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작가의 스무 살 어머니에 수록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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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날의 삽화
 
                  ......정 채봉
 
 
 
그해 여름 서울은 폭염이었다.

내가 나가던 대학 도서관의 천장에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같은

선풍기가 쉬엄쉬엄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우리들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나무의 맨 위 이파리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

나를 그렇게 발작시키지 않았다 생각한다.

 

그 시절 우리들 호조머니 사정이 뻔했다.

세 친구의 호주머니를 털어서야 고향 갈 차비가 되었다.

궁금해 하는 인천 친구한테 책가방을 떠맡기면서 나는 말했다.

어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가는 거야.”

 

그러나 고향에도 바람이 불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어머니 묘의 풀만이 무성했다.

그 풀을 베고 땅찔레를 파내고 있는데 산지기 노인이 올라왔다.

산소하고 어떤 관계냐고 해서 아들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근처의 무성한 뻘기꽃 같은 허한 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이렇게 컸단 말이냐? 네 어머닐 여기에 묻을 때

건 하나 달랑 쓰고 온 애기였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떡이나 듬벅듬벅 베어 먹고 있더니......

네가 그때 몇 살 때였는지 아느냐?”

세 살 때였다고 들었습니다.”

 

 

뿌리가 깊이 든 땅찔레를 뽑아내다가 나는 찔레 가시에 손바닥이 찔렸다.

빨갛게 올라오는 피를 보면서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산지기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무렵에 태풍이 올라왔었다.

그런데 한밤중이면 바람 속에 여기 네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이야.

너무 젊어서 아이를 두고 죽었던 것이 억울했던 게지.

우리 식구들은 한 사흘 밤은 칙간에도 다니지를 못했었다.”

 

내가 말대꾸를 않자 노인은 소를 풀어놓고 왔다며 산을 내려갔다.

나도 이내 손바닥의 피가 지혈되자 어머니의 산소를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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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인이 졸고 있는 선창 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가지고

고향의 외곽 간척지 둑을 걸었다.

그 둑은 바다를 저만치 밀어내며 이웃 읍내로 뻗은 20리 길이기도 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둑방 길을 소주를 홀짝거리며 걷자니

오랜만에 속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둑의 한가운데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바닷물 소리가 좀 달라지는 가 했더니 달이 숨었고 천둥이 쳤다.

그리고는 곧이어 소나가가 쏟아졌다. 장대 같은 비였다.

 

 

처음에는 잠시 지나가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사위를 살펴보니 저만큼에 불빛 하나가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불빛을 향해 뛰었다.

 

그 집은 돌담만 들러 있을 뿐 대문도 없는 오두막이었다.

내가 주인을 찾기도 전에 인기척을 들었는지 방문이 열렸다.

검은 주름살이 얼굴 가득한 노인 내외가 마르로 나오며 물었다.

 

누구시오?”

길을 가던 학생입니다. 갑자기 비를 만나서....”

노인 내외는 흔쾌히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 마냥 할아버지는 젖은 옷을 벗으라며

삼베 바지저고리를 꺼내 주었고

할머니는 부엌에 나가서 물 한 사발을 끓여왔다.

그리고는 한사코 거기에 밥 한 덩어리를 말아주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노인 내외는 일을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윗목에 얼뚱한 길손의 밥상만을 봐 둔 채로.

 

하늘은 언제 그런 소나기가 있엇냐는 듯이 청명해 있었고

해는 또다시 끓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러나 고마움을 표할 것은 나한테 그 무엇도 없었다.

돌담 가에 기대 놓은 대비를 들어

 

그 집의 마당을 쓸어놓고 온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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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갔다가

진열되어 있는 정채봉 작가의 책이 여러 권 있는 중에

스무 살 어머니란 책을 고른 것은

스무 살 어머니란 이 분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단 한 권 남아있어, 표지가 약간 더러웠지만

왠지 정이 가는 이 책.....

 

역시...내 예상대로

소박하고 따뜻함이 묻어나는 글들....

 

눈이 내릴 때 태어나고(1946)

 그가 가는 그 날도 눈이 내리는 때였으면 좋겠다고 한

그의 바람처럼 동화처럼 눈이 내리는 날

그의 생을 마감했다고(2001) 한.

 

요즘 몹시 더운 한 여름을 지나면서

그 분의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따뜻한 책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An Adagio By Francis L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