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보내드리며...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부친과의 슬픈 이별...

 

어느 정도는 예견했었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으나

 

돌아가시기 전 날 밤까지도 몇 시간 후의 이별을 알아채지 못한...

 

그래서 임종을 못 한 불효의 회한으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임에도 처음 겪는 상이라 예와 절차도 몰라 더욱 황망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

 

찬송가 607장의 한 구절........돌아가신 아버지의 비문에 새겨질 문구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1살 청년으로 해방을 맞이하시고, 몇년 뒤 6.25전쟁을 겪으며

 

북으로부터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오신 많은 아버지들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저희 친정집 거실에는 아버지가 손수 그리신, 고향 동네가 너무나 정밀하게 묘사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을 함께 보면서 그곳에서 오리를 같이 잡으셨다며 즐거워하시던 고향 분들은

 

이제 거의 다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십니다.

 

오랜 세월, 친필로 쓰시고 삽화까지 그려 넣으신 회고록은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고....

 

고향의 부모님과 두고 오신 동생 분들의 생사 확인도 전혀 못하신 채 일생을 사신,

 

분단 조국의 산 증인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돌아가시기 훨씬 전, 강 건너 북쪽 땅이 보이는 파주 통일동산공원묘원에

 

당신의 누울 자리를 스스로 준비 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본향으로 가신 영혼은 이제 자유로우실 것이지만,

 

저희 후손들에게 하신 한 맺힌 당부대로

 

고단하셨던 육신은 이제 그곳에서 그리운 고향을 바라보며 잠들어 계십니다.

 

 

5남매 중 맏딸인 저는, 남여를 전혀 차별하지 않으신 신식(?) 교육의 영향으로

 

아버지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야함을 배운 행운아이기도 했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1년에 한 두 번은 집으로 전교 선생님들을 모두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시고,

 

입시 준비로 바쁘던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생일이면 여러 명의 남 여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배려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게 해 주신 분이셨지요.

 

 

큰 일을 겪으면서...

 

아직까지는 우리 전통적인 방식이 대부분인 장례 예식에

 

4대 독자인 남동생이 외롭게 보일 것을 걱정하기도 했으나

 

너무나 많은 주위 분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요.

 

 

특히 우리 인일 동기들...우리가 수십 년전에 졸업한 여학교 임에도,  마침 동생도 인일13회여서 더욱 의미가 있던 

 

인일여고 조기를 ...제일 먼저 보내주셔서..

 

자녀들 인일여고 보내 놓고 좋아하시던 아버님 영전에 놓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바쁜 중에도 멀리서 가까이에서 직접 찾아와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문자로, 전화로 따뜻한 위로을 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마땅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우선 글로나마 감사인사 드리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후의 잊지 않고 기억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2012. 2. 6. 친정 아버님의 장례를 치루고 ......김명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