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늘상 가는 강화길이 오늘따라 설렌다.
윤삼월 보름날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답게 먼산의 나무들은 아직도 연록색인데 덥다
울긋불긋 진달래 축제가 한창인 고려산도 한참 지나 하점면 신봉리 금화당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표지석을 따라 눈을 돌리니 맨 꼭대기에 별장인 듯 싶은 집이 높게 자리하고 있다.
오늘 김금화 선생님께 촬영 허가를 받고 난생처음 굿구경을 나섰으니 호기심과 설레임이 어찌 없다 할까?
인천에서 6시에 출발해 8시에 도착한 우리를 스스럼없이 반기시는 김금화 선생님.
아침을 같이 먹자며 수저를 쥐어주는데 손길이 다정하다.
무형문화재82호, 나랏만신, 82세의 고령임에도 작두를 타는 큰무당 등등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호칭은 어디로 가고 그 모습이 너무 수수하다.
오늘 굿은 "내림굿"으로 하루종일이란다.
처음 시작은 마당에서 부터이다.
훤칠한 키에 아직도 고운 모습인 무복을 입은 선생님은 한마리의 학을 연상시킨다.
춤도 사뿐사뿐 땅이 꺼질새라 추는데 흰 버선발이 하늘을 향해 자꾸만 날아간다.
학의 춤이 저러할까?
뒤에 죽 늘어서서 같이 장단을 맞추는 6명의 애기무당들과 연록색의 박수무당도 조신하다.
빨간치마에 흰저고리, 쑥색치마에 분홍저고리, 겹겹이 입은 치마들의 군무가 화려하다.
덩더쿵 덩덕 장고소리에 징이 울어댄다.
소리는 다 알아듣지 못해도 대략 덕담이다.
"여기 오신 모든 분들 아픈 것 씻은듯이 낫게하시고 집안 편안하시고 다들 소원성취십시오"
"대한민국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빨간치마에 흰저고리위에 무복을 걸치고 춤을 춘다.
커다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37살의 당진에서 왔다는 여자가 이제부터는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겠다며 맹세를 한다.
무슨 형벌을 받고 태어났기에 "이제는 너는 신의 딸, 무당이다"이라는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엎드려 우는 것일까?
세분의 어머니가 있었으나 다 버림을 받고
이제 어미가 되었으나 내 자식을 거두지 못 한 내 죄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니 굿당이 눈물바다다.
보다못한 임경선 선배님은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딸과 같은 또래의 여자의 절규를 더 이상은 들을 용기가 없었나보다.
실상 이번 강화행은
김혜경 선배님께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찍고싶다는 열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더 극찬을 받고 있는 김금화 선생님이 이제는 82세의 고령으로
언제까지 작두를 타며 춤을 출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서둘렀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던 김포에 사시는 김은희 선배님 그리고 부군이신 김정웅 교수님, 최희순 선배님이 동행하셨고
임경선 선배님과 이수인 선배님
그리고 12기의 후배도 남편과 함께 했다.
특히 김금화 선생님의 자료를 많이 갖고 계신 김교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장고잽이가
오히려 김교수님에게 스승 김금화의 자료를 간청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그 덕에 우리는 특별대우를 받으며 굿구경에 사진이며 비디오를 편하게 찍을 수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문 밖은 온통 연록색으로 화려한데도
여자의 울음이 그치지를 않으니 김금화 선생님이 다시 나와서 다독이며 그만 울고 신나게 한바탕 걸판지게 놀다가라 하며
손수 장고채를 잡으신다.
여자가 그 장단에 맞추어 겅중겅중 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테크노 춤같은 막춤을 천장에 머리가 닿도록 뛰어오른다.
드디어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퍼진다.
"이제는 살 것 같다. 할 일이 많은 나를 그동안 왜 묶어 놓았을까?
이제는 내가 너희들을 보살피며 살테니 걱정말아라"라며
한사람 한사람에게 공수를 준다.
호통을 치며 야단을 치기도 하고
예뻐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긋이 쳐다보기도 하고
붙들고 울기도 하면서
열두거리를 번갈아 옷을 갈아 입으며 춤을 추고
그리고 공수를 받은 사람들은 차례로 나와 무복을 입고 절을 하고 함께 춤을 춘다.
죽은 배뱅이의 혼이 살아온 듯 한바탕 놀이마당이다.
저주받은 운명을 치마폭에 감싸안으며 춤을 추는 여자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겠다며 맹세를 하는 여자의 앞날이 이후로는 마음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바람을 하며 굿당을 떠났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짧다.
서울에서의 중요한 약속때문에
오전 공연만 보고 돌아서는 우리에게 김금화 선생님이 섭섭하다며 끝까지 서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다 내려와 한참 위를 올려다보니
한 마리의 학이 그냥 거기에 고고하게 서 있다.
난생 처음으로 굿구경을 한 오늘
우리는 무언지 모를 감동에 할 말을 잃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한바탕 놀고가도 100세도 못 살고 가는 인생길에 한은 왜 그렇게도 많아 켜켜히 껴안고 울고들 있는 것일까?
문 밖이 바로 저승인데 왜 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김 금화 만신이 가운데 서 계시고 그 왼편이 빨간귀고리의 오늘의 내림굿 주인공인 여인이다
파란만장한 무속인의 삶을 살아오심에도 불구하고 곱고 온화하게 늙으신 모습에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앞서게된다. 누가 감히 천한 삶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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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아!
우리나라에서 천대받던 무속인을 외국에서 극찬한 이유는 무었일까?
그리고 우리것을 무조건 무시하는 그런 풍조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 중의 하나지.
내가 갑자기 애국자가 되었나?
그러나 김금화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더라.
온 몸에 기품이 서려있어 오죽하면 "고고한 학같은 분"이라 했겠니?
그리고 네 말대로
우리 몸은 누구나 신명을 갖고 있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 할까?
그냥 주어진대로 감사하며 살라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건만
마음대로 안되니
참으로 답답하다.
1) 내 앞에 펼쳐진 인생길은 어디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만이랴?
아리고 쓰리고...된퉁맞게 뒤틀리고....
성경에도 보면 엘리야와 대적했던 수많은 마술사들 무당들, 그들을 물리쳤으나 나중엔 그들의
대장격인 왕비가 무서워 로뎀나무 밑에 숨던.... 이야기
요즘 연예가엔 이수근이라는 코메디언이 어머니가 신병을 앓아 무당이 되었다는 고백을 했지 ㅎㅎ
2) 남산중앙감리교회....우리 교회 자리는 원래 무당들이 모여살던 동네였다는데...
이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신 여자장로님 등 숱한 신화창조 얘기들을 듣는다. 그분을 도와 함께 교회를 건립했다는
한의사 장로님 얘기와 함께, 귀신 쫓던 얘기들...
이 목멱산에는 아직도 도깨비집(궁)도 있지(소월길에서 보셨나요?)...............유난히 도깨비가 많은 곳이래야
3) 서양사람들이 김금화 큰무당을 각별히 여기는 건 이분이 대단히 우리나라-특이적, 고유한 exorcist라서 그런거 아닐까?
순애야!
이제는 우리나라도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보존해야 할 단계에 온 것이 아닐까?
바이칼 호수 근처 알흔 섬에 가면
서낭당등 우리가 없애버린 무속신앙이 그대로 살아있어
어릴 적 내 고향에 온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는 기행문을 읽은 적이 있단다.
