라구요.....ㅎㅎㅎ
그가 2010년에 돌아가고난뒤 2년뒤에 기념전시실도 만들고 전시회도 열고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고 대대적으로 행사를 치루는 사진속에서
전시하는 사진만 집어왔지요.
한문으로 "三??冠中作品展?" 이라고 사진밑에 써있는걸 보면
중국 인건 분명한데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문화대혁명때 공산주의혁명에 숙청대상(쓸때없는 지식인에 속한다고 했다네요) 이여서
가족이 아들세명하고 아내서껀 모두 뿔뿔이 강제노동을 삼년넘게 했고 대혁명이 끝나도록
십년동안 희생이 굉장했어서 그 고비를 넘기며 삶의 단계를 뛰어넘은 분이시더라구요.
그 고비에서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은 그림에 대한 열정이
존경하기에도 모자라단 생각이 들어요.
동문들에게 이런 화가 작품을 보았노라 알려주고싶은 마음에 올리고 있어요
우선 내가 산학이 말대로 풍덩 빠져서 있어요...........ㅎㅎㅎ
혜경이 말대로 한 호흡 쉬고 해야지요.
1957년도 작품들입니다.
作品名?:?迅故? ?作年代:1957年作 作品尺寸:46*61cm 点??看?情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인가 .........한동안 정전이 되는 바람에
쓰고있던 글과 그림이 날라가 버렸네요. 어찌어찌 비상수단으로 전기를 끌어오고
아직 우리집 지하수의 엔진은 가동이 안되는 상태이지요. 장마가 워낙 길어서 말이지요.
그림으로 돌아가서 루쉰고향(우화백이 존경하는 루쉰고향을 그린 그림입니다)의
평화스런 모습입니다. 1957년도에 정경이지요.
作品名?:江南?? ?作年代:1957年作 作品尺寸:29*38cm 点??看?情
作品名?:山? ?作年代:1957年作 作品尺寸:49*35cm 点??看?情
꿩을 중국에서는 산학이라고 하는군요
点??看?情 라는 한문을 클릭하면 더 자세하게 볼 수가 있읍니다.
처음엔 이 한문의 뜻이 무엇인지 헷갈렸는데 이제서야 확실하게 알았읍니다.
우관중화백의 그림의 기초가 되었던 전통중국화기법과 서양화기법의 절묘한 기법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作品名?:?? ?作年代:1958年作 作品尺寸:61*46cm 点??看?情
作品名?:山西?牧? ?作年代:1958年作 作品尺寸:29*38cm 点??看?情
作品名?:北京百?大? ?作年代:1958年作 作品尺寸:28*38cm 点??看?情
作品名?:人?年?(向日葵)
?作年代:1959年作 作品尺寸:100*60cm
点??看?情

作品名?:?果 (열매)
?作年代:1974年作 作品尺寸:74*46cm
点??看?情
(고갱그림 전시회에 다녀와서 해바라기의 관한 글을 올려보렵니다.)
우관중 화백의 작품의 관한 산문중 내겐 가장 감명깊게 읽은 글중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글이라 옮겨 봅니다.
..................................
프랑스 조각가 마일로는 "원"을 이용해 인체에 대한 큰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무덤 앞에 있는<밀답흉노> 상은 "사각형"을 이용하여 과장을 통해 미를 표현하였다.
린펑민의 화면은 최대의 확장과 엄격한 축소를 추구하고 있다.
..........................(이름이 거론된 예술가들을 찾아가 보면 이해가 빠르더라구요)........
중략.....................
반고흐는 쉬지 않고 해바라기를 그렸다. 당시 그는 "노란색은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라고
하였는데 고흐에게 노란색은 거의 종교적 신앙이었다.
그에게 노란색은 태양의 빛이자 빛과 열의 상징이었다.
고흐의 눈에 해바라기는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중략..............
예술은 인정(人情)이다.<이 부분이 가슴에 확 다가왔다. 칠십을 바라보는 이시점에....>
작가는 화자가 되어 대상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을 탐색하러 들어간다.
...............중략...................................
반 고흐의 <해바라기>의 씨앗은 어떠한가?
................빽빽하게 박혀 있는 씨앗들은 복잡하지만 그 나름의 순서가 있다. 십자로 열을 맞춰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이 벌집 같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신비롭다.
