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회 - 게시판담당 : 최경옥, 정환복,설인실 - 11회 모임터 가기
아버지를 보내드리며...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부친과의 슬픈 이별...
어느 정도는 예견했었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으나
돌아가시기 전 날 밤까지도 몇 시간 후의 이별을 알아채지 못한...
그래서 임종을 못 한 불효의 회한으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임에도 처음 겪는 상이라 예와 절차도 몰라 더욱 황망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
찬송가 607장의 한 구절........돌아가신 아버지의 비문에 새겨질 문구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1살 청년으로 해방을 맞이하시고, 몇년 뒤 6.25전쟁을 겪으며
북으로부터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오신 많은 아버지들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저희 친정집 거실에는 아버지가 손수 그리신, 고향 동네가 너무나 정밀하게 묘사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을 함께 보면서 그곳에서 오리를 같이 잡으셨다며 즐거워하시던 고향 분들은
이제 거의 다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십니다.
오랜 세월, 친필로 쓰시고 삽화까지 그려 넣으신 회고록은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고....
고향의 부모님과 두고 오신 동생 분들의 생사 확인도 전혀 못하신 채 일생을 사신,
분단 조국의 산 증인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돌아가시기 훨씬 전, 강 건너 북쪽 땅이 보이는 파주 통일동산공원묘원에
당신의 누울 자리를 스스로 준비 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본향으로 가신 영혼은 이제 자유로우실 것이지만,
저희 후손들에게 하신 한 맺힌 당부대로
고단하셨던 육신은 이제 그곳에서 그리운 고향을 바라보며 잠들어 계십니다.
5남매 중 맏딸인 저는, 남여를 전혀 차별하지 않으신 신식(?) 교육의 영향으로
아버지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야함을 배운 행운아이기도 했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1년에 한 두 번은 집으로 전교 선생님들을 모두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시고,
입시 준비로 바쁘던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생일이면 여러 명의 남 여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배려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게 해 주신 분이셨지요.
큰 일을 겪으면서...
아직까지는 우리 전통적인 방식이 대부분인 장례 예식에
4대 독자인 남동생이 외롭게 보일 것을 걱정하기도 했으나
너무나 많은 주위 분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요.
특히 우리 인일 동기들...우리가 수십 년전에 졸업한 여학교 임에도, 마침 동생도 인일13회여서 더욱 의미가 있던
인일여고 조기를 ...제일 먼저 보내주셔서..
자녀들 인일여고 보내 놓고 좋아하시던 아버님 영전에 놓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바쁜 중에도 멀리서 가까이에서 직접 찾아와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문자로, 전화로 따뜻한 위로을 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마땅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우선 글로나마 감사인사 드리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후의 잊지 않고 기억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2012. 2. 6. 친정 아버님의 장례를 치루고 ......김명희 드림
명희야
아주 큰일을 당해서 감당하고 넘어가려니 많이 힘들겠구나.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하는 딸이 있으신 분은 인생을 아주 잘 사신 듯 하다.
너무 슬퍼하지 말렴.
명희의 꾸김없고 당당한 포즈가 어디로부터 나왔는 줄 알겠네.
다 아버지 영향이었구나.
어느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가족 분단의 아픔을 지니고 사신 그네들의 한 또한 ,가슴이 아프네.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리시던 부모님을 만나셨을까?
명희이름에 반가와 들어 왔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인천이라 그런가 너무 많은 친구들이 모두 같은 사연들을 갖고 있는것 같다.
그 분 들을 지켜 봐야 하는 우리 세대의 아픔이겠지.
한 분 두 분 가시고 나면 그 끝자락은 ... 안타까움은 어찌 될지...모두의 가슴속에서 엷어져 갈지...
올해 아흔아홉이신 우리 아버지도 그리움의 끝자락을 붙들고 아직도 혹시나 ... 하신다.
명희야 아버님은 너와 항상 함께 하실꺼야. 안녕.