몽골에서는 양을 먹기 전
훈제된 양을 쟁반위에 올려놓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축문을 읽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우리네 제사의식과 너무도 흡사해서였지.
그런 것들이 무엇을 뜻할까?
인류의 정신세계는 진화과정에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은 같은 것이 아닐런지.
시퍼렇게 갈아서 종이만 스쳐도 갈라지는 작두위에서
맨발로 춤을 춘다?
참으로 알수없는 정신의 세계이다.
? 몇년전까지는 방학이면
아이들의 영어연수를 등에 턱 매고는
굉장한 일이나 하는 듯
일명 영어권이라는 나라를 다니면서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나는 어느새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며
안정을 찾곤 했던 기억이
어지러증탓에 모든 거동을 자제하며
내 곳에서 맹맹대고 있자니
생생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이렇듯 선배님의 파스텔풍의
강화행을 대하니
너무나 좋네요.
늘 꼭 저희들이 그곳에 함께 한듯
이야기를 이어주심에.
저와 같이 근무했던 외국강사들이나,
입양부모로 우리나라를 찾았던 외국인들이
제게 묻곤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잘은 모르는 너희만의 무언가가
자꾸만 궁금하고 그립다고던.
가슴으로 또 읽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주향님!
연어가 알을 낳고 죽을때 거슬러거슬러 고향을 찾듯
우리도 항상 우리가 온 곳 엄마의 자궁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종내는 그곳으로 돌아가지요.
그런 연유로 힘이 들 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엄마를 찾곤합니다.
흰두교에서는
"옴"을 우주의 소리라고 한답니다.
옴이 마미, 엄마가 된 것도 확실한 사실이고요.
엄마는 우주 전체라는 언어학적 개념에서 보듯이 엄마를 찾는 것은 당연히 자연의 이치이지요
요즈음 외국에서 대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제일 먼저 가 봐야 할 산으로
강화의 마니산을 꼽는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산이기 때문이라고요.
우리에게는 설악산 지리산이 명산이지만 외국인들이 볼 때는 우리의 뿌리를 찾나봅니다.
학생들이 똑똑하지요?
???산학아!!!!
혜경이에게 너무 좋은 우리의 것을 보여 주었구나.
정말 잊혀져가는 굿이였는데................
언젠가 죽치고 앉아서 볼일이 있을 때 나도 죽치고 싶구나.ㅎㅎ
갑짜기 어린 시절 이집 저집에서 굿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꽹과리 소리와 춤추던 무당을 신기해하며 쳐다보던 생각이 난다.
윤순영 선배님!
울릉도 잘 다녀오셨지요?
전시회에서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얼마나 사람을 볼 줄 모르는지....
굿당에서 갑자기 봉투가 필요해 둘러보니 후덕하게 생긴 분이 바쁘게 다니더라고요.
아! 집안 일을 도와주는 분이구나 해서 부탁을 했습니다.
"아줌마, 혹시 봉투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여기엔 은행 봉투뿐이 없는데 그것이라도 괜찮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아줌마가 선생님의 수제자, 무형문화재 전수자이더라고요.
늘 사람을 잘못 알아서
당하고는 가슴을 치는데
이 날도 역시 실수투성이었습니다.
어릴적 엄마따라 몇번 가본 기억이나네요
역시 인간은 강한척 해도 나약하기
그지없지요
보이지 않는 신에게 매달리며 위로받고
어제는 절에가서 아버지 기도했어요
왕생극락 하시게 해달라고
돌아오는 길에는 든든하더라구요
그게 인간의 모습이겠지요
오랫만에 엄마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어요
글도 어찌그리 감칠맛 나게 잘쓰는지
산학후배 읽고 있으면 그자리에 내가
있는것 같아요
화창한 날 즐캄했어요
위의 제 글에 빨간색 비추천이 주홍글씨처럼 새겨지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릅니다.
무속신앙에 대해 글을 썼다고 비추천이 되었을까요?
세계의 역사를 볼 때 제일 큰 전쟁이 "종교전쟁"입니다.
현재도 중동의 화약고는 종교가 그 원인이지요.
현재 어느 나라에서는 기도하는 곳을 지었는데 어느 종교이든 가리지 않고 기도를 하라고
이슬람, 기독교. 불교등 건축물을 묘하게 합성해 지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성철 큰스님과 서로를 존중하며 교류한 사실은 너무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요.
그런데
우리의 잊혀가는 것들이 안타까와 올린 무속신앙이 주홍글씨라니 마음이 아픕니다.
내 것을 모르고 어찌 남의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덧붙여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무당의 어원이 왕이었다"라는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엄연히 학계에서 연구한 자료입니다.
인류학
언어학....읽다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권하고 싶은 분야입니다.
너무 재미있고 신기해하느라 댓글도 못 달았네.
혜경언니에게 큰 선물이 되었겠다.
암튼 산학이는 아는 것도 많고 연줄도 많고 ㅎㅎㅎㅎㅎ
다들 네 글과 실제 모습이 잘 합쳐지지가 않을 꺼야.
우리나라 고유의 것을 폄하하게 된 건 식민지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 온 종교는 그 문명과 함께 현대식이라는 미명으로 우리 생활에 침투했고
선교사들이 만든 교육기관이 많아지면서 우리 것을 모르면서 그 것이 최고라고 믿게 만든 교육이 또 문제였고............
정치권에서도 종교를 이용하다보니 우리 것이 점점 잊혀져 가게 됬지만
늦게나마 학계에서 연구들을 하고 이렇게 산학이를 비롯한 뜻있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으니
점점 제자리를 찾게 되리라고 믿어.
근데 왕이었던 무당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천민이 됬으니..............................................
산학아.
비추천에 대해 신경 쓰지마.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을 적은 보통 글에도 한상 한두개의 비추천은 있게 마련이던데
무슨 주홍글씨까지 들먹여서 그 것에 비중을 주니?
비추천을 한 사람이 노리는 게 바로 그런 마음 아니겠니?
그리고 세상에는 전원 찬성이라는 건 없어요.
다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니까 어느 것만이 옳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쟎아?
유명옥 선배님!
선배님의 깊은 지식에 존경의 마음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같은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볼 때에도
인접국인 일본과 식민지 시대를 겪은 한국은 엄청 차이가 납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가 세계 10대 교회중에 7개나 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이지요.
순복음교회가 세계에서 1위이고
인천에도 숭의교회와 주안장로교회가 포함되더라고요.
그런 현상을 어느 외국인이 연구를 했는데
한국의 국민성이라고요.
즉 냄비근성 이라는 것이지요.
빨리빨리 문화(건축물도 외국과 달리 후딱 짓습니다)
당파싸움에서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은 찢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묘한 심리
조그만 나라에서 전라도 경상도....지역색이 엄청 나지요.
종교가 들어와서 불같이 일어나는 곳 등등
이 모든 원인이 자원이 없는 조그만 땅에서 머리들은 우수한 민족이니
결국 남을 밣아야만 딛고 일어선다는 생존법칙이 이런 현상을 가져왔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유명옥 선배님!
사서삼경 중 "주역"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다 변한다"라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
인간도 그와 꼭 같아 어제 불행했던 사람이 오늘은 분명 행복해진다 라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지요.
그 옛날 유럽인들까지 벌벌 떨게했던 징기스칸의 영광이 사라지고 현재 몽골은 어떤 위치에 있나요?