폴 크리 등의 화가들도 이전에 이 같은 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결코 성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미시적인 가운데 거시적인 것을, 유형중 무형을 묘사 하고자 노력한다.
천군만마의 질주는 오히려 흑, 백, 회색의 그물을 초월하지 못한다.
올해 이정다오 교수와 이야기하던 중 물리학의 가장 간단한 인자가 가장 복잡한 현상을 형성한다는
내용을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을 예술에서 찾았다.?
우리는 이 <열매>를 과소평가하는데, 이것이 바로 좋은 예이다.
................................퍼옴...................................
그의 작품의 변모해 가는과정 특히 추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무엇인가를
이해 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읍니다.
(앞으로 올릴 후기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가 싶어 올려봅니다.)
벌써부터 다녀오자 마음 먹었던 고갱 작품 전시회를
친구들과 다녀왔읍니다.
오랜만에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포모도로 식당에서 (여긴 점심시간에 줄서는게 기본이라네요)
친구가 먼저 자리잡고 기다려주는 바람에 그 유명한 스파게티를 줄서지않고
먹는 대접을 받았지요.. 친구가 VIP손님이라서 말이지요.
거하게 잘 먹고 오랜만에 맛있는 커피도 광화문통에서 마셔보기도하고
스마트폰과 지갑을 두고간 두 사람것을 습득해 주인을 찾아주는 좋은일도 하고
광화문에서 거꾸로 서울시립미술관을 향해 걸어올라 갔읍니다.
비온뒤 활짝 개인 하늘엔 태양이 내려쬐고 무더웠지만 우린 더위도 잊고 고갱 전시회장에서
그의 일생일대의 3대걸작을 위시해 수많은 작품을 보았읍니다
초기작서부터 골고루 생각보다 많은 수의 작품이 와서 세번을 다시 회전을 하면서
보았읍니다.
(지공녀 들은 반액으로 활인해 줍니다. 9월 29일 까지입니다.)
은희언니~참 감사합니다.
저는 우관중화백의 성함도 첨 들어보네요.
언니께서 날새면서 부지런히 올려주셨기에 제 눈이 이렇게 호강합니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뭘 알아야 댓글을 쓸텐데......
" 제비 한 쌍 " 은 보일락말락하지만 수묵이 어쩜 이리도 맘을 편하게 할 수 있을까요?
저 그림 참말로 秀作 아닌가 싶어요.
옆에 두고 보면 모든 걱정 다 사라질 것 같아요.
둔탁한 맛을 내는 유화에서 볼 수 없는 수채화만이 낼 수 있는 그 맛을 볼 수 있어서 좋으네요.
전시회장의 대작!!!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 보고 싶어지내요
그림의 소재가 다양하다는 것에 또 다시 놀라게 되네요.
얼마나 많이 그리셨기에 저렇게나 많은 명작을 남기셨을까!!!!
참 존경스럽습니다.
무궁무진한 그림의 묘미에 빠지게 해 주신 언니 감사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현실 세계에서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우 관중화백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이시다 ....라는 생각이 드네.
천재적인 재능과 함께 인품도 갖추시고 그 중에서도
전에 읽은 글 중에서 이런 부분에 해당되는................
[주어진 개념에서 미적 이념을 찾아내어 그 이념에 어떤 표현을 적용함으로써
주관적 감정이 보편적으로 전달되도록 하는 능력이 곧 천재(天才)이며,
예술미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 천재라고 하였다. ]
이 이론에 부합하는 분이시라는걸 알게 되었어.
나도 전에 수묵화중에서도 한동안 화조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래도 나름 좀 잘하지않나 생각도 했었는데.........어느 순간 붓을 놓게 되더라....ㅎㅎㅎ
한계를 느낀거지뭐.........십년여를 취미생활을 그렇게 어렵게 했구나....하고말야.
우관중 화백은 동서양의 화풍은물론 미술 전반적인 분야에 전부 뛰어난 분이시니 천재라 하지 않을 수 없더라.
나도 지금이라도 이분의 작품을 세세하게 알게되어 행복하다.
문화대혁명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전 작품을 올리고 그 이후 작품을 년대별로 올려보려해요.
광숙이도 그림 그리는데 도움이 되리라 싶네.