아직도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나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아버지의 부재가 너무나 서늘하여
다시 쉽게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지고, 여전히 때때로 눈물이 나면서도
한동안 잃었던 입맛 돌아와 맛있는 것 찾아 먹고,
TV 보며 까르르 웃고,
내 자식 앞날 걱정하고,
맘에 안드는 정치가 비난해가며,
오르락내리락하는 혈압수치 신경 쓰며 '운동해야지' 결심하고
시간은 또 흘러가고, 한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온 자신을 봅니다.
먼저 경험한 많은 분들의 모든 말씀들이 때로는 상반되는 부분까지
구구절절 다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긴 세월 아버지의 고향에 대해 들을 때마다 무심하게 지나친 여러가지 일들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우리 나라의 현실과 함께
갑자기 너무나 아프게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
같은 처지의 부모님을 두신 공감의 답글 주신 김일견 선배님,
일면식도 없는데..... 따뜻한 위로...진심으로 감사해요.
미국의 경수, 재순이 ...잘 지내지?
이번에 인천에 실향민이 엄청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네.
고향 그린 세월이 60년도 넘었으나 아직도 기약없음이 너무나 안타깝고....
jego.net 에서
제고 17.허 인
아버님을 여윈 동기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
특히 실향민이어서 공감됩니다.
저희 어머니는 이미 안 될 거 같고
저나 어머니 고향에 한번 갈 수 있을지....
어머니 언니와 조카가 함흥에 있는데...
한번도 머리 속에서 잊어버린 일 없이
기다리고는 있는데...
(제가 글을 달 수 없어 이곳에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명희야, 너무 놀라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몰라 이제야 한마디 쓴다.
그저 너와 슬픔을 같이 나눈다.
나는 일찍 아버님을 여위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항상 아버님이 살아계시지.
내가 좋은 일 있을 때는 같이 기뻐하시고 내가 힘들 때는 같이 힘들어하시는
나의 아버님. 나에게 예쁘고 빨간 스케이트를 사주신다고 하셨던 아버님.
지금도 내 마음 속에 계셔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나를 격려하고 계시지.
명희 아버님도 명희 가슴 속에 살아 계셔서 명희와 함께 해주실거야.
언젠가는 만나 기쁨을 함께 하며 오래도록, 오래도록 함께 하겠지.
그날을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런지.
명희야, 힘내라.
명희 아버님도 명희가 씩씩하게 견디며 사는 것을 보시면 기뻐하실거야.
달리기 잘하는 우리 명희. 대견하다 하시며
슬픔을 같이 나누며.
아, 제고 17회 허인 선배님도 안녕하신지요?
여전히 재미와 위트가 넘치는 미동북부방 꾸미고 계시지요?
진심어린 위로 넘넘 감사합니다.
모처럼 웃었어요.(이유는 잘 모르겠고 선배님 글만 보면, 반갑고 재밌어요.)
그러잖아도 제 동생 (13회)의 남편인 제 매제(분명히 손아래죠?..)가 제고 17회입니다.
그 동기분들 어찌나 의리가 있으신지 장인상을 당한 제부에게 아주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답니다.
아주 고마웠습니다.
평소에는 너무 형식적이다....하며 비판적이었던 모습들까지
큰 일을 당하고 보니 다 뜻이 있고 위로가 되는 걸 경험했지요.
함경북도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일가친척이 한분도 안 계셔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재순이 일부러 허선배님 글 전해주어서 고마워.
경숙이 오랫만이야. 네 진심어린 위로 도 많이 고마워.
인일 홈페이지에 글도 쓰고 그래야하는데 한동안 잘 못했네.
자주 보도록 노력하자.
명희후배의 글을 읽으며 돌아가신 아버짐 생각이 나서 ,,,
우리 아버지도 이북 에서 월남하신 실향민,돌아가실때까지 잊지못하시고
눈만 감으면 대동강변에서 썰매타던 이야기며 고향집이 보이신다고 늘 말씀하셧죠
우리아버지도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추모공원 한자락에 마지막 육신으로 누우셧답니다
작년 11월 어머니를 만나셧으니 이젠 외롭지 않으시겟죠.
아마도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리운 형제자매 친구들 고향집을 드나들며 행복한 안식을 취하실거라고
믿고 우리 위로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