6.25전쟁이후 세계에서 골찌를 지키던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하리라 누가 생각을 했을까요?
한 나라의 운명도 이러할진대
사람이 내일 일을 어찌 알고 함부로 행동할 수 있을까요?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선교방식과도 관련이 있다고 들었어.
일본은 초창기 영주계급을 중심으로 들어왔기때문에 상당히 고급한 정신세계를 우선시 했고
대신 정치바람을 많이 타서 박해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지.
오다 노부나가가 그 당시의 기존 불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수단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그 다음 히데요시는 또 그 세력을 꺾어야했으므로 박해를 하고..............................................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맹목적이 아니고 자기들 방식으로 자기문화와 접목시켜 승화시킨 게 많아요.
일본의 기독교인구는 1%도 안된다고 하는데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좋더라구.
소위 말하는 완전 인텔리래.
그래서 교회는 적지만 서적은 엄청 많이 출판된다고 그러네요.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빈민구제가 일차 선교의 수단이었기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물질을 주고 교육을 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것을 우리 것과 구별 할 능력도 없었고
약자들이다 보니 기존의 계급이니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여서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기보다는 없애는 게 더 좋았던 거지.
신분상승의 기회로도 활용했고.
물론 다 그랬다는 건 아니고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그렇게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초기에 들어 온 기독교는 천주교가 먼저이고
우리나라 개화기에는 주로 개신교가 들어왔는데
개신교의 탄생이 그렇듯 권위적인 것틀을 되도록 배제하고 합리성이라는 걸 중요시하는 특성상
기존의 틀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이것저것 금기사항이 유난히 많은 것이 한국개신교의 특징인데,
이 것도 그 당시 선교대상이 생활이 엉망인 사람들이 많았기때문에
그걸 개선할 수단으로 정한 것들이 그냥 기독교강령처럼 되어 버린 것이 많다고.
그래서 한국의 지식층은 기독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기독교 본연의 정신은 접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끼친 나쁜 것만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자기 자신을 완전 희생한 애국지사들 많은 분들이 신자들이었고 헌신적인 선교사님들도 수없이 많거든요.
우리 남편이 아들들이 어릴 적부터 교회에 가기를 원하지않은 것도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가지의 틀을 집어넣는 건 위험하다는 주장이었는데
나 자신 딱히 거기에 반박할 이유를 못찾았다는 게 나홀로 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유.
그나마 남편이 애들에게 이제는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굳이 종교를 가지겠다면 엄마가 믿는 것으로 통일하라고 한 것만도 참 대단한 발전이야.ㅎㅎㅎㅎㅎ
집안에 종교 분쟁만은 일으키지 말라고!
역으로 생각하면 나처럼 자아가 형성된 상황에서 받아들여진 종교란 맹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그래서 기를 쓰고 모태신앙을 강조하는 것 같아.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신앙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오기가 쉬우니까.
세상에는 인연이라는 게 있듯 종교도 인연이 있는 듯 해요.
난 엄청난 자석의 힘이 끌어당기는 듯한 거역할 수 없는 이끌림에 교회로 돌아왔걸랑요
.(물론 순전히 내 개인 적인 느낌이지만요)
하나님에게 찍힌 기분이었어요.
유명옥 선배님!
그래도 성공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자식들에게 "엄마가 믿는 곳으로 다녔으면 좋겠다" 하셨으니까요.
교수님이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아무리 뜯어봐도 아내의 언행일치가 맘에 드셨으니 그리 말씀하셨겠지요.
저희 집도
결혼을 하면 시집을 따라야 집안이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형제는 종교가 골고루 다 섞여 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엔 카톨릭 학교라 4년간을 수녀님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동안 수녀님들의 고되고 힘든 신앙생활을 직접 보면서 "아무나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교편생활은 기독교 재단이라 채플이 있었고 직원회의도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이라 해서 겉멋에 몇번이나 읽기도 했고요.
그러나 결혼을 하니 시어머님께서 독실한 불교신자라 절에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 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종교도 다 인연이라는 선배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일본에서의 기독교,....
제 친구가 동경에서 교회를 다니는데
몇사람이 모여서 시작한 교회가 제법 커졌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목사님이 오신다 하니까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되는 신도들이 김치를 새로 담그는 등 야단법석을 떨더랍니다.
제 친구는 그런 경우를 못 보았기에 의아했던 모양입니다.
왜 목사님이라면 껌뻑하냐 이 말이지요.
그러면서 자기는 한국에서라면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거라 하더라고요.
오늘 선배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제 친구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선배님!
하나님에게 선택된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비추천????????????
참 비겁한 사람들의 짓이다.
왜 댓글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데 얼굴을 가리고
숨어서 비추천을 하는건지.........
언젠가 인터넷 악풀을 신고 해서 조사한 일이 있는데
인터넷 아이피를 추적해서 보니까 의외의 결과가 나왔댄다.
겉으로는 점잖고 학벌도 좋고 교양있는 즉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화이트 칼라들이 많았다는구나.
얼굴 가리고 악풀 쓰면서 자기의 욕구 불만을 표출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신과 의사가 말했어.
우리 홈피에서 저 비추천 제도는 없애야 될꺼 같아.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풍토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문제에 찬성 반대를 의견 조사할 때는 무기명으로 하면 되고.....................
윤순영 선배님!
한번은 제가 궁금해 물었습니다.
"성인이 누구냐고요?"
돈에 깨끗한 사람이면 성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으니 돈으로 잣대를 삼는 모양입니다.
결국 거지가 성인일 수 있고
농사짓는 농사군이 제일 정직해
오히려 배운 사람들보다 훨씬 나아 배울 점이 많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부자가 천국 가는 길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야 할 만큼 어렵다고 했지요.
선배님 말씀처럼 교양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도는 필요해서 만든 장치이니 만큼
추천, 비추천도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왜 추천을 하는지 비추천을 하는지 이유를 이야기하면
"이걸까 저걸까" 설왕설래하고 넘겨 짚는 우는 범하지 않겠지요?
알고 싶어서 그런 글을 올린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실수를 했다면 다음에는 조심을 해야 하니까요.
?0/-2 ?라고 한것이 ' 비추천 ' 인가요?
무쟈게 똑!?한 사람들이 있군요.
난 몰라서도 사용을 못하겠네요.
종교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오히려 종파가 없는 사람들이 더~~포용력이 있는것 같두만요.
다들 자기종교가 젤이라고 빡빡 우기는 사람은....???
제가 개신교 택하지 않고 천주교를 택했다고
친하게 지내던 선배언니가 연락을 끊고 산지가 오래 되었구만요.
종교는 의무가 아니고 자유인데 내종교가 최고라고 하는 쌀라미는......응!응!응!!!
신앙심이 깊으신 나의 대모께서, 며느리깜이 개신교라고 둘이 좋아 죽는 아들에게
결혼을 반대해서 헤어지는것 보면서 너~~ㅁ 실망되더라구요.
울 며느리가 개신교이고 아들은 ?날라리천주교 신자였지만
지는 절대적으로 반대안하고 ?결혼허락했죠.
'종교의 자유' 를 무슨 의무인양 내세우는 싸라미들........
울남편은 이번에 정약용에 대한 책들과 "흑산" 이란 책을 읽고는
한국에 들어와 선교했던 외국인들에게 분개하던디요?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 못하고 즈그들 방식으로 바꿔 놓아서
많은 이들을 억울하게 죽게 만들고는 무명의 순교자들로 만들었다나요?