오늘은 아주 큰 맘 먹고 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전 은희언니네 집에 제비가 한쌍 처마밑에 들어와 집을 지었다는 얘기인가 했어요....
정말 그림에 대해선 너무나 무식해서 뭐라고 댓글을 감히 쓸 수가 없어
망설이다 그래도 제가 모처럼 은희언니가 올리신 그림과 글을 다 찬찬히 읽어보고
감상했기에 감히 댓글을 달아봅니다.
제비가 어디있나 한참을 찾다가 찾았어요......
아직 밤을 고박 새워가며 책을 읽으시는 그 건강과 그 정열에
존경감을 드립니다.
덕분에 귀한 작품들 잘 감상하고 갑니다.
무식한 제가 봐도 정말 대단한 작품들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은희언니1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요...
춘자 오랜만이야~
겸손하신 춘자시네그려.....ㅎㅎㅎ
그러게 제비 한쌍이 우리집에 터를 잡으려고 하나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네....맞어
제목이 주는 상상력은 무궁무진 할 수도 있겠다.
우관중화백이 그린 저 보일듯 말듯 날아가는 제비 한쌍의 그림은
중국 윈난성 남쪽 차마고도가 시작하는곳에 있는 물가 전통가옥을 그렸고
물의 고장인 강남의 흰색담,의 흰색 검푸른 빛의 검은색, 쉬지않고 흐르는 물의 회색이
강남의 색채라고 우관중화백은 이야기하며 이곳서 비롯한 회색이
우화백의 작품중 은회색의 바탕이 되고 우화백 예술의 기반이 되었다고 해요.
그냥 뭘 알고 보질 않아도 아주 편안함을 주는 그림인데
그의 설명을 읽어보니 역시 그래서 느낌을 받게 되었구나 하고 이해가 되었어요.
평면분활로 기하학적인 구성......횡으로 긴 선과 흰색 덩어리 종으로 잡은 짧은 검은색 덩어리의
강력한 대비효과를 형성하면서 동양적인미를 제비 한쌍으로 성공적으로 표현 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기반이 되어 그의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상화에 표현으로 작품들이 탄생되는 중요한
기점이 된 작품이여서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은 중요한 작품이기도해요.
거의 조용히 칩거하고 지내거나 손주 보아주는일 하고사니
가끔 열중 할 일을 찾아 하다보면 잠도 설치고 하지뭐..........
고마워.............춘자도 건강하게 지내요.
동양화 특히 수묵화가 갖는 매력을
춘자가 그대로 표현했어요.
먹물의 농도를 한지나 비단에 그릴때 두번 손이 안가게 해야되어서
내가 한창 그림에 열중 할 때 화선지 전지(130-68센티크기)에 그리다 한번 붓질을 망치게 되면
다시 그리고 하다 삼일을 밤잠을 못 잔 적도 있었어.
그만큼 집중력과 단호함이 필요하지 한번 붓질에 말야.
우관중화백은 춘자 말대로 예술에 대한 열정과 순수함을 지닌 근대에 보기드문 분이셔.
우리가 욕심을 안가지려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데
실천한 분이시니말이지.
나도 마찬가지야..........요즈음 심신이 편안해요.
특히 마음이 .........고마운일이네.
피정하는 기간같아요.
지난번 교육장에서 뵈었는데..........
참 조예가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좋은 그림 음악 감사드립니다
사진도 글도 그림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군요
어쩜 우리 인ㄴ생도 누구를 만나느야에 따라....
즐캄하고 갑니다
건강하십시오
선배님 덕분에 그림 잘 보구 갑니다
저도 처음 접 하는 분 이네요
시원한 수채화를 보니 예전 고등학교떼 화판끼고
자유공원지나 청관에가서 그리던 아련한 기억이나네요.
감사합니다.
?설명이 부족했나봐요!!!
중국 싸이트로 어찌어찌 찾아 들어갔기에 한문이 대충 이해가
되기도 했었는데 이제 매일 보노라니 한문을 눈치로도 읽고 해석하게되는군요...ㅎㅎㅎ
点??看?情 은 그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면 클릭해서 보란 중국어랍니다.
그림 밑에 点??看?情 이곳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하면
그림을 크게 볼 수도 있고 유화인지 (소재가 목판, 이나 마포, 비단 인지도 한문으로 써있지요)
수채화 인지 ,어느곳에 소장되어 있는지도 써있답니다.
