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내놓고 이야기하기 민망한 이야기일까만 아버지께서 어떤 아주머니를 좋아하신다. 

결혼하신다고 결심도, 수속도 이미 끝내셨다.

그래서 다음 주말로 아주머니가 아버지 아파트로 이사를 들어 오신단다.

올해 연세가 만으로 90 이신 아버지께서 새 장가 드시는 소식인데 멀리서 응원하기로 했다.

 

그동안 노인 아파트에서 홀로 적적하게 사시던 아버지는 "어떠세요?" 전화로 여쭈면 늘 "그냥 그렇지 뭐." 하셨다.

기운없는 소리로 "혼자 사는 게 다 괜찮은데 외로워.." 하시더니 요새는 쩡쩡한 소리로 "살맛이 나, 참 재미있어."하신다.

조금만 박자를 맞춰드리면 본격적으로 자랑이 분수처럼 뿜어 나온다.

"내 맘에 꼭 들어. 음식도 참 잘하네. 부지런 해." 등등.

기쁨처럼 사랑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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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신지 이제 꼭 3년. 그 엄마와 63 년 결혼생활 동안 금슬이 특별이 좋으셔서

"평생 나는 니들 엄마와 한번도 안 싸웠어.."라고 말도 안되는 자랑을 입에 달고 사시던 아버지께서 

왠 늦 배신을 이제 와서 하신담? 물론 아들들이 질색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몸 안에 새 피가 잘 안 만들어지기 때문에 매 주 한번씩 무슨 주사를 맞고 오실 정도로

병원 가는 일이 주요 소일 거리가 되신 분이요, 전립선 암도 최근에 발견했는데 웬 주책이시냐고 했다.

 

한국 사는 남동생은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고 싶어했다. 아들만 둔 부모들은 이래서 서러운가 보다.

아버지께서 살면 얼마나 더 사시냐구?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딸들인 우리 두사람은 맞장구를 치며 환영을 한 일이었다.

얼마 안 남은 인생길에 잠시라도 행복하시면 되지, 왜 안되는데?

아들들, 지들이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해 드린게 그리 많이 있는데? 하며 의기투합해서 밀었다.

그 일은 암에 걸리신 것을 알게 된 직후에 생겼는데 여동생이 단골 미용사의 부탁을 받고

아버지와 그분을 연결해 드린 것이 히트를 치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암에 걸리신 것이나 모든 사정을 잘 알고도 그 아주머니가 간절히 원하셔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사연은 이렇다.

 

그 아주머니는 70 살이시다. 그러니까 20 살이나 더 어리고 우리 아버지의 세상 떠난 맏딸보다 다섯살 밖에 많지 않다.  

동생이 그분을 만나보니 용모 단정 정도가 아니라 그 연세에 예쁘시기까지 하시더란다.

지금껏 일도 하시며, 정말 그럴까만 돈도 많이 벌어 놓은 노인네라는 것.

"세상에..노인네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는데?" 물었더니

사우나에서 때밀이로 일하시는데 세신사(洗身士)라는 직업이 그리 만만히 볼 것이 아니란다. 

미용사나 웨이트리스처럼 현금 수입이 많아서 경쟁도 만만치 않은 직업이라는 것이다.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 사람 다루는 요령부터 있어야 잘 해낼수 있고 오래 견딜수 있다나.

 

그래서일까, 집에서 노는 노인들 마냥 굼띠지 않고 빠릿빠릿하고 활력이 넘치신단다.

일찍 남편과 이별을 하고 세 자녀를 혼자 몸으로 다 교육, 자립시킨 후 미국에 여행차 오셨다가 눌러 앉은 케이스.

그러나 미국에는 아무 연고자도 친척도 없단다.

 

인사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나 한 눈에 반하셨지만 아버지는 사양하셨다.

다른 친구를 대신 소개해 주시마고 하셨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2 년이나 어떤 할머니가 끈질기게 따라 다녔지만

절대로 마다 하셨기에 그래서 그때는 엄마 생각하고 그러신가 보다고 모두들 생각하였다.

그런데 진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번처럼 마음에 꼭 드는 할머니가 따라 다녔으면 어찌 되었을찌..ㅎㅎㅎ

 

동성동본은 아니라도 뿌리가 같은 똑같은 성씨여서 "친척이 무슨 결혼이냐?"며 뒤꼬리를 흐리는 기세가

마음은 끌리지만 자신이 없다는 듯한 속내를 딸들에게 잡히셨던 것이었다.