지는 안즉도 안읽어서 모르겠네요.
?"비추천"?이란것 이참에 없애는데 동의합니다!!!
하고 말하면 공산당입니까?????
?
우리들의 순영언니는 얼마나 조리있게 말씀을 잘하시는지
그 비결을 제가 내림굿식으로 전수받음 안될까요?ㅎㅎㅎ
내 친구 인선아!
나는 요즈음 "걱정이"라는 짚으로 만든 새끼 손가락만 한 인형 3개를 머리맡에 두고 잔단다.
우리 막내 여동생이 생일날 내게 선물한 인형이야.
얼마나 깜찍한지 몰라.
"걱정이"를 머리맡에 두고 자면
밤새 걱정이가 내 걱정을 대신 다 해 줘서, 내 걱정이 없어진다는 인형이니
"걱정이"를 두고 잘 수 밖에.....
이런 인형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그래서 나온 것이 종교인데
그것때문에 또 전쟁을 하고...........
"흑산"이라는 책
나도 구해서 꼭 읽어야지.
우리교회 원로 목사님께서 현직시에 해주신 말씀인데
일본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해서 배척하다가
너무나 많은 순교자가 생기는 바람에 일본 정부가 당시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정부에 요청을 해서
바티칸에서 회의를 하고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결정을 봤대.
그 후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허용하게 됬다고.
좀 웃기는 일이쟎아?
그럼 죽은 사람들은 다 어쩌라고?
그리고 인선아.
순영언니 조리있는 말씀은 우리 다 함께 배워야지.
너만 전수받으면 우짜니?
욕심쟁이네.
유명옥 선배님!
제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화합을 하는 날이지요.
우리 친정아버지는 고향이 함경북도로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만 생이별을 했습니다.
부모형제가 그리운 우리 아버지는
생사도 모르는 부모님을 위해 차례를 지내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어린 자식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명절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우리는 기억하고 백두산 아랫자락 명천을 그리워했지요.
그리고
그런 의미를 현명하게 판단한 바티칸..... 존경할 수 밖에요.
저는 오래전에 강금화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답니다.
외할머니께서 무당이셨다고 ..
카네기 홀에서 굿을 하셨다지요?
기립 박수를 받으셨다네요~~
남편이 바람 피우는게 사실이어도 아니니까 집에 가서 남편에게 잘하라고
말해 주었답니다.
멋진 상담가라고 생각되었어요~~
산학 선배님의 후기 글 잘 읽었습니다.
?도산학, 인간 문화재 "김금화 선생님"을 처음 알았네.
생소한 낱말들도 있고 사진이랑 잘 보았어.
밖에 강아지데리고 나가보니 벌써 파리공원 둘레 가로수에
빨강, 노랑, 초록, 분홍, 파랑, 주황, 자주색들의 등이 걸려있네.
석가탄신일 즈음에는 불이 켜지고 '법안정사"에도
벌써 등이 매달려 있더라.어찌나 색이 고운지 올려다보니
법안정사, 부처님오신날 이렇게 적혀있었어.
꼭 다른 동네같았어. 너무나 색이 곱네. 불이 켜지는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강화까지가서 수고가 많았네. 좀 쉬려므나.
재화야!
너희 동네에 있는 "법안정사"는 예쁜 절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 곳에 걸린 등 하나 하나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새겨져있을까?
등을 켜게 된 유래는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에 부처님이 오신다고 다들 등을 밝혔대.
돈이 없는 노파가 겨우 기름을 얻어서는 마지막에 등을 켰는데
시간이 흐르자 다른 등들은 다 꺼지고 그 등만이 환히 켜져있는 것을 본 부처님이
이 등만이 진짜 마음으로 켠 등이구나 해서 "빈자의 등"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등을 밝히는 이유는
결국 마음의 등을 켜라는 말인데
그것이 왜곡되어
요즈음은 등 하나에 얼마식으로 장삿속으로 변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
하기는 스님들이 일년동안 먹고 공부하려면 돈이 필요해 초파일 등장사를 해야만 하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재화야!
우리 종교를 떠나 마음의 등을 밝히며 살자.
전 사실 개신교에 몸담고 있고 일단 정한 약속은 죽기 전에는 지키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무조건 죽을 때까지 믿을 예정입니다.
스스로 정한 약속이니까요.
학교도 지금의 저를 보시는 분들은 믿기어렵겠지만 너무나 소극적이었기때문에
유정희선생님께서 일찌감치 이대로 정해 버리셨고
인천에서 통학을 해야한다는 집안원칙에 따르면
당시 허약한 편이었던 제가 다니기에 신촌이 을지로 6가보다 훨씬 가깝다는 이유로
여자대학에 들어갔는데 입학한 직후부터 후회하긴 했어요.ㅎㅎㅎㅎ
제 소성과는 아주 아주 안 맞았더라구요.
단지 입학예배( 이학교는 모든 의식을 다 예배로 하더라구요) 날 대강당에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가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어찌나 좋던지요.
전 4년 내내 채플시간이 가장 좋았어요.
허지만 매년 봄에 일주일씩 있는 부흥회가 끝나면 원하는 학생에게 주는 세례만큼은 주저되서 안받았어요.
세례받으면 평생 믿어야할텐데 그럴 확신이 서지않았거든요.
그 때 빗나간 신앙생활이 평생 발목을 잡다가 1997년부터 다시 교회로 갔으니 몇 년 만인지.......................
68학번이거든요. ㅎㅎㅎㅎ
어차피 음악을 한 사람들이 가장 가기 쉬운 곳이 개신교에요.
생각해보니 4년동안 수박겉핥기라고는 해도
매주 3번의 채플과 기독교문학을 배우고 음대에서는 찬송가반주법이니 합창이니 맨 종교음악만 했으니까요.
찬송가는 무지 좋았지만 그 당시에 기독교라는 종교는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교회생활을 하게 됬지만 (전 무지 기쁨이 샘솓더라구요)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를 가장 싫어하는 남편과 부딛치지않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했어요.
전 성격상 대강 거짓말로 무마하고 나가는 짓은 절대 못하거든요.
그건 남편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지요.
제사도 지내고 교회도 수시로 띵가먹고 이것 저것 비교회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저 나름의 철학이 필요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무지 모범생인 전(융통성이 없다는 뜻) 대강대강 하는 건 적성에도 안맞고 아주 못마땅 해요.
취미와 직업이 모두 책읽기인 남편의 논리적인 반교회논리에 대항하기위해서
성경공부반도 가고 기독서적을 그 당시 꽤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자주 집회에 출석할 수는 없으니까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테이프도 잔뜩 가져다 듣고
TV특강도 듣고(의외로 이거 효과 있더라구요)
암튼 제가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순종과 타협의 차이", "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의로움 의 차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긴 하지만 나름 가장 근접한 저만의 답을 찾긴 했어요.
"종교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더 잘 살기 위해서 종교를 갖는다 "
또 하나 "성경은 진리지만 그 해석은 사람이 한다" 는 거지요.
많은 부분 목사님들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간 설교말씀에 나의 모든 생활을 맞출 수는 없다는 결론!
참 밉살맞은 신자지요.
티를 안내기때문에 우리교회 목사님들은 저를 좋아하세요. ㅎㅎㅎ
맨 날 웃고 성실하고 반주도 열심히 하니까요.