우리 홈피에 올릴때는 조금씩 줄여서 올리고 있거든요.
동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읍니다.
우관중화백의 전통중국화 그림을 몇점 보면서 동양화의 튼튼한
기본기를 가진 중국 근대화가중 몇 안되는 분 이시구나 하는것을 알게되었었고
그런분이 서양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철저하게 공부를 하고 어느 경지까지 도달하고
다시 제자리로도 회귀하는 융통성도 갖는 예술가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되었지요.
서양화를 접목하는 과정의 작품들의 평범한속에 비범함이 보이니 어느 작품에선
눈을 떼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어제 우관중 화백의 중국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중 1997년도작인 그림의 실재의 크기를
느껴 볼 수 있는 사진을 찾아내어 보게되었읍니다. 그가 별세하기전 13년전 그린 작품이니
팔십이 다된 연세에 이런 대작을 그렸다하니 절로 감탄사가 나오기에
육십년대 작품을 올리고 있는 중간에 마음이 급해 올려봅니다.
나중 구십년대 그림올릴때 그림의 관한 글은 올리기로하고.....................
4미터 3미터 크기의 대작이라고 하며 우관중화백이 기념으로 그림곁에 앉아
찍은 사진 입니다.
" 장강삼협" 이란 제목의 그림인데 이 그림을 스케치 하길 수차례
현장을 찾았다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강이 장강이란 이름으로 중국에서 불리운답니다.
협곡에 웅장함을 강위에 떠 있는 배의 모습으로 가늠 할 수가 있네요.
김은희의 "우관중 교실" 에
나도 드디어 등록 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분위기에 들어와 보니 어안이 벙벙하고
깊은 어떤 세계로 빠져 드는 느낌이랄까..?
인간의 예술 세계는 어떤 경지 일지
은희가 펼쳐 놓은 이곳 격조 있는 갤러리로 자주 감상하러 들려 봐야 겠구나.
장마철의 눅눅함도 모두 황홀한 작품 뒤로 물리고
시원하고 경이로운 세계에 파묻혀 보련다.
몸은 좀 피곤하지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던 프랑스 "플럼 빌리지 수행 체험"은
덕분에 잘 마치고 돌아 왔단다.
영선아~!
잘 다녀왔구나.........반갑다.
손주 산이녀석이 유치원 방학해서 집에 와 있단다.
매일 한번씩 외출하는데 오늘은 약암온천으로 물놀이갔다 오려구.........ㅎㅎㅎ
나갔다 와서 다시 쓰마...........
참참참!!!
이렇게 글을 이어쓰게 되는 처지가 이리 될줄 어이 알었겠냐!
며느리 산이에미가 세째를 가졌으니 될 수 있으면 도와주워야지 싶어서 말이지
산학이 글에 댓글을 읽어보니
틱낫한 스님 만나러 만사 제쳐두고 달려간 너의 그 대단한 열성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듯 싶더구나.
이태리 스페인 여성하고 나란히 찍은 사진 잘 보았네.
하루를 지내도 너라면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았으리라.
어느때 시간내서 네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노라......수행 정진하는 모든 순례자들이
요즈음은 많이 생각이난다.
삶의 어느 순간 좀 진지해보고싶은 때가 있으니말이지.
우관중화백도 길은 다르지만 예술로 승화되는 여러면모를 보여주는 분이신것같아서
그냥 보면 그림이지만 알고보면 그림속에 "도"를 깨우침과 같다든지
뛰어넘은것이 아닌지 하고 깊히있게 보게되더라.
앞으로의 변화되는 작품들을 보면 더 느끼게 될거야.
참.........................좋더라.
덥다 보니 잠을 설쳐 어중간하게 일어나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문외한인 저도 우관중세계가 퍽 마음에 다가옵니다.
저는 동양인 분명 맞는 듯, 이런류의 그림이 편안하게 느껴지네요
디지털 아트 분야에 중국 송나라 그림을 3D 모션그래픽으로 입게감 나게 만든 청명상하도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어요
2010년 상해 만국박람회때 전시했다고 하는데 이걸 보려고 3시간이상을 줄을 서 기다렸다고 하네요
제가 마치 송나라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더군요
우리나라도 이러한 시도를 한 영상을 본적 있습니다.
