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 갈까
갯골 생태공원을 산책하며
묵은 갈대숲속에 난 갈래길의
여러 개 화살표 사이에서
요절한 옛 가수 배호의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얼마만에 다시 보는 풍경인가.
지난 가을에 와보고는
이렇게 해가 바뀌고
봄의 한 복판에 와서야 다시 발을 딪다니
끌끌끌 혀를 찰 노릇이다.
영동고속도로를 머리에 이고 가로질러 가는 길
조금은 음침하고 정비되지 않은
썩 기분 좋은 길은 아닌 그 길을 통과해야만 하는
그 느낌 때문일까
난 그동안 운치있는 이 곳을 외면하고
멋스럽게 가꾸어진 해안도로를 산책코스로 즐겨왔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정말 운치있는 장관이 펼쳐지는데
마치 인공 조미료에 인이 배겨
첨가물이 안 들어간 음식은 맛 없어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것만 찾는
못된 습성이 있다.
산책 나오기 전에 이미 여러가지 일로 많이 걸었더니
그동안 운동을 게을리 했던 터라 금방 발바닥이 아파왔다.
오랫만의 산책에 욕심을 내어
기수습지 담수습지에서 한 폭의 동양화처럼
유유자적 노니는 철새들을 보며
한 발 한 발 유년의 추억을 되씹으며 걸으니
제법 멀리 와 버렸다.
해는 벌써 바다 끝을 향하고
왔던 길을 돌아보니
생태공원 입구가 아득하니 보이고
다리는 아프고
갈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이고~
빨리가서 밥도 해야는데...
중간 중간 쉬어가는 정자가 있고
여러 개의 화살표가 갈래길 앞에 서 있다.
고민이 생겼다.
어디로 가야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갈까.
마치 숨은길 찾기처럼
묵은 갈대숲 땜시 길이 안 보이니
다리는 점점 아파오고
참으로 난감했다.
담수습지 쪽으로 조금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풍차가 보이는 쪽으로 조금 갔다가
또 다시 돌아와 반대 편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가
그야말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였다.
결국 가장 대각선이라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입구쪽을 바라보고 걸었다.
그래도 길이 구불구불 나있어서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끝까지 걸어나와 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질러가는 길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몇번을 생각하다가 포기한 그 방향으로
길이 나 있었던 거다.
아~
눈에 안 보인다고 길이 없는 게 아니구나.
무슨 진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갑자기 골똘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익숙한 것의 편안함
낯 선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불편함
이런 이유들로 도전 의식도 없이
구태의연한 삶을 살았었구나.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닌데
내가 본 것이 다인양 하는 아집으로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을 구분 못하고
나와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무식을 떨며 살았음을
그래서
나의 그 고집스러움으로 인하여
누군가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기도 했겠지.
때로는 숲속의 아주 작은 풀 한포기에
눈길을 주는 섬세함으로
또 때로는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잘라낼 수 있는 결단을
때로는 수필을 쓰기도 하고
또 때로는 간결한 시 한 수도 지을 수있는
다양함과
유통성과
너그러움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마트에 가서 저녁 찬거리라도 살까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만치에 낯이 익은 노인네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안녕하세요?
그는 남편과 전도하다가 만났던
은퇴하신 칠순을 훌쩍 점긴 노 목사님이시다.
함께 식사나 하게 교회에 전화해서
목사님 나오시라고 하세요.
후배 목사 부부를 격려하고 싶으신
그 맘을 헤아리며
생선구이집으로 가서
너무도 맛난 저녁식사를 했다.
사람들의 염려 걱정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헛 걱정이라는데
나의 저녁밥 걱정은
이렇게 헛 걱정으로 끝이 났다.
갯골 생태공원의 이정표가
오늘 내게 그런 저런 교훈을 주었다.
혜수기 말이 명언일세.
나도 절대적으로 동감이야.
명자가 글을 정말 잘 쓴다.
아주 편안하게 술술 잘 읽히는 글이야.
계속 부지런히 많이 쓰셔.
글도 쓸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있는거 같더라.
좋은 글 잘 읽었어.
올리신 글에 처음 댓글을 씁니다.
제 신분도 목사이고 최명자님이 목사 사모라고 하셔서 동병상련의 마음도 느껴집니다.