힘들 땐 항상 여기다 대입하곤 합니다.
나름 열린 의식으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이 것이 순수종교 편에서 본다면 사이비 또는 나이롱 교인 이라고도 평할 수 있겠지요.
암튼 싸우는 것 보다 사랑하기가 힘든 건 사실이쟎아요?
근데 그런 일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잘 안들거든요.
우리 남편 왈
"암튼 엄청 튀는 여자!" 라네요.
너무 길어져서 일단 끝낼랍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상대를 무시하거나 싫어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유명옥 선배님!
"순종과 타협의 차이"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의로움의 차이"를
나름대로 생활철학으로 승화시키고 계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성경은 진리지만 그 해석은 사람이 한다"
이것을 극복한 종교가 이슬람이지요.
이슬람에서는 목사를 이맘이라고 하는데 전혀 설교를 하지않고 그냥 코란을 읽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성전은 설교를 하는 단이 없습니다.
그냥 앞쪽 한켠에 서서 읽고 끝입니다
경전의 해석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겠지요.
그런 모든 경계를 나름대로 터득하신
선배님께서는 나이롱 교인이 아니고 참종교인이십니다.
산학후배의 글을 읽고나니 나의 인일여고시절 어느날 깜짝 놀랬던 사건이 생각이 남니다.
바로 외숙님의 아주 먼친척 이야기였지요. (난 그당시 외가댁에서 학교을 다녔습니다)
그분은 집안이 아주 어려워 다라에다가
생선을 담고 아는집으로 생선을 팔러다니는 분이었지요. 늘 소박한 일차림의 한복에 너무나 얌전하여 얼굴도
제데로 못드시는 허나 늘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당시에 집은 정문을 드러서서
한참 걸어야 집안으로 들어오는 즉 마당이 컷지요. 그래서 대문에 띙똥 소리가 나면
으럐껏 어린 내가 달려가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 노릇을 즐겨했을때 입니다.
어느날 아마도 초가을인지 초 여름인지 띵똥소리가 나길래 달려가 문을 여니
바로 그 생선파시는 아주머님이셨는데 그날은 생선 다라가 없이 그냥 손에 손수건만 쥐신
모습으로 복장은 여느때와 똑같은 일차림 한복의 모습으로 왜 오늘은 생선 다라를
않갖고 오셨을까 하면서 들어오시라고 인사를 하곤 난 곧장 내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들어오셔서 외숙모님과 만나신지 아마도 십여분이 지나쓸때인가
갑짜기 하늘을 찌르는둣한 고음성이 나고 꽝꽝 방 벽과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나길래
슬그머니 외숙모님 옆방을 들여다 보니 바로 생선 파시는 수줍어서 얼굴도 제데로 못드시는
그아주머니의 음성과 어렷을때 여러번 보았던 바로 무당이
하는 모습 그데로 였는데 꿈에 어디 어디 가서 방울을 찾으라 하여서 찾은것이고
곧 내림굳을 해야된다는 말을 듣었고 그때그분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넘 생생하며
내머리속에 50여년이나 고대로 남아 있답니다.
김숙자 선배님!
오랜만에 "다라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정감이 넘치고 자연스레 옛날로 돌아갑 니다.
예전엔 무당들이 신이 내리면
꿈에 본 계시대로 이곳 저곳을 다니며 무구들을 찾아내 스스로 굿을 했다지요.
그것을 "걸립"이라고 하더라고요.
선배님의 외가에도 걸립을 하러 온 것이고요.
어디에 무엇이 있다를 알 정도로 옛날엔 무당들이 정말 용했는데 요즈음은 좀 시시하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저희 송림동에도(일명 샛골) 송림시장에서 부침개를 팔던 아줌마가 신병을 앓고 그 자리에서 무당이 되었습니다.
다들 부침개만신이라고 불렀는데 작두를 타는 등 굉장했지요.
그런데 저는 그것이 무서워 한번도 구경을 못했는데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고초를 겪다보니 꼭 한번은 보고싶어 이번 강화행을 추진했습니다.
다 사람사는 이야기.......
다녀 오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산학 후배,
이제 집에 돌아와 한 이틀 몸살을 앓고 이제 좀 정신이들어 사진들을 들여다 봅니다.
귀하고 귀한 문화재 만신이 드리는 굿구경을 시켜주고 또 맘 껏 사진도 찍게 허락도
맏아 주어서 얼마나 얼마나 고마왔는지요!
생전 처음 보는 굿구경은 내가 기대했던 요란한 어떤것과는 달리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이고, 측은하고, 담담한 예식이였습니다.
만신의 굿거리는 너무나 단정하고 섬세 하여서 나이 많은 지휘자의 지휘를보는듯
간결함에 묻힌 힘을 보았어요.
나 때문에 일찍나오게 되어서 얼마나 미안했었는지요.
큰 파일의 사진은 아직 열어 보지 못하고 작은 파일의 사진 몇장 올립니다.
점심을 못 먹고 간다고 섭섭해 하시는 만신의 모습은 여뉘 할머니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었다.
혜경언니 집으로 돌아가셨군요.
하도 바쁘신 것 같아 전화 해보기도 주저됬는데 죄송하네요.
만나면 한없이 좋지만 제가 뭐 도움 되는 일이 별로 없어서요.....................................................
그래도 이렇게 전시회를 하고 미니 음악회도 하고 너무 의미잇고 좋더라구요.
내년에도 꼭 하세요.
혜원이도 이제 불붙은 것 같쟎아요?
명옥아,
집에 오기전에 전화를 보니 받지 못한 전화가 있더구나
얼마나 미안한지!
난 핸드폰 전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놓고 다니기도 잘하고
한번 꺼 놓으면 그대로 두고 해서 미리 알지를 못했네
그래도 이번에는 연습하는것도 보고, 전화로 이야기도 하고
덕분에 미니 음악회도 하고 .....즐거웠어.
문화가 다른 사진을 거는일에 조금은 망설임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동문들도 만나고 또 네 피아노도 듣고 했으니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
희순이 언니 형부님도 같은 말씀을 하시더구나.
"내년에 꼭 또 하세요, 그럼 이렇게 선생님도 뵙구......."
미선이네 사랑방에서 수다 떨기회가 없어서 좀 섭섭했다만
내년에도 꼭 도보록하고 ㅡ 그리고 점더 커진 걸 보여주도록 하자
어제 목사님 설교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답니다.
죽음에 관한 것이긴 했는데(결국 삶에 관한 것이지요)
모세가 에급에서 40년을 왕자로 살다가 광야생활 40년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아마도 유모노릇을 했던 생모의 사망시점이 아니었을 까 하는 것이었어요.
40년 간 자라는 동안 90% 이상이 에급식 교육으로 채워지고
생모가 전해주고 싶어했던 유대민족의 믿음이며 정체성은 아마 10%도 되지 못했겠지만
그 것이 가슴 속에 잠재해 있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돌출되었을 꺼라는 해석을 하시더군요.
결국 교육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겠어요?
눈에 띄게 뭔가가 금방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화산이 폭발하 듯 ~~~~~~~~~~~~~~~~~~~~~~~~~~~
언니와 혜원이의 사진전을 보면서 또 그 일을 진행하는 형제들의 따뜻한 우애를 보면서
돌아가신 언니의 부모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됬어요.