2D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디지털아트 분야의 활발한 움직임 같습니다.
그래서 우관중화백의 그림을 머릿속에 3D로 상상해 봅니다.
그림 속에 있는 대상들이 살아 움직이는 상상은 무척 흥분되고 즐겁군요
선배님 덕분에 제가 레벨 업 되고 있어요
이 것은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김홍도 작품을 모션그래픽으로 만든 영상입니다
디지탈 아트 분야의 비슷한 작품이지요.
선배님 글에 끼어들어 저도 잠시 문화가 산책을 했습니다
作品名?:西藏寺? ?作年代:1961年作 作品尺寸:46*61cm 点??看?情
손주가 제 집으로 돌아가고 짬짬이 보던 중국 문화나 역사의 관한 글들을
마음놓고 여러시간 보았읍니다.
장강삼협을 그린 작품의 현재의 풍경을
이백, 두보, 소동파의 시와 함께하는 동영상으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보았읍니다.
그리고 약 반세기전의 티베트를 찾아 반년동안 체류하면서 그곳에 풍물을 그린 우 관중화백의 그림 속의
티베트 역사나 티베트 불교의 동영상도 찾아보았읍니다.
티베트의 가슴 아픈 지금의 중국과의 관계의 역사의 장도 생각하게 되었지요.
히말라야 4000미터 이상의 고색창연한 티베트의 사원들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삶을 보면서
우관중 화백이 그 당시의 느꼈을 감정의 깊이를 그림의 표현으로 나타낸 그곳 정경속에
내 마음도 실어보았읍니다.
(배경음악을 끄고 티베트의 신비의 사원들의 동영상을 보아도 좋을 듯 합니다.)
김은희 선배님!
올려주신 작품들과 아울러 설명을 들으니
우관중 화백은 천재라기 보다는 聖人이시네요.
흔히들 돈에 깨끗하면 성인이라고 하는데
100억짜리 그림도 그냥 미술관에 기증을 하는 것을 보면 보통사람이 아니라 성인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림 하나하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맑은 향기가 날 수 밖에요.
모든 경전이
결국은 욕심을 버려라 "無"를 가르치는데
욕심없는 예술가의 작품에서는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빠져들고 맙니다.
돌돌돌 샘솟는 맑은 물같고
한자락 불어오는 맑은 바람같은 우관중 화백의 작품들은 그냥 자연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우관중 화백의 작품 교본...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산학이가 어디 아프지는 않은가 했네.
우선 건강한거 같아 안심이다.
산이와 함께 지내려니 산이 중심이여야 해서 무척 바쁘게 지내게 되었었네.
그러다보니 아이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시간이 나면 우관중화백의 그림세계로 들어가서
중국의 장강삼협도 찾아가 보고 이백, 두보 , 소동파시도 들어보고
장강삼협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게도 되니
동심에서 껑충 몇단계 뛰어넘는 느낌이랄까 마음의 평화...........
참 중국의 풍경화를 우관중화백의 그림으로 보면서 자꾸 이 "평화"라는 단어를
쓰게되네그려......그동안 평화스럽지가 않았는감~!!!..........ㅎㅎㅎ
이것 저것 사는일에 관한 일도 산학이가 말한 "없을 무" 와 연관지어보게도 되고
어려운 화두 지만말야.
어제 오늘 비오는 소리에
대낮이 캄캄한 오밤중같은 어둠속에서 오히려 차분해지더라.
블로그에 이승철의 아마츄어란 노래를 올려놓고 무한리필...ㅎㅎㅎ... 차와 마시고 있었네.
클래식이나 명상음악을 듣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은 가사를 듣는게 좋은날이다.
우관중화백의 그림은 또 새로운 그림을 여러개 만나보기도하고
어찌그리 인생살이도 충실하게 살아냈는지......
대혁명시절도 함께 겪어내면서 비가 쏟아지는 벌판에서 아내가 남편의 화판대신 역활도 해주면서
본인은 비를 맞으면서도 남편의 그림을 가려주었다하더라.
그시절 어렵게 마련한 그림 그릴 수 있는 순간이였지만 우중에 남편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부인이 있어
우관중화백이 그리도 오랜기간동안 작품활동을 했지싶네.