아뭏든 봄날을 통해 알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 봄날 되신 분들도 저를 잘 모르실 것 같아서
이전에 제 고교동창회보에 서간문 형식으로 올렸던 글을 첨부하며 소개도 겸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하 첨부------------
J형!
수년간이나 같은 교문을 드나든 인연으로 이렇게 글월을 올립니다. 제 아들도 제고동문(44회 졸업)입니다. 아마도 형이 제 글을 읽을 때쯤이면 가을 단풍도 절정을 이루고 있겠지요. 직장 관계로 남부지역에 살게 된 동문들이 계시지만 거주를 위해 내려온 동문은 흔하지 않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창회보 편집위원께 발탁(?)된 모양입니다.
05:30
츄리닝 바지에 등산용 윗도리,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밑창이 거의 닳아버린 마라톤화 (20분도 뛰지 못하고 무릎에 통증이 오던 관계로 마라톤은 포기하고 거의 걷기에만 신겨지는)가 몸에 걸친 전부입니다. 첫발을 딛으며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막아 주시옵고, 오늘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하옵시며, 어제를 돌이켜보며 미래를 앞당겨 사는 오늘을 지혜와 명철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어둠 속에서 산들은 웅크리고 앉아 새벽미명을 맞고 있습니다. 빛들이 첩첩한 산들 저 너머에서 오고 있는 듯 능선을 따라 어슴푸레 빛이 길들고 있습니다. 도시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시골생활을 접어들었을 때 제일 처음 찾은 것이 어둠이었습니?다. 겨울에 접어들기 무섭게 오후 3시면 산그늘이 지기시작, 곧이어 발끝도 구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에워싸고, 난청지역이라 텔레비전도 안나오고 그냥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는데 밤 10시는 되었겠다 싶어 시계를 보니 7시도 안되었기에 집사람과 둘이서 실소를 머금은 적이 있었지요. 지난 밤 머리 위로 길다란 꼬리를 흔든 채 사라지는 별똥별하나, 저 별은 결국 하늘 어디에선가 산산이 부서져버리겠지만, 내 눈과 가슴 속으로 떨어진 별은 아주 오래도록 빛날 것임을 믿습니다.
‘차량진입금지/ 눈 올 때 돌아가세요/ 함양군수’ 대형 입간판이 제가 오늘 걸을 왕복 10Km의 시작점이기도합니다. 1023번 지방도로 지리산 가는 길이며, 전라도 광양, 경남 하동 지역의 소금과 해산물을 운송하는 중요한 운송로였답니다. 나는 빈손으로 그 옛날 보부상 되어 훠이훠이 아스파트 길을 홀로 걷습니다. 밤 산에서 들리던 예초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오랜 만에 조용합니다. 밤을 줍기 위해 밤나무 밑의 잡초를 베어내는 연중행사 기간이거든요. 벌초도 아울러... 지난주에는 추석을 앞두고 곳곳에서 벌초하는 소리가 대단했습니다.
가드레일에 걸쳐져 비닐을 덮어 쓴 참깨가 열을 지어 세워져 있고, 밤이슬을 피하려고 태양초 고추들도 검은 차광막에 돌돌 말려있습니다. 참깨를 베어낸 자리에는 비닐 멀칭을 하고 배추 어린 모종들을 이식해 두었는데 심각한 여름 가뭄으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잎들이 타들어갑니다. 요행이 집 가까이나 근처에 흐르는 물이 있어 주전자로라도 물을 주는 곳은 벌써 한 뼘 이상 자라났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다시 어린 모종을 다시 심어야할 판입니다.
05:47
겨울이면 눈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는 급경사의 꼬부랑길 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건설교통부’라는 글이 새겨진 동판이 1m 자연석에 붙어있습니다. 함양을 알리는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길이기도 하더군요. 지금부터는 완만한 길이 이어집니다. 얼마 전에 이삭이 패는 것 같더니만 이른 품종인지 누렇게 고개 숙인 벼도 계단식 논 사이에 보입니다. 일찍논을 둘러보러 나온 농부의 손에는 회사원이 볼펜 챙기듯 낫이 들려있습니다. 논두렁의 풀도 베고 잎도 따고 나뭇가지도 치고 수수도 베고...