우리들이 "요즈음에는 동성동본도 사촌만 넘으면 결혼이 합법이래요." 하며 달려들어 거들어 드렸다. 

모든 일이 확정된 요즈음 와서 아버지는 동생에게 진심으로 "참 고맙다."하셨다고. 

동네 할머니들도 동생에게 "참 잘했어. 진짜 효도한 거야." 하는 분이 여럿 있더란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고 하는 만고 진리에 입각해 볼때 이 일은 농담처럼 여겨질 일이 아니다.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노인들에게 무슨 꿈이 있고 낭만이 있으랴?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 나이에 도달하지 않은 우리들의 오만한 착각이다. 절대로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노인 아파트에도 설렘의 만남과 로맨스의 행운이 있는 법. 누구나 알듯이 마음만은 영원한 이팔 청춘이 아니던가!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다정다감 하셔서 인기가 무척 좋으신 분으로 손꼽히셨다.

엄마 살아 계실 때도 할머니들에게 인기가 너무 좋다고 어떤 때는 짜증이 날 정도라고 하셨다. 

한번은 "지들이 암만 그래봐야 뭘.."하면서 속을 삭이시던 엄마를 옆에서 본 적이 있을 정도.

 

끊임없이 아버지를 모셔 내가려고 하는 할머니들은 아버지 노래에 반해서였을까?

왜냐하면 아버지는 100 여곡의 유행가 가사와 가락을 지금까지도 기억하신다.

기분이 좋은 날은 노래들을 마음껏 불러 제끼시는데 기분도 항상 좋으신 편이다.

인상을 찡그리고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노인네들 사이에 우리 아버지는 단연 군계 일학처럼 밝고

어린아이 같이 천진 난만하시다. 

 

얼굴이야 어메리칸 인디안 처럼 생기셨어도 남자다운 등치가 있으시고

아직도 반듯한 자세와 온화한 웃음을 유지 하시고 계시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자랑거리가 되셨다.  

아버지는 그 세대 보통의 한국 남자와는 달리 정신적으로 50 년쯤 앞선 분이셨으니까.

돈 많은 시골 유지였을때 아무리 화류계 여자들에게 유혹을 받더라도 

"나는  한번도 한눈 팔지 않았어"'하시며 평생 병치레를 하신 약한 엄마 한 사람만 극진히 아끼셨으며,

우리 칠남매를 "피리를 불어주마아~ 우지 마라 아가야~" 하는 자장가로 키워주셨으니까.

 

한번은 타주에 사는 내가 노인 아파트로 방문했을 때 마침 가까이 사는 며느리가 왔다.

그때 어느새 아버지는 상을 차려 놓고 "명화야, 와서 밥 먹어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아버지 저도 있고, 엄마도 있고, 올캐도 있는데 왜 아버지가 상을 차리세요?" 했더니

아버지 말씀이 "이렇게 하는게 더 재미있지 않니?" 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며느리가 반찬을 해다 드리기도 하지만 아버지 자신도 가끔씩 삼계탕 같은 별미를 만들어

아들네 딸네 집에 직접 배달까지 해다 주시는 유례가 없는 신식 노인네!

게다가 그 연세에 아직까지 운전을 직접하고 다니는 몇 안되는 근사한 노인네시다.

토요타 그 차를 새 차로 사서 헌 차가 된 지금까지 그 동네 노인들의 발이 되어 주셨으니

아버지와 친하고 싶은 사람들이 왜 아니 많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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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인들이 아무 일도 할수 없다고 하는가? 

58세 53세이던 30 년전에 막둥이를 박사 만들 꿈을 안고 이민 오신 부모님은

미국에 도착한 처음부터 영어 모른다고 뒤처져 있지 않으려 하셨다.

그날로 두째 아들 사업을 도우신다고 배달도 다니시고 픽업도 다니셨다.

아, 지금도 생각이 난다. 시카고 우리 집에 도착하시던 날, 영어로 원 투 쓰리를 백까지 써달라고 하시더니

부지런히 쓰고 또 쓰며 연습하시던 것을.

그래서 국민학교 4 학년 학력이 전부인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혼자 개인수표를 쓰실 수 있다.

 

뉴저지로 이사가셨을 때 아버지는 천직을 다시 찾으셨다. 그 이름 농부!

시골에서 인삼포를 경작하시고 평생 밭농사를 조금 지으시던 기본 실력으로 농사일을 시작하셨다.