글을 읽기전에도 여러장 부부함께한 사진에서 아주 은은한 부부애를 느끼게 되었었는데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면에서 행복한 분이시네.
이런 분들을 보면서
우리 또한 대리만족하는 시간이기도 하지.
오랜동안 공부를 많이 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어서 여러모로 감사하게 나도 생각해요.
作品名?:拉??王潭 ?作年代:1961年作 作品尺寸:46*61cm 点??看?情
(라사의 용왕못) 목판에 유화
作品名?:大昭寺 ?作年代:1961年作 作品尺寸:46*61cm 点??看?情
(라싸의 대소사) 목판에 유화
拉?街?(一)?作年代:1961年作 作品尺寸:28*36cm 点??看?情
(라싸 거리풍경1) 지판에 유화
作品名?:拉?街?(二)?作年代:1961年作 作品尺寸:28*36cm 点??看?情
(라싸의 거리풍경 2) 지판에 유화
作品名?:拉?街?(三) ?作年代:1961年作 作品尺寸:28*36cm 点??看?情
(라싸의 거리풍경 3) 지판에 유화
우관중화백이 문화대혁명기간동안에서도 삼사년간의 작품활동은
전무한 정도로 핍박의 시간이였나보다.
육십년대 초기에 티베트 에서의 많은 그림이 존재하지만 육십년대 중반에 문화대혁명기간엔 작품을 찾아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고 혁명기간 후반에서야 칠십년도 초기서부터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혁명초기에 풍경화 작품 말고는 거의 파괴 되었다고 하는 걸로 보아
유럽에서 유학하고 온 그가 그린 서구식 그림에 대한 대접이 어떤 방식으로 도출 되었으리라는것은
혁명당시 노동형을 받고 쫓겨난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래서인지 그의 여성 누드화를 만나면 무척 반갑다.
몇점이 있긴 한데 특히 엎드려있는 나부상은 그의 글을 읽어보니 더욱 반갑다.
육십년대에 사라지거나 그려보지못한 칠십일세의 그의 소회를 읽어보니 더 더욱 그렇다.
육십년대에 그림의 패턴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비치지만
좀 지루하지 싶어 그의 1990년의 누드화 한점과 그의 글을
오늘은 작심하고 그의 누드화의 대한 전문을 책 그대로 옮기려고 한다.
作品名?:伏(人?) Reposing (Nude) ?作年代:1990年作 作品尺寸:101*101cm 点??看?情
(복....엎드리다....) 마포에 유화
예술관찰에서 핵심 키워드는 바로 착각이다. 착각의 모태는 감각인데, 감각의 모태는
바로 감정이다. 종종 습작과 창작은 이 착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릴때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은 시종 자신의 감상과 인상을 통제하기 위함인데, 순간 방심하게 되면
바로 대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누드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 모델의 모습을 단지 소극적으로
베끼게 될 뿐이다. 발가벗은 말과 소의 모습이 안장을 차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처럼,
가죽 옷을 입히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다. 사람들은 단체로 생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옷을 입는다.
그렇다고 해서 발가벗은 것이 절대 추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의복설계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가.
인체의 구조문제에 관한 나의 관점은 분명한 편이다. 구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해부적 구조로 단순히 과학적인 것이므로 쉽게 이해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상적 구조로 안정, 생동, 전환, 왜곡, 기복, 정밀등의
요소 간 조직관계를 가리킨다. 이것들은 모두 형식미의 규칙과 관련이 있다. 인체미를 표현할 때는 해부적 구조와
추상적 구조 간의 결합과 호흡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구조의 결합은 모순과 충돌을 가져오기 때문에
함께 고려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창작은 강렬한 인상의 구현이기 때문에, 해부적 구조는 추상적 구조에 예속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과장, 생략 등의 수법 또한 살아남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보자의 경우 해부적 구조를 주요 위치에 놓고 학습 진전에 따라 추상적 구조를 점차 늘려가는 것이 좋다.
만약 처음부터 추상적 구조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해부적 구조만 따른다면 점차 무감각해져 다시는
추상적 구조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결국엔 예술의 진정한 경지에 오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난 반평생 예술 인생에서 누드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서양 조형예술의 진수, 즉 그 형식법칙의 귀납은 모두 누드에서 발원된 것이라 말할수 있다.