가로수로는 배롱나무가 심겨져있습니다. 남쪽에 내려와서 자주 보게 되는 나무인데 백일 동안 빨간 꽃이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립니다. 지금은 키가 2m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10m 넘는 나무도 본적이 있는데 참으로 우람하고 보기 좋더군요.
06:13
오른쪽으로 흐르는 계곡물 옆에 주막이 보입니다. ‘여보게! 살다가 힘들면 쉬어가게...’ 빛바랜 현수막 글과 피죽을 올린 지붕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변강쇠와 옹녀의 무덤도 만들어 놓고 오가는 행락객을 부르고 있습니다. 性은 모두가 흥미를 느낍니다.
제가 토종벌을 키우며 보니 살림 날 때가 되면 벌통마다 3,000마리 이상의 숫벌이 태어나는데 이들은 꿀을 모으는 일도 하지 않고 가장 좋은 꿀만 먹으며 태어나는 한 마리의 여왕벌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중에 몇 마리만 교미한 후 죽고 나머지는 한달 안에 일벌들에게 다 쫓겨나 굶어죽더군요. 변강쇠 벌만 교미하는 것이겠지요.
06:24
나뭇잎들은 팔랑이고 숲은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저 부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출렁이는 나뭇잎의 수런거리는 이야기를 들을 뿐입니다. 소나무 뾰족한 잎 사이로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에서 불어오는 야릇한 바람 냄새. 경사로 15%라는 교통 표지판이 있는 곳입니다. 길섶에 있던 까투리 두 마리가 발소리에 놀라 날아갑니다. 저도 놀랍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또 두 마리의 까투리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가는 바람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미안하다. 예들아. 놀라게 해서... 그렇다고 나를 놀라게 하다니... 헐” 놀라게 할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교회 봉고차가 급경사 길을 힘들게 올라갑니다. 2주 동안 이 길을 걷고 있는데 교회 차는 처음 봅니다. 도시에서는 흔하게 보던 차량을 이곳에서는 보기가 흔치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목사여서인지 이른 이 시간 무슨 바쁜 일이 있을까 걱정도 해봅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감리교신학대학을 들어갔고, 기혼전도사를 원하던 교회의 요구에 응하느라 군제대후 결혼하고 목회를 시작했었지요. 모두 합해보니 23년간의 목회를 했습니다. 급경사 길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기만 했던 시간들... 하나님 기뻐하시는 목회를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했던 목회, 진정으로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픔에 통곡하던 순간들... 월급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서서히 몸과 마음이 탈진해 가던 순간... 은퇴한 후 산골로 가기로 했던 계획을 몇 년 앞당기기로 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설악산 쪽은 겨울에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따뜻한 남쪽을 선택했고... 바다보다는 산이 먹을 것이 풍부하리라 단순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허름한 빈집을 구해서 3년을 살았고 이제 산골에서도 살만하다고 여겼기에 경매를 통해 함양의 집을 구입하고 올 1월에 이사해서 살고 있습니다. 내 집이 없어서 나무 하나 심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집을 가꿀 여유가 생겼습니다. 취미로 토종벌을 기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돌 보아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서 사는 걱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06:38
悟道嶺(해발 773m) 정상 도착.
정상주변에 78개의 장승과 23개의 솟대 도합 101개의 상징이 나그네를 반가이 맞습니다. 흐르는 땀을 너른 주차장의 수돗가에서 씻고 웅장한 지리산제1문 문루로 올라갑니다. 운무로 가리워 보이진 않지만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27Km 지리대간을 이곳 오도재에서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소백산맥 최남단에 솟아있는 산인 智異山(方丈山, 頭流山), 높이 1915m, 동서길이 50Km, 남북길이 32Km, 둘레 320Km, 행정구역상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군, 경남 산청군ㆍ함양군ㆍ하동군 등 3개도 5개 군에 걸쳐있습니다.
J형!
여행가이자 의사인 임현담씨가 시킴 트레킹을 다녀와 쓴 글의 한 부분에서...‘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번이다.’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기약이 없습니다. 설령 같은 길을 수십 번 수백 번 오르내리더라도, 오늘 만나는 길은 내년과 다르고, 내년에 만날 길은 분명 오늘 걸었던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약속과 부질없는 희망으로 오늘을 허비하며 기약 없이 보내고 있지는 않으시는지요? 정상에 여러 詩를 자연석에 새겨 놓았는데 청매선사라는 분이 남긴 漢詩의 번역시를 적어 왔습니다.
