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저의 아버님께서 11월 22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어요.
모든 장례절차가 다 잘 끝이 나고 이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멀리서 함께 마음 아파해 준 친구들께 늦게야 감사 인사 드립니다.
그날 함정례, 한혜련, 하덕실, 장혜자 친구들이 장례식장까지 와 주었어요.
다음은 11월 25일 아버지 천국 환송 예배 때 읽은 제 동생의 조사입니다.
연구에 몹시 바쁜 일정이지만 마지막 석주를 함께 지낼뿐 아니라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버지 소천소식에 와이프를 데리고 다시 와서 장례식에 참석하고, 즉시 그길로 다시 돌아갔어요.
함께 온 와이프는 정성껏 조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러 모두에게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해 주었고
동생은 할 말 많은 우리들을 제치고 조사를 준비하여 아버지 가시는 길에 마지막 효를 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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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우리 아버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제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인자하신 미소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제게 물려주신 귀한 선물들에 대해 짧게나마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1923 년 일제시대에 김포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하시어 구사 일생으로 살아나시고
대한민국의 근대화의 역사에 참여하셨던 산 증인이십니다.
또한 시골과 서울, 또 서울과 미국을 넘나드는 글로벌 시대를 직접 개척하신 선구자이셨습니다.
일본말을 일본 사람들 만큼 유창하게 잘 하시고
1981 년 58 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이민을 오셔서도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셔서
오시자마자 미국 사람들과 거래하고 체크 북을 사용하실수 있었던 성공하신 비지네스 맨이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것은 1966 년, 칠남매 중에 막내로 아버지 연세 45 세의 늦둥이였습니다.
저와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나셔서 할아버지 같이 느꼈던 적도 많이 있었어요.
참고로 제 와이프가 실수로 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몇번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나는 것은 50 대에 오토바이를 사서 저를 뒷자리에 태우시고
여기저기 시골길을 드나들며 인삼재배 사업에 전념하시던 때의 일입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등뒤에서 아버지 허리를 꼭 잡고 가면서
정말 멋있는 아버지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네, 아버지는 정말 멋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먼저 제게 개척정신에 대한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영어로는 Pioneering Spirit 이라고 할수 있겠는데요, 제게 항상 도전하는 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어렸을 적에 저를 서울로 유학보내시고
인생을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셨습니다.
1980 년 초에 미국에 이민을 올수 있었던 것도 시대를 앞선 교육환경을 저희에게 제공하시려는 노력이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아버님의 개척정신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개척정신은 제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뇌 연구에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아버지는 저와 제 형제 자매들에게 가정화목의 중요성을 솔선수범하여 보여주셨습니다.
Family Spirit 이라고 할수 있겠네요.
제 평생 어머니와 씨우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사랑과 존중으로 어머니를 대하셨고
저희들에게는 웃음과 흥겨운 노래로 항상 마음을 기쁘게 해 주셨습니다.
아마 저는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좋은 예로 제가 결혼하려 할 때 장모님이 저를 처음 만나시고 첫 인상이 맘에 안드셔서 너무 속상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견례에서 저희 아버님의 호탕함과 친절하신 모습을 보시고 그냥 안심하셨다고 나중에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저를 비롯 제 형제들이 한결같이 가정에 충실할수 있었던 바탕에는
가정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따뜻함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진정한 나눔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영어로는 Sharing Spirit 이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부귀 안일에 욕심이 없으셨습니다.
항상 검소하게 사셨고 끝까지 근면히 일하셨습니다.
언제나 남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나서서 하셨고, 농사를 지어도 풍족히 수확하시고
남는 부분을 즐겁게 나누셨습니다.
이 자리에 우리 아버지가 주신 아채나 과일, 비누 등 하찮은 사탕이라도 받아보지 못한 분이
거의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나누는 일에 노력하셨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어디서나 행복한 웃음과 흥겨운 노래로 즐거움을 나누셨습니다.
정말 옆에 같이 있고 싶은 분 넘버 원 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거예요.
이런 아버지께서 이제 그 한 생애를 다 사시고 천국으로 소천하셨습니다.