그러나 나의 모든 누드 작품들은 유화, 소묘, 스케치 그리고 작품을 찍은 사진을 포함하여 지난 10년의
문혁 대참사 속에서 모두 불살라 버려졌다. 매번 회고전을 주최할 때면, 나는 전언이나 후기를
통해 누드작품이 단 한점도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을 밝히곤 했다.
옛 꿈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지만, 온고지신의 정신은 소중한 것이다. 1990년이 되었고
나도 이미 71세가 되었다. 한 달간의 무더운 여름날을 빌어 다시 한번 누두화를 그려보기로 했다.
나의 누드화가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우관중 씀............................................................
우관중 화백의 주관적인 예술관이 어떤것이라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글입니다.
교수 신분이 들어나는 글귀가 중간에 읽히기도 하면서
섬세하고 확실한 우관중 화백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옮겨와 보았읍니다.
손주가 나흘 지내다 다녀가고 드디어 오늘에사 진짜 방학이 끝났다고합니다
할미노릇도 진진하게 하였으니 우관중화백의 방으로 다시 돌아왔읍니다.
새로운 배경음악도 밑으로 데려오고......심기일전 하여 우관중화백의 세계로 들어가봐야겠네요.
그림과 함께하면 모든 근심과 시름과 잡념을 잊게되니 말이지요.
어제도 대낮 기온은 아직도 무더웠다.
이곳은 그래도 바람이 좀 달라졌나싶은데 새벽 두시가 지난 신새벽인데도 산뜻한 기분은 아니다.
지난밤은 마음편히 일찍자려다 더위도 잊을겸 가끔 텔레비젼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때문에
"초한지 영웅의 부활"편을 보게되었다.
다른때 같았으면 확 땡기는 영화가 아니면 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둘러볼 텐데
중국에 부쩍 마음이 쓰이는 때이라서인지 눈길이 간다.
하도 삼국지 연속편을 보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 가끔 중국의 시대극을 보기도 했었지만
이건 오래전 읽고 보았던 초한지의 역사극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주인공 "항우, 유방, 그리고 한신" 세 남자의 의기 투합에서 부터 목숨을 함께 걸고 뜻을 함께 했던
의리에서 서로 의심하고 배신하는 그 사실적인 역사를 보여준다.
다른 역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리얼한 인간들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한시도 눈을 떼지못하고 보게된다.
영화가 끝나고 건너와 인터넷에서 제작과정을 찾아보았다.
역시 철저한 제작과정과 준비가 있었다는 것인데 근래에 중국 시대극 영화로는 최고이다.
아무 사전 예고도 모르고 보아선지 더 감동이 온것인지도 모르지만
유방의 처 소치의 잔혹하고 음산한 성정을 보면 인간의 악랄함을 부각 시키기에 충분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부와 명예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겉으로는 아무도 모르게 가식으로 치장하고
속으로는 적이지만 이용가치만 있다면 웃음을 띄고 손벌려 포옹하는 그런 인간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오히려 능력자라고 대우받고 여전히 아직도 추앙받는 세상이 되는것이다.
그런중에도 우관중화백의 세상 가치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앞세운 삶의 표현을 그린
그림으로나마 선한 세상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말년에 모든 형식의 그림중 돌고 돌아와 그린 수묵 채색화 중 제비한쌍 만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림 두 점을 오늘도 연도 상관없이 올려보고싶은 마음이다.
계단식 논에 벼를 심은후, 물이 가득 차면 수면이 반짝 반짝 빛난다.
쓰촨 사람들은 이를 거울 논이라고 불렀다. 논에는 단지 물만 채워져 있는 것이아니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하늘과 구름 그림자가 배회하고있다.
나는 반평생 조색판에서 이 은회색 물빛 색깔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림 水田(논)의 창작 과정을 쓴 그의 글의 시작 몇 구절이다...........
우관중 화백이 유화에서 표현 할 수 없는 방법을 수묵에서 찾아 실행 했다는 그림인데
역시 은은한 수묵의 향기를 맡는듯 물빛이 회색이래도 맑다.
.............마치 목소리를 없앨 수 있는 산문시인 듯하다...........라고 본인 스스로 표현을 한다
그리고 그가 별세하기 4년전 2006년 구십세에 가까운 노구로 그린 "고교(높은다리)"의
절제된 선과 수묵 채색의 조화로움이 아름답다.