十二覺時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은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06:50 출발
turning point 누군가에게 반드시 오는 전환점일텐데 아마도 지금의 제가 있는 곳이겠지요. 올라올 때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내려가며 보니 내리막의 경사가 더 급하게 느껴집니다. 올 봄부터 유난히 무덥더니 가을의 초입인데도 낮에는 연일 30도를 웃돌고 있습니다. 해 나기 전에 밭일이나 잡초 제거, 벌통 돌보기 등 잡일을 하고 낮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집사람과 같이 빌릴 수 있는 분량이 두 주에 8권이니 몇 달 동안 열심히 모든 장르를 망라하여 읽고 있습니다. 심심하고 고독할 틈이 없습니다. 제가 살아오며 모았던 자료와 신학관련 서적(2,500권정도)은 마지막 교회에 모두 기증하고 떠나왔습니다. 지금 제 책꽂이에는 성경과 성서사전, 성구대사전뿐이었는데 3년간 몇 권의 책이 늘긴했습니다. 책 읽는 욕심도 벗어나고 싶은데 잘 지켜지지 않는 결심 중의 하나입니다.
50여 마리의 까마귀가 정상부근의 나무와 500m 길 가의 전선에 앉아 있다가 제 주위를 맴돕니다. 며칠 전만해도 20여 마리였고 먼저 도망가더니 며칠 새 50마리로 늘었고 내가 가까이 가면 대여섯 마리가 내 머리 위로 낮게 날아오더니 10여m 앞의 전선에 앉기를 반복합니다. 위협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은 쪼이지는 않았습니다. 대담하게 점점 머리 위 가까이 날아오는데... 소름이 오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새까맣더군요. 세계적으로는 길조라던데 친근감은 못 느끼겠네요.
07:10
주막 앞을 지나 한 5분간 걸어 저 앞의 고개를 돌면 산그늘이 없어지고 햇살이 내려 쪼이기 시작합니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아침 햇살처럼 남은 인생 동안 좋은 일들이 계속되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 올라 올 때 용케 개들에게 들키지 않고 잘 지나왔는데 소리 없이 돌고는 있지만 컹컹 흰 개의 충성스런 울음이 산골을 울립니다. 이제 저 아래 집의 개도 알아버렸으니 조용히 지나가기는 애시당초 틀린 모양입니다. “그래. 안다. 이놈아! 그만 좀해라” 괜스레 임무에 충실한 개에게 한마디 합니다.
07:31
아름다운 길 안내석 부근에 길을 관람할 수 있는 조그만 정자로 들어가 팔굽혀펴기를 시작합니다. 땅에 손바닥을 짚고 코가 땅에 닿도록 굽혀 속으로 둘까지 센 후 팔을 펴기를 반복 15개로 시작하여 매일 하나씩 늘려 오늘은 30개를 도전했는데 겨우겨우 해냈습니다. 평소 팔 쓰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팔 힘을 더 늘려야겠습니다.
07:45
마을 입구에 이르니 동네 노인들 몇 분이 장에 간다며 모여계십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함양 5일장이 열리는 날이군요. 같이 모이신 것을 보니 나가는 차가 있나봅니다. 아니면 10분 걸어서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가셨을테니까요. 동네 노인분들을 디카에 담습니다.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되면 동네 앨범을 만들어 드릴 예정입니다.
07;50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고구마 밭에서 잎을 따 먹고 밤새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고라니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갑니다. 한참 안 보였는데 이곳이 그리워 다시 왔었나봅니다. 지난 겨울 결혼한 딸이 추석선물로 배를 보냈다고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문득 딸이 그리워집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져야하는데...그래서 내리 사랑이라고 하나봅니다. 이번 추석에는 경기도에 사시는 부모님을 뵈러 가려고합니다.
J형!
글이 길어졌습니다. 다음 소식은 인터넷 http://power.jegonet.com 총동문사랑방이나 19회 동기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곧 환절기인데 건강 유념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마다 형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총총....