그 파란만장의 90 년의 영향력있는 인생을 다 사시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개척정신, 가족사랑 정신, 그리고 나눔의 정신은 아버지 대신 저희들 곁에 남아
자자손손 함께 할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막내 창준 올림.


순영선배님 선배님도 친정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군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 권사님과 꼭 칠개월을 사셨는데 너무나 행복해 하셨어요.
그분도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해 드렸구요.
그래서 저희들이 다 못한 효도를 그분을 통해 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 유품 정리를 하는데 많은 것을 버리고 챙기고
그리고나서 카펫 샴푸도 하고 벽에 페인트 칠도 해 드렸지요.
이것저것 고쳐드리고 불도 더 밝혀드리고...
완전 새 집이 되어 버렸어요!
그 다음날에는 우체국으로 은행으로 서류정리를 다 해드리고
아침마다 산책을 같이 하였어요.
그러기를 일주일..이제야 모두 다 끝이 났어요.
그분이 너무나 고마워 하다 못해 감격해 하시고 참으로 기뻐하셨어요.
우리 아버지께서도 참 좋아 하셨으리라 믿어요.
다만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해드릴 것을...참 죄송하기만 했지요.
그때는 해 드리고 싶어도 너무나 아무것도 안 버리고 싶어 하셔서 못해드렸어요.
제가 시간이 이렇게 많이 남아 돌아서 할수 있는 것도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구요.
그 권사님에게 들은 자기 인생이야기... 제가 언제 써서 올려 보려고 해요.
이런 좋은 일 뒤에는 빛들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더라구요.
아무튼 장례식이 잔치같이 되었고 이 동네 큰 이야기 거리가 되었답니다.
정다운 답글 참 감사드립니다.
인선아!
저 밑에 있는 사진 아버님이시니?
인선이가 아버님을 참 많이도 닮았구나.
얼굴 뿐만 아니고 성품도 닮았나봐?
동생의 조사는 비단 너희 아버님께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께 바치는 글 같다.
요즘처럼 그야말로 몰라도 되는 , 아니 알고 싶지도 않은 뉴스가 연일 방송이며 신문을 덮고 있을 때
인선이가 올려주는 글들은 친구 집안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산소처럼 답답한 숨통을 티워주는 신선한 동화같은 이야기였어.
참 사람이 90이 넘어서도,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시면서도
저렇게 보람있는 일을 하실 수가 있구나 싶어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준다.
이제 어려운 고비도 다 지내고 남은 여생 큰 걱정도 없다고 하면서도
습관처럼 수시로 나오는 불평과 욕심을 다스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정말 인선이네 이야기는 책을 내도 시리즈로 엮어야할까봐.부모님, 형제들,외숙부님이야기에서
노숙자까지 데리고 들어오는 인선이~~~~~~~~~~~~~~~~~~~~~~~~~~~~~~~~~.
더 늙기 전에 한번 묶어봐라.
정다운 명옥아
글쎄 내 동생이 그러는데 그 사진의 아버지는 나랑 정말 똑같아서
장례식 도중에 킬킬대며 웃더라고.
슬라이드 쇼를 만들어 돌렸거든.
우리 장례식은 잔치집같이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몰라.
우스운 이야기 하나씩 풀어 보려고 해.
아버지만 생각하면 입가에 웃음부터 떠오르니 말이야.
근데 너 노숙자 운운은 이제 제발 그만 두어주렴.
어쩌다 목사님때문에 했던 일이니 내게 크레딧 올것이 하나도 없거든.
그리고 계속 도와주지도 못했고.
너는 기억도 참 좋다.
글쎄 말이야 니 말대로 우리 가정사를 책으로 묶어도 좋겠지?
너무 좋게 봐줘서 고맙다.
좋은 겨울철, 12월 지내고 늘 건강하기를...
인선아!
뒤늦게나마 아버님께 조의를 표한다.
너의 동생의 조사를 읽으며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닦기가 바빴다.
그렇게 훌륭하신 아버님을 둔 너와 너의 가족들이 부럽구나..
우리 아버지는 60을 넘기지 못하시고
자식들만 많이 낳아 고생하시다 돌아 가셔서 너의 아버지가 부럽기도하다.