그리고 언니네 행사 때마다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
그건 물론 언니를 비롯한 형제들의 따뜻한 인간미가 중심이겠지만
그 뿌리는 60년 이상을 베풀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공덕 덕분일 꺼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저만 해도 언니와의 각별한 인연이 있지만 그 위에 부모님께 뭔가 아주 작은 거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거든요.
요즘 어른들이며 선배님들을 보면서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의 일생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리구요.
이 이야기 꼭 하고 싶었는데 언니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에요.
잠깐 동안의 렛슨에 뭔가 환 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거였거든요.
앞으로도 기회있을 때 또 부탁드려요.
암튼 이런 거 다 하려면 우선 건강해야겠지요?
전화 말인데요.
도무지 시간 계산이 어려워서리......ㅎㅎㅎ
전 늦은 밤 아니고는 언제나 괜찮아요.
수요일 저녁에 집에 없고(오후 5시에서 9까지)
저희집 인터넷 전화 LG라서 LG끼리는 공짜래요.
유명옥 선배님!
김혜경 선배님께 도움되는 일이 별로 없다고요?
제가 보기엔 그냥 한집안 식구 같은데요.
그 날
작은 음악회...
고생 많으셨습니다.
산학후배!
오늘에야 이 방에 들어와서 봤네.......
저 위의 헤경선배님이 찍으신 흑백사진은 지난번 사진전에 올려놨으면 참 좋았을걸 그랬어요.
한국에 가서 산학후배를 만나고와서 참 반가웠어요.
좀 더 오래 얘기도 나누고 신포동시장에 가서 빈대덕도 사먹고 우동도 사 먹는건데, 아주 많이 아쉬었어요.
처음 만나본 산학후배의 인상이 참 좋았어요.
차분하면서도 아주 다부진 사람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어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함께 더 긴 시간 가지면 좋겠어요.
김춘자 선배님!
갑자기 다낭 여행을 다녀오느라 이제야 서둘러 들어왔습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 고행길인듯 힘들었는데
선배님의 이번 한국행을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대단하셨음을 인정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선배님을 처음 뵙고 얼마나 좋았는지요!
홈피에서만 만났는데도 전혀 어색하지도 않고 십년지기인양 반가왔음은
선배님의 특유한 서글서글한 친화력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여러 사람들 속에 둘러 싸여서 긴 이야기는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것저것 챙겨주셨지요.
선배님께서 주신 꽃다발도 잘 말라서 아직도 거실 한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또 다른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유명옥 선배님!
베트남 여행이 이번이 두번째인데 갈 때마다 다른 매력을 느낍니다.
8년전엔 우리나라 50년대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한국에 가서 돈벌러 가는 남편을 위해 가족전체가 배웅을 하는데 공항바닥에 빙 둘러앉아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경이
우리나라 전쟁 직후 돈벌러 독일로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가족을 연상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나라 군인들이 배를 타고 이곳 다낭에 들어와 전쟁을 한 흔적은 사라지고
거리를 활보하는 활기찬 오토바이의 물결을 보면서
베트남의 장래가 밝음을 보았습니다.
가난하고 열악했지만
과거 중국과 미국등 강대국을 상대로 싸워 이겼고(미국이 진저리를 내고 물러났지요)
얼마전에도 영해를 침범했다고 중국어선을 향해 발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림도 없는 일을 그들은 소신을 갖고 행동하는 당찬 민족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누가 베트남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거리를 활보하는 오토바이의 물결속에서 도도한 베트남의 미래를 가늠하고 왔습니다.
선배님!
참 이상하지요?
우리나라만이 중국을 무시하고 일본을 무시하고 다른 나라를 막 무시하니 말입니다.
산학후배가 내게 댓글을 안 달아줘서
은근히 얼마나 걱정했나 몰라.....
다낭여행이란 뭐지?
베낭을 여러개 메고 다니는 여행인가???
이것저것 챙겨주다니........
사실 산학후배에게 주려고 가지고 간 선물이 다른 친구에게 갔고,
내가 산학후배에게 준 그 선물운 내 친구가 내게 준 선물인데,
그 선물을 산학후배에게 줬고, 산학이가 내게 준 선물은 어느 선배님에게 갔고,
산학이에게 내가 준 선물은 산학이가 어느 선배에게 줬고 그 선배는 그 선물을 자기 친구에게 줬고.........
내가 어제 그 선물얘기를 듣고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나 몰라.........
내가 산학이에게 준 그 선물이 지금은 어디에 가 있을까?????
내가 산학이에게 준 그 꽃다발은 산학이네 리빙룸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니
참 고맙네.......
다음에 만나면 내가 산학후배에게 줄 선물에 이름을 새겨 놓아야겠어..........
정말 만나게 되어 참 반가웠어.
신포동 시장에 ㄱ 우동 못 먹은거 아직도 생각할수록 아쉽다.
김춘자 선배님!
같은 시간 속에 컴앞에 앉아 있다니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다낭은
베트남의 어느 도시이름으로 (넓은 입구 라는 뜻) 월남전때 우리나라 군인들이 배를 타고 입항한 곳이랍니다.
이제 개방한지 일년도 안 돼 다소 생소한 곳이지요.
선물 이야기...
너무 재미있습니다.
한번 이곳에서 밝히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최종 목적지는....
그리고 몇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선배님께서 다음에 한국을 나오시면
그 때에는 제가 신포동은 책임지겠습니다.
산학후배!
산학이는 7기들 환갑여행에 못 왔는데
이번에라도 오면 좋을텐데.......
오면 내가 정말 잘 대접해 주고 싶은데.......
산학이의 마음을 난 알것 같다.
ㅎㅎㅎ
난 원칙적으로 받은 선물을 그냥 내가 지니고 있다가
오랫만에 만나는 엄마나 동생등 식구들에게 나누어주는 정도인데
뭐든지 일단은 포장지를 다 뜯고 점검을 해요.
간혹 홍삼제품이니 차 종류는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 보내기도 하지만
문제는 유효기간을 확인 안하면 실 수 할 때가 있어.
상대도 어딘 가에서 받은 걸 들고 오는 경우에 유효기간이 달랑달랑 하더라구.ㅎㅎㅎㅎㅎ
그런 경우 이해는 하지만 별로 감사한 기분은 안들더라.
화장품도 유효기간 있어요.
정식매장에서 산 것들은 그게 널널 하거든요.
우리는 동양권에서만 살아서 합리보다는 마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상대가 좋아할 게 뭔가를 생각해야하니까 있는 거 재활용은 잘 안되는 편이지.
김춘자 선배님!
선물 이야기를 하니
오래전에 읽었던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부부가 선물을 하려고 남편은 대대로 내려온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빗을 사고
아내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시계줄을 마련했으니
결국 선물은 다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주옥같은 단편 말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깊은 사랑만은 확인을 했으니
더 이상 무슨 선물이 필요했을까요?
영양크림이든 색조화장품이든
내게 소용이 되던 말던
받아서 고마웠고 주어서 기쁘면 그만 아닐까요?
그것도 여러 사람이 나누었으니 더욱 행복합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은혜를 입으면 꼭 그 사람에게 갚지 않아도 된다고요
훗날 나도 누군가에게 그 사람처럼 남에게 베풀면 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돌고 돌아 언젠가는 꼭 가야 할 사람에게 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봅니다.
김춘자 선배님!
선배님을 만나면 행복해지는 마음.....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요?
