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추운 날이면,

아랫목에 밥사발 싸놓듯 꽁꽁 묻어 놓고  '울애기 울애기' 하시던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까지 내 이름은 늘  '울 애기' 였다.

 

아, 우리 할머니~

참 유별난 사랑을 하시던 분이다.

 

겨울이면, 당신 솜바지 속에 꽁꽁 언 내 발 넣어 녹여 재워주시던 분.

 

찬 도시락 안 먹이시려고 수문통 다리 건너 수없이 점심 보따리 가슴에 품어 나르시던 분.

 

울 애기 낮잠 자는데 시끄럽다고 동네 개구쟁이들에게 물 바가지 세례 주시던 분.

 

초등학교 때까지 포대기 둘러 업어주시려 해서 며느님에게 눈총받으셔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시던 분.

 

내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던 부끄러운 일화들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그때는 그런 할머니가 창피해서 신경질도 많이 냈었는데,

그 분의 남편이자 자식이고 친구고 손녀였던 것을 알기엔 난 너무 철부지였다.

 

 

초등 3학년 때,

쬐끄만게  무슨 신심이 있다고  매일 새벽미사를 다녔다.

깜깜한 골목길을 절대로 절대로 혼자 보낼 수 없는 우리 할머니께 일거리를 하나 더 보태드린 셈이다.

정화수를 떠놓고 손비비시던 분이라 결코 성당 문턱을 넘지 않으시고 되돌아 가시곤 하셨다. ㅎㅎ

 

그 해 성탄절,

할머니가 지어주신 하얀 한복을 입고 나는 영세를 받았다.

그당시, 신자 없는 가정의 꼬마가 홀로 영세를 받은 것은 완전 특혜였다.

이유는 딱 하나, 어린 것이 새벽 미사를 매일 혼자 온다는 것이었다.(히히 혼자 온 거 아닌데~)

 

영세 받던 날, 난 기도했다.

  "예수님, 이 다음에 커서 우리 할머니께 아주 좋은 선물 드릴때 까지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

 

그후, 선물 목록은 자꾸 바뀌어갔다.

 

쪽진 머리 자르고 엄마처럼 빠마 해드릴까?

찌그러진 금반지 대신 번쩍이는 쌍가락지 해드릴까?

은비녀를 금비녀로?

 

ㅎㅎ 그때 난 왜 그리 황금에 휠이 꽂혔던 걸까?

어린 마음에 아마도 금이 제일 비싼 거라고 느꼈던 거 같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시고 찌그러진 반지를 끼신체 돌아가셨다.

철나고( ? ) 처음으로 겪는 이별이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듯한 외로움은,

두렵다기보다 그냥 슬프고 또 슬퍼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안나' 란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으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울 할머니.

공평하신 우리 하느님께서 손녀와 함께 걸은 새벽길 걸음을 세고 계셨으리라.

 

그러나 난 빡빡 우겨댄다.

울 할머니 '송아지'(ㅍㅎㅎㅎ) 이름표 대신, '송안나' 새 이름표 달고

흰꽃으로 단장하고 당당히 성당 문 안으로 들어가시게 한 건 바로 나라고 ㅎㅎ.

 

무슨 말이던 손녀 말이면 맞장구 쳐주시던 우리 할머니.

저 높은 곳에서 웃으시며 말씀하시리라.

  "암, 그렇구말구, 내가 울 애기 덕에 '안나'가 되었구말구"

 

 

할머니 살아생전에,

아랫목에 당신 앉히고

질축하게 밥 지어

탑탑한 된장찌개 바글바글 뚝배기에 올리고,

쌀뜨물에 담갔던 간 고등어 노릇하게 굽고,

붉은 갓 물든 동치미, 살얼음 휘휘 저어 나박나박 썰어 한 보시기 담아서

소박한 밥상 한 번 올리지 못한 것이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그때 울 할머니 꿈과 소망은 뭐였을까?

 

할머니 나이가 된 나는 아직도 쇼윈도 속, 예쁜 옷도 힐금대고,

창 넓은 커피숍에서 빗소리 들으며 친구와 왕수다도 떨고 싶고,

잠시 일상에서 탈출하여 스케치 핑계삼아 여행도 떠나고 싶건만.

 

꿈도 낭만도 없이 그저 손녀 치닥꺼리만 하다 가신 우리 할머니, 불쌍하고 죄송해라.

 

빛바랜 사진첩의 할머니는 그 모습 그대로신데,

이렇게 늙어버린 '울 애기' 를 우리 할머니,  알아는 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