이제 천수를 다하시고 좋은데로 가셨으니 아쉽지만 이별을 좋게 받아드려라.
아버님의 명복을 빈다.
인선아~
너의 글은 항상 가슴 가득히 풍성함과 따듯함을 일게 한다.
동생분 글도 맘이 찡하게 와 닿는다.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 잘 간직하고 기도 많이 해 드려.
너도 몸 잘 추스려라.
인선아,
아버님의 사진에서 네 얼굴이 그대로 겹쳐지네.
고마와.
애들에겐 쑤신다고 말도 못했단다.
운동 하지 않아서라고 야단만 맞을 거 같아서.
오늘 처음으로 걸었는데
계속 해야겠다고 하면서 얼마나 그 다짐을 지킬런지...
보스턴에서 잘 지내렴.
그리고 또 보자꾸나.
고마와, 여러가지로...
인선아 ~!
아버지 추모의 글을 읽고...
나도 늘 그리워 하는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
언뜻 댓글을 쓸수 없었단다.
이리저리 시간 보내며 나의 맘을 추스려 이글을 쓰고 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얼마나 두분이 힘드셨겠니?
모두 훌륭하게 잘가르치시고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고간 인선이의 아버지....
주님의 사랑으로 편하게 눈감으셨을 인선이의 아버지....
영원한 안식처에 계실 인선이의 아버지....
너의 어여쁜 성품이 아버지를 닮아 그런가 보다.
큰일 치루느라 애썼으니 몸과 맘 다잡고 건강하기 바란다.
?수고 많았네
최선을 다한 효심을 더 사랑넘친 네 삶속에서 영원히 계실꺼야
인선아
이별의 과정 성실한 가장의 일생을 한편의 영화가 무색 할 만큼 감동적으로
잘 올려 줘서 나머지 생활에 크게 도움 받을 수 있구나
좋은 동창들로 홈피가 아름답고 진솔한 대화의 터로구나
그간의 올린 글들에 감사하고 아버지의 천국 영원한 그곳엔 오로지 평화이리라
용선아 최선을 다한 효심이란 어림없는 이야기야.
워낙 그동안 멀리 떨어져 살고 아버지 귀가 어두워져서 전화조차 자주 못해드렸거든.
하나님이 마침 좋은 기회를 주셔서
우리 아들 집이 보스톤이고 마침 아기 데이케어가 2월에나 시작할수 있다더니
11월 중순에 자리가 하나 나서
나는 마음 놓고 아버지 곁에 있을 수가 있었어.
효도도 주님이 허락하시면 할수가 있더라구.
우리집은 여동생이 다 도맡아서 해서
나는 멀고 여유없이 산다고 많이 봐주셨는데
이번에 며칠 곁에 계셔드렸더니
가시기 전날 나에게 고맙다...하시더라구.
눈물이 쏟아져서 혼났어.
그래도 임종은 못해 드렸는데 마지막날 밤에는 첫째 며느리가 새워서
그도 효도 한자락은 하도록 아버지의 좋은 안배였다고 믿어지더라.
아무나 임종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더니 거의 날마다 지켰는데도
아쉽게도 못했어.
글다운 글도 못되는데 열심히 읽어줘서 고맙다 용선아.
용선이도 화이팅~
??? 인선 후배!!!!!
동생분의 조사 너무 감명깊게 읽었어요.
생전에 친정 아버지의 사랑을 둠뿍 받고 자란 나는 내 아버지에게 바치는 조사인양
울컥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인선씨의 아버지의 글 모두 시리즈로 읽고 동감하고 있었답니다.
우리들이 노년이 됐는데도 90살에 재혼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도 지금 마음이 옛날이나 변한게 없으니 노인들의 감성도 젊은이와 같다는 것을
일깨워준 아버님의 재혼 이야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는데........
다행이 할머님에게도 영주권이 나왔으니 아버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란 생각이 들고,
또한 따님들의 품성을 본 받아하겠다는 생각도 들고 합니다.
아버님이 천국에서 영원히 평안을 누리시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