순애야!
초파일 시청앞에 축하등위에 화투와 트럼프를 그려 본드로 붙여놓겠다?
진짜 좋은 발상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봤어.
불교계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으로 이번 초파일에 신도들이 절에 가지를 않고
대신 집에서 각자 기도를 올리는 것은 어떨까 라고.
그렇다고 썩은 곳이 정화 될까?
곪은 것은 터지기 마련이다.
불교계의 현직 윗사람들이 좀 썪었다고 모든 불교인이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부처님께서 무슨 죄가 있다고 그 탄신일을 그렇게 망치겠어?
난 기독교인이지만 그건 좀 찬성할 수 없다.
그 대신 대대적인 정화작업은 이루어져야 하겠지
공직자들이 줄줄이 뇌물수수다 해서 엮였다고 모든 공무원들을 매도하면 안되듯이 말이야.
기독교는 뭐 그런 일 없나?
세상이 워낙 부패하고 종교계도 돈이 많아지고 소위 말하는 권력이 생기다보니
그냥 잘살고 싶어하는 무리들이 종교에까지 침투한 것 아니겠니?
지도자급 사람들이 정치판처럼 더럽게 선거운동하는 판이니
그렇게해서 뽑힌 사람들에게 뭘 기대하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야.
내가 대학 때 설문조사를 하면 배우자의 선호도 중 꼴찌가 순경과 목사였다고 기억하는데
얼마 전에는 목사가 앞에서 두번 째던가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설문조사대상이 일반여성들이었으니까 종교와는 별 상관이 없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긴거쟎아?
우리교회에 부임해오시는 목사님들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 담임목사님도 그렇고 부목사님들도 목사님자녀가 많은데
한결같이 "죽어도 목사는 안되겠다"고 결심들 하셨대요.
그만큼 목회자의 생활이 어려웠단 이야기지.
내가 보기론 목사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그 가족이더라구.
사모가 옷하나 입는 것에도 입을 안대나
목사자녀는 어린애도 아닌지 싸움만 해도 뭐라 하고
세상에 그런 시집살이가 없는데
대형교회로 가면 목사님 가족이 로얄훼밀리가 되더라구.
명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의 말씀 중 많은 것이
종교가 돈이나 권력이 생기면 위험하다 는 거 였어.
우리가 인간인 이상 그런 게 손에 쥐어졌을 때 처신이 쉽지 않다는 거겠지.
우리같은 서민도 평소에는 절약잘하지만 어디서 목돈 생기고 집안일 안해도 된다면
심심풀이로라도 해외로 명품쇼핑다니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우리나라 국민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너무 잘하는 것 같아.
교회에서도 (난 아는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 목사님들에게 정신적인 것을 의지하는 건 좋은데
암튼 뭐든지 특별대우를 하다 보니 받는 쪽도 점점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더라구.
20여년 전에 유명한 해운대의 달맞이 갈비집에 친정 어머니 모시고 갔는데
스님이 어떤 여자랑 홀에서 버젓이 갈비뜯고 있더라구.
놀라신 우리 엄마가 유심히 바라보니까 그 쪽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종업원총각이 민망한지 웃더라구.
그 사람 말로는 아주 흔한 일이래요.
일단 스님은 외모로 금방 표가 나고 불교는 육식을 안하는 걸로 알려져있는데(혹시 교리가 바뀌었나?)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당당히 애인인지 신도인지는 몰라도 주거니받거니...............................
그 용기는 대단하다고 느꼈어.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요.
적어도 종교지도자들이 달나라에서 온 게 아니고 썪었다고 탄식하는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뽑힌
비슷한 인간들이라는 걸 우리가 자각해야하겠지.
어느세계나 장이 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성이 그렇쟎아?
대학도 진정한 학자는 보직을 달가워 안하고
스님도 무슨 감투나 큰 사찰 주지가 되는 걸 원하지않을테고
목사님도 본부 감투에 연연하는 분들은 다 그렇다고 여겨지네요.
그런 사람들에게 뭘 기대하는 게 우리의 과오지요.ㅎㅎㅎㅎㅎ
결국 "혹시나가 역시나" 에요
이런 일을 계기로 대대적인 정화운동이 일어날테니 오히려 잘된 것 같다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구.
유명옥 선배님!
오랜만에 순경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정겹습니다.
오늘은 초파일 연휴라고 다들 길 떠날 채비로 도로가 꽉 막혔습니다.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도 호황이랍니다.
그런데 집에 죽치고 있으려니 괜히 심술이 날둥말둥.....묘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청빈의 길을 택함으로써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을 했건만
제자라는 이들이 오히려 욕망에 눈이 멀어
부처님의 뜻을 욕되게 합니다.
물론 평생을 청빈으로 살다가신 성철 큰스님같은 분도 계시기는 합니다만.
청빈하게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요즈음 통합진보당의 난리를 보면서
조선일보에 이런 컬럼이 실렸습니다.
"조지 오웰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 라고요.
영국의 사립명문 이튼스쿨 출신이지만 부랑아, 죄수, 창녀등 하류인생의 편에 서고싶어
대학도 포기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등, 뻣속까지 좌파로 살았지요.
이런 그가 가장 경멸했던 부류는 관년속에서만 노동자를 변론할 뿐, 실제의 삶은 강남 좌파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런 좌파의 눈속임을 폭로하기 위해 좌파정당을 떠나 정직한 글쓰기에 몰두하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1984"등의 작품들이
21세기 지금 대한민국의 통합진보당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라는 내용이지요.
":도덕성이 빠진 혁명은
탐욕적인 권력의 주인만 바꿀 뿐
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없다." 라고 부르짖던 조지 오웰이
패권주의가 되어
도덕적 원칙들을 몰아내고 자기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행위를 정당화하는 지식인들을 보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요?
종교이든
정치이든
청빈하기만 하면야.....
유명옥 선배님!
즐거운 연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에고 인간들이 하는 게 다 혹시나가 역시나다 그지?
난 맨 날 연휴& 맨날 노동!
항상 그게 그거인 일상이야.
요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아니고 암튼 권력은 자주 바뀌어야 해.
누구든 그 자리에 가게 되면 변질하쟎아?
못누릴 때는 정의를 부르짖다가도 막상 가지게 되면
그 방면에 경험이 없어 세련되지못해선가 더 적나라하게 치부를 들어내니.................................................
자기들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라 겁없이 이상적으로 엄청 날카로운 잣대로 몰아세웠는데
실제로 권력과 금전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에는 면역이 안생긴 것 같아.
청빈하게 살기야 물론 힘들겠지.
난 그렇게까지는 바라지않고 그저 도둑질들이나(그 것도 아주 큰 도둑질) 안하면 좋겠다는 정도인데.
시대가 시대니만큼 스님들도 가끔 육식이야 섭취하시더라도
룸살롱에 도박은 좀 ......................................................................................
웃어야하나~~~~~~~~~~~~~~~~~~~~~~~~~~~~~~~~~~~~~~~~~~~~~~~~~~~
사회적으로 이렇게 불교를 질타하고 나서도 큰 사찰이야 뭐 영향입겠나?
감투 쓴 사람 몇 바뀌는 정도일테고 (개인에게는 좀 손해가 되겠네.ㅎㅎㅎ)
규모도 작고 겨우 살아가는 곳들만 그나마 있던 신도가 줄어서 피해보겠지.