나이나 언어문제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노인사회에서 우리 아버지는 3 년전, 87 세까지

손수 채소밭을 가꾸어 용돈을 벌으신 것이다.

그 부지런함으로 손녀들 시집갈 때마다 2천불씩이나 부조돈을 챙겨 오셨다.

그렇게 평생 일을 하신 그분들 눈에는 돈벌이 할 일들이 항상 눈에 뜨인다고 하셨다.

한국 가면 한국에서, 미국 오면 미국에서 자신들이 할수 있는 일을 찾아 하셨다.

돈 버는 일에 순발력이 없는 게으른 우리들을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억척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어쩔수 없이 걷어 버리셨지만 장장 15년이나 보물단지처럼 채소밭을 가꾸셨었다.

말이 하기쉽게 채소밭이지, 얼마나 두분이 수고를 많이 하신지 우리는 안다. 인건비도 물값도 안 나오는 그런 일! 

노인 아파트에서 15 분 운전 거리에 있는 채소밭은 아파트 단지내 빈터를 주인에게 공짜로 얻으신 것이었다. 

묵은 잔디 뿌리를 다 걷어내는 것만 해도 두 노인네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작이었을 것이다.

자갈들을 골라내고 흙을 엎고 거름을 주어 옥토를 만드는 것은 또 맨손으로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을까?

매년 더 커지는 그 채소밭은 손자 손녀들의 순례장소였다. 한국의 농촌 일부분이 미국의 도심으로 이사온 곳이니까.

한번씩 그곳에 가보면 오이, 호박, 부추 파, 마늘, 상추, 쑥갓, 아욱, 고추, 배추, 무우, 가지 등등

얼마나 기름지게 잘 자라던지! 콧노래를 흥얼대며 일하시던 아버지를 따라서 절로 행복해지는 특별한 곳이었다.

열심히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존경하여 손녀딸 하나는 매달 과일 바구니를 배달해 드린지가 오래 되었다.

 

심지어 한약 찌꺼기를 얻어다가 거름으로 쓰셨는데 그렇게 자식같이 잘 키운 채소들은

시장에서 파는 채소들과 맛에서 그 차원이 달랐다.

노인 아파트에서는 두분이 밭에 나갔다 오실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렸다가 빼앗다시피 사 간다.

대부분은 밤 늦도록 허리 쪼그리고 다듬어서 시장보다 세곱절 많게, 싸게 파셨다. 

어떤 사람은 맛있다고 타주의 자식들에게 소포로 부치기까지 했다. 그 동네분들은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고 하신다.

 

의사를 찾을 때나 누구를 만날 때나 채소를 꾸려다가 주는 것을 그렇게나 기뻐하셨다.

늘 남에게 무언가 줄것이 있는 생활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요즈음에는 사탕 할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사탕을 주머니에 잔뜩 넣고 다니며 만나는 아이들마다 손바닥에 넣고 손을 꼭 쥐어 주시니까.

 

한국 사람들 중에 우리 아버지 만큼 훌륭한 이민 정신을 가진 분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 특유의 친절, 근면, 열심의 기본 정신으로 사는 분들! 

그런 자세로 사는 분들 때문에 지구 끝 어디에 가도 이민에 성공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맨몸으로 쫒겨난 우즈베키스탄에도, 차별대우가 극심한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북극에서도 한국인은 살아 남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는 이민정신, 창조적인 개척정신은 누구라도 어디서라도 성공을 찾아주는 길잡이인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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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버지의 인품을 알고나서, 성공적 이민자로서 박사 아들과 쟁쟁한 의사 변호사 손주들을 두신 것을

알고나서 그 아주머니가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그 아주머니의 복이었다. 연세 많은 남자 노인네를 찾은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그 아주머니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즉 영주권이 없다는 것.

영주권이 없어보지 못한 사람은 꿈에도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것은 보통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쁜 사람들이 섞여 사는 이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는 치사한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까.

 

돈을 빌려가서 안 갚는 사람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달라고 하면 찌른다고 공갈 협박을 한다.

어떤 사람은 영주권 신청을 구실삼아 최소 임금으로 몇년씩 부려먹고도 아무일 안해주는 악덕 업주도 종종 있다.

동족에게서 더 큰 설움을 당한 수많은 불체자들이 이 미국땅 음지에서 17 만명이나 

눈물로 빵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공식적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국 사람 너댓명 중 하나는 불체자라고 한다.