미국 사는 후배와 전화 통화후 몇번 그림을 올리려고 시도 하다 포기하고....
이왕지사 그림은 홈피가 정상화될때까지 기다려야 될것 같아
며칠전 블로그에 손주 보여주려 올렸던 에니메이션 ......러시아의 귀여운...마샤와 곰...올려봅니다.
우관중화백의 그림을 올리기전까지 들려주는 동문들 웃어보시라구요
말썽꾸러기 귀여운 마샤와 곰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쓰리디 에니메이션으로 잘 만들어서
러시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에니메이션을 보면
시집도 안간 우리집 늙은 딸ㄴ 하고 만들고싶은 에니메이션은 언제쯤이나 완성이 될려는지...
러시아나 중국의 에니메이션을 보면 부러웁네요.
(광고 막대가 초기 화면에 뜰겁니다.
마우스 커서를 오른쪽 막대끝에 대면 배꼽표시가 보일거예요 화면에서 걸리적거리니 배꼽표시를 누르면 사라집니다)
사진 파일첨부가 홈피에서 안 올려져서 다른 방법을 활용을 해서 올렸읍니다.
어떤 경우든 스스로 공부 하는일은 성취감을 주어서 좋네요.
기분이 좋은김에 넉넉한 시간과 마음으로 1962년도 작품을 올립니다.
作品名?:江南春雨 ?作年代:1962年作 作品尺寸:27*38cm 点??看?情
(강남의 봄비) 종이에 수채화
作品名?:水?小船 ?作年代:1962年作 作品尺寸:35*25cm 点??看?情
(물의고장의 작은배) 종이에 수채화
作品名?:水?小船 ?作年代:1962年作 作品尺寸:35*25cm 点??看?情
티베트를 다녀온 그 이듬해 강남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저위에 올린 수묵채색화가 여백의 풍요를 수묵의 향기로 채웠다고 한다면
우관중 화백의 수채화는 전통중국화에 서양화를 접목한 이화접목의 표본이 아닐까 합니다.
젊을때 필치의 유연함을 나타낸 풍경화는 아름답습니다.
중국의 강남을 그림의 소재로 삼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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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와 목화밭(유화)1972년
우즈벡화가들 그림편에 댓글로 올린 우관중화백의 작품과 그의 관한
글도 올렸는데 동문중에 대문글로 올려 주면 더 많은 동문들이 보게 될것이란 조언에
힘을 얻어 올려봅니다.
중국의 문화혁명때 다행히 목숨은 부지하면서 강제노동을 하던시절의
그림입니다.
그림의 관한 그의 글을 발췌해서 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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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열을 맞추어 황막한 강가 모래사장에서 농사일을 하고, 모든 사람들은 어깨에
무쇠로 된 농기구를 메고 있어 마치 쇠의 숲인 듯했다.
우리의 쇠의 숲외에 이곳에 숲이라곤 없었다. 단지 건조하고 딱딱한 평원만이 있을 뿐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림에 대한 갈망으로 야생화 한 떨기라도 발견하면 그것이 천하의 절경으로 보일 정도였다.
주변의 농지와 목화, 수수가 전부였다 . 그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키가컸으며, 각자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농익은 작물의 아름다움은 화초와 비교하여 모자람이 없었고, 오히려 화초보다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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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모두 생장, 성숙, 쇠약의 단계로 흘러간다. 결국 이 작물들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은 인류에게 계속 경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몸소 보여주는 암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리의 생명과 연관 짓지 못 하고 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양식은 우리의 토템이다. ....................................................중략..................
스스로 노동에 참여하고, 수확의 기쁨도 누렸다. 휴일에 유화로 수수를 그리고 있으니 가을바람이 불어와
공작의 병풍이 눈 앞에 펼쳐진다. 나의 토템을 알고 보니 공작의 화려함을 가졌었나보다.
나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그렸던 이 일련의 작품들을 몹시 아낀다. 나는 당시 고흐의 가슴에서
타올랐던 불꽃을 직접 느끼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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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을 모두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의 필력은 그림 글 모두가 아름답다.
문화혁명당시 그가 분뇨지게를 이젤 삼아 어렵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그려지고
그의 정신세계의 경이로움에 찬탄을 하지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