우리 가깝게 살면 차라도 나눌텐데 아쉽다.
유명옥 선배님!
지난 일요일(5월 20일), 경기도 광주에 소재한 앵자봉이라는 산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천진암"이라는 천주교 성지로 유명한 곳이지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와 전파된 곳으로
670M 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산세의 굴곡이 심해 숨어서 전파하기에 적당한 산이었나 봅니다.
이벽이란 분이 "천주공경가"를 이곳에서 짓기도 했으며
정씨 집안과 친해 정약용, 약종, 약전및 이승훈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합니다.
이런 성지를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천주교 대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주춧돌이 세워지고 많은 참배객이 다녀가곤 하는데
우리 일행이 이곳을 지나 앵자봉으로 올라가려 하니까 출입을 막는 것입니다.
이유는 성지이기에 등산복 스틱등의 차림으로는 안되고 오기 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법도 아니고
설혹 개인 소유의 땅이더라도 다니는 길은 내 주는 것이 법인데 하며 분통을 터뜨려도 말이 통하지를 않아
결국은 먼 길을 돌아 올라갔습니다.
종교가 커지니까
이렇듯 사람을 무시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네요.
이슬람성전을 들어 갈 때에는 입고 간 옷 위에 그곳에 비치해놓은 까운과 두건을 쓰고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참배객들에 대한 배려이지요.
그리고 파티마 성당등을 여행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져 말도 조심조심 , 발걸음도 조심조심 그렇게 조신해질 수 밖에 없는데
좀 과잉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산행에서
페이스 북, 본사 건물에 벽화를 그린 데이비드 최 라는 청년의 아버지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에 이 청년에 대해서는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산학 후배,
그간에 많은 아야기가 올라 왔네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은 바로 위에 보니 어딘가 에서 데이비드 최의 아버지를 만나셨다니
산학후배를 따라 다니는 특별한 운명적인 인연이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듭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런 독특한 이야기가 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것 행운이 아닐지요?
그림값을 회사 주식으로 받아서 일약 부자가 되었다는 그 청년의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다음 이야기 정말 기대 됩니다.
늦었지만 은희 언니 형부께서 찍어주신 사진 올려 드릴께요.
은희 언니 형부님께서 디렉팅하신 멋진 모습 입니다
늦게 도착 하신 희순이 언니가 드디어 함께 하셨네요.
굿이 시작하기 전에 조용히 생각에 잠기신 김 시인님, 그날 사진도 감사하고 만신에 관한
정보도 감사 했습니다.
대을 이어간다는 젊은 고수, 모습에 만만치않은 일을 해나가는 의지가 보였습니다.
앞마당에 이제 막 피어난 철쭉꽃과 예식에 쓰였을까? 바랜 색색의 헝겁끈들의 조화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제 막 시작돤 내림굿. 잔잔한 음율의 목소리에는 많은 기원이 담겨있는듯 했습니다.
혜경언니 들어오셨네.
우리 것이라고는 해도 낯설기 그지없는 굿 판 모습 위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니까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아줌마에요.ㅎㅎㅎ
조 위에 보이는 예쁜 아가씨는 경선이 딸인가요?
"~~~~
산학후배를 따라 다니는 특별한 운명적인 인연이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듭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런 독특한 이야기가 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것 행운이 아닐지요?~~~~~~~~~"
저도 동감이에요.
산학이를 따라다니는 운명의 끈 같은 게 느껴지더라구요.
유명옥 선배님!
제 조카를 예쁜 아가씨라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아이는 제 4째 동생의 딸로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으로 출장 중 굿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차안에서는 쿨쿨 잠만 자더니
굿이 시작되니
어찌나 흥미있어하던지 눈도 떼지 않고 보더라고요,
대학을 인류학과 다녀서 그랬나 봐요.
요즈음 아이들은 미리 다 검색을 하고 와서 그런지 제가 오히려 배웠고요.
김정웅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엔 언제 하루 날을 잡아 강의를 청해 들어야지 했습니다.
저 사진 속의 장고잽이가 교수님께 반했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 하셨겠지요?
김혜경 선배님!
올려주신 사진을 보니
그 날이 바로 어제인양 설레입니다.
전혀 생소한 분야를 더듬으며 한순간 일탈을 꿈꾸었던, 함께 했던 분들도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살고 있겠지요?
그리고 제가 무슨 글을 쓴다고
어떤 특별한 운명이 따라다닐까요?
다만 잡문 수준이지만 남들은 티를 안내고 있을 때, 저는 이렇게 떠들고 다니니까 그리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데이비드 최...
궁금하시지요?
2005년 페이스 북 사장 숀 파커가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낙서(그라피티)스타일의 벽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 그 주인공을 수소문했습니다.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그만 회사에서 광고 일을 하던 데이비드를 숀 파커가 찾아내
팔로알토 본사 건물의 벽화를 요청하였습니다.
그 당시 페이스 북은 벤쳐 수준으로 현재 8억명 이상이 가입한 초인류 기업이 될 줄 그 때는 몰랐겠지요.
회사에서 데이비드의 광고가 속속 히트를 치자
회사는 그에게 0.25%의 지분을 약속했대요.
그 돈이 2500억 정도라니........
얼마 전엔 백악관의 요청으로 버락 오마바의 초상화도 그렸는데 그것이 또 화제를 몰고와
이고저곳 방송국에 출연을 한 모양입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가 제고 출신으로
그림을 잘 그렸으나 먹고 살기 위해 경영학과를 나왔고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모든 것이 여의치 않던 중에 아버지의 소질을 물려받은 둘째 아들이 일을 낸 것입니다.
좋은 일이 터지자 데이비드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부모님께 대저택을 사 드리고
형제들을 대학을 보낸 일이라고요.
제고 동문들이 부부동반으로 그 집에 초대받았는데
입들을 다물지 못 했다고요.
분명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인데도 왜 이렇게 좋을까요?
대한민국 화이팅 입니다.
그 날 제가
데이비드의 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얼마나 뒷바라지를 잘 하셨으면 아드님이 그리 되었을까요?"
그 분이 제게 들려주신 대답이 "제가 한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엄마의 기도 덕분입니다" 라고요.
엄마의 간절한 기도...
우리가 어느 종교를 믿든 기도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함을 새삼 깨달은 하루였습니다. ?
?산학아 귀한 굿구경을 하고 왔네.
읽어내려가며 피~~~ㅇ 돌던 눈물이 콧물까지......
내가 천주교신자이지만 아직도 나의 핏속에는 어쩜
무속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네.
만일 내가 그자리에 있었다면...?
어쩜 나도 천장을 찌를듯한 막춤을 추었을것 같다.
몇년전에 성당에서 성탄절에 각구역별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울구역은 신나는 뽕짝을 틀고서 막춤이었어.
모두들 각자가 자유형으로 막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내가 느끼겠더라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그야말로 방방거리는거야.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몇분을 그랬던것 같아.
성당의 몇사람은 그걸 ?본것 같아.
내얼굴이 상기되어서는 갑자기 털같이 뛰더라는거야.
그래서 그랬지. 춤삼매경에 잠시 빠졌었노라고.....?
암튼 귀한 무형문화재의 굿춤사위를 보았으니 ? 운수대통? 일세그려!!!
일년 열두달이 너의 흑룡 환갑걸이니 !?!?
?그것도 ? 도산학?의 홍복일세!!! ? 추카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