한인 18 프로가 불체자이고 국가별로 6위에 속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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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주머니도 많은 불이익을 당하며 불안하게 살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영주권을 얻는 방법! 그것은 그녀에게 오로지 하나 남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미국 이민법상으로 불체자라도 시민권자와 결혼하면 4 개월 이내에 인터뷰가 잡히고

6 개월이면 임시 영주권이 나온단다. 그러나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어 온 사람은 그렇게 구제 받을 수 없고

정식 비자를 받아서 온 사람들 중에 불체자가 된 사람만 가능하다고 한다.

 

노인 아파트에는 남자가 여자 보다 훨씬 적어서 특히나 홀로 된 할아버지들이 드물다.

여자들이 평균 8 살을 더 살기 때문이다. 남자가 나이가 많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러나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있는 남자 노인네 신세는 완전 다르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니까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마자 아우성들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구제해주고 가야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동안에는 남의 이야기로 돌리고 조용히 사셨는데 그 이유는 엄마만큼 좋은 분을 만날 수가 없기도 하셨지만 법에서 금하는 일을 그리 내켜하지 않으시는 성품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그 아주머니에 대한 인상은 한마디로 "보통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하신다.

똑똑하신 그 아주머니가 우리 아버지같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네에게

결혼을 해 달라고 비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신분 문제 해결과 함께 노인 아파트 입주권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차지하고 사시는 노인 아파트는 한인촌의 중심가에 있는데

모든 것이 편리해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줄줄이 많고 한번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안 나간단다.

요즈음은 하나같이 다들 죽지 않고 오래 살기 때문에 도저히 웃 돈을 얹어 주고라도 차례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두 토끼를 단번에 잡을수가 있으니 우리 아버지가 딱 그사람인 것이다.

 

아버지와 연결이 되자마자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돌봐 드렸다.

틈틈히 찾아가서 음식도 해드리고 이야기 동무도 해드리며 잠간동안에 마음을 사로잡는 일에 완전 성공하셨다..

그리고 기다려서 아들들의 허락까지 받아낸 후에는 살림을 장만하기 시작하셨다. 

비싼 흙돌 장수침대요, 침대보다 더 비싼 고급 소파등, 아파트에 있던 낡아빠진 모든 것을 싹 버리고 

완전 새 신방을 꾸렸다. 평생 알뜰 우리 아버지 인생에 이렇게 화려한 것은 처음이시다. 

 

아버지께서 아주머니에게 마음놓고 여보~라고 부르시는 소리를 전화로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90 살 노인네의 결혼! 노인 아파트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동안 꿈쩍도 안 하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변하다니!

아버지는 그 아주머니가 사다 드린 예쁜색 새 옷을 입으시고 반짝반짝하는 얼굴로 모든 사람들 앞에 짜안~하고 나타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셨단다. 우리 아버지보다 새 장가를 더 잘드신 분이 없다고 수근수근 한단다. 하! 

상상해 보라. 커플 핸드폰을 아주머니가 선물로 마련해서 가져왔올 때 어떤 얼굴이셨을까! 

글짜가 댓자로 큰 노인용 핸드폰으로 올드 틴에이저 둘이 서로 전화를 해대며 소근 거릴 것을 상상할 수가 있지 않은가!

 

단순히 남에게 좋은 일도 하고 말벗도 삼으시라고 아주머니를 소개해 드린 일이 이렇게 좋게 열매를 맺어

잠깐 사이에 진짜 연애 감정까지 생긴 것은 정말 기적이요, 축복이 아닐수 없다.

아버지만 기쁜 것이 아니라 그 아주머니도 아버지가 찾기 어려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껏 존경과 사랑을 드릴 수가 있는 점에서 너무나 좋다고 하신다.

두분이 손잡고 함박웃음을 짓고 다니시는 것을 빨리 가서 보고 싶다.

 

이번에 깨달은 점은 이민 노인사회의 많은 문제를 이런식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것 같다는 것이다.

고령화 추세로 백세 가까이 사시는 분들이 많아졌는데 '외로운 노인들 짝지워 주기'라는 캠페인..어떨까 싶다.

부디 아주머니의 꿈이 다 이루어지고 오래도록 두분이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며 사시면 참 좋겠다.

이런 마음이 엄마에게는 배반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행운이요, 말년 대박이 아닌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엄마도 내려다 보시면서 빙긋이 웃으실 것이다.

"얘, 니네 아버지 대박 날 자격 있으셔~" 그러실 게다. 샘이야 조금 나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