2008년 9월 7일
제고 19회 김춘식 드림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글에는 댓글을 꼭 할거라고
내게 다짐했는데...
초등학교 마지막 체육대회를 하는 막내에게
이번에는 중간에 딴짓 안하고 모든 프로그램을
지켜볼 거라고 하고는...
어차피 지키기가 그리 쉬운게 아닌
이 둘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소리치며
오월의 싱그러움도 뭐 별게냐 하다가,
십분이 한 시간이 되는 줄 모르고
햇빛사냥하며
이제는 아니 되오는 것은
욕심되지 말아야지 손 들고 있습니다.
이리도 멋진 글을 대하며
<주향이의 막내 초등학교 마지막 운동회>.
이글을 대하니 코끝이 시큰하다.
내딸 초등학교 첫 운동화때,
나도 딸손잡고 뛰고 싶고,
맛있는 도시락 싸갖고 가서 멕여주고 싶었는데
엄마도 없이 할아버지,할머니가 내빈석에서 자리를 지켜주셨고,
머리도 제대로 못묶은채 갈비탕에 코밖고 디리 먹고 있는 사진이 있다.
마지막 운동회땐.......
내가 그때 못한 에미 노릇 벌충하느라
자리를 비울수 없이 바쁜 형편이었는데
바람 부는 운동장 한켠에서 뿌듯하게 끝까지 지켜보았지.
어릴적 에미노릇 잘못해준 빚갚느라
지금 까지 옆에 끼고 챙기느라 이몸 바쁘다.
오늘 은범이 소풍 간다는데
웬만하면 내가 김밥까지 다 싸줄것이지만
것두 너의 즐거움이리라 하여
내삐두고 있다.
따르릉~
엄마 깨소금 있어?
ㅎㅎ 잠퉁이가 기래두 지새끼 김밥 싼다고 일찍 일어 났구만.
이제사 고백인데요.
선배님 은범이 일기가 저에게는
막둥이 기르기랑 같이 가더라고요,
몇몇이.
그래서 지금처럼 댓글도 못하고,
읽으면서 나도 그랬지 공감하며
찔끔되기도 했어요.
제가 젤로 답이 나오지 않는게
에미노릇이더라고요.
애의 마음이 느껴지기에 더욱 더
반대되는 지침을 내리기도 하고
애잔한 울림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
더 굳굳하게 아이들앞에 서고 있네요.
'그녀'는 없고 '
'내 엄마'만이 있던 친정엄마가
비합리적이라고 떠들던 철없던
지난 날의 제가 에미노릇을
배워가는 길에 만난 '온니들'이
이 오월에는 참 귀하다싶네요.
넌 부모님 몇 이실 때 태어났능고?
참 신기하게도 8남매를 두신 시부모님들이
막내로 우리 남편을 보셨을때가 내가
울막내를 낳은 39살 때였단다.
둘도 많다하시는 분들이 위로 버~~얼써
일곱이나 있으니 어머니의 마음 고생이
많으셨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간장도 먹어보고 장독대에서
뛰어내려보기도 하고....
그래도 끈기있게 버티고 태어났다고
그런 시어머니 막내는 늘 뭐든지
그분들과 공유하면서 윗분들이
짝을 찾아서 정착하면서 적지 않은
눈총을 받을 이유도 만들고 그래서
미움도 받은 것을 시집오니 느끼겠더라.
나도 같이 흉도 보고 그래서 우리 남편의
이런 나쁜 점이 생겼다는둥
법적인 가족이란 한계를 즐기면서
시어머니의 어머니 역할을
비판했단다.
그런데
내가 막내를 키우다보니
그냥 작은거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는,
내가 조금만 아파도 다른 녀석들도
다 키워놓은 것도 아닌데
막내가 명치끝에 매달리더라.
그래서
어머니를 다시 재조명중이란다.
주향아!
맞아 막내는 좀 남다르더라.
난 아들 둘밖에 없지만 남편이 유학생활을 오래 하는 바람에
도저히 둘 키울 수가 없어서 다 끝나고 돌아온 후에 둘째를 낳았거든.
그래서 나이는 8년 반, 학년은 9년이나 터울이 진단다.
내가 예전에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면 그저 이 막내는 어쩌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였어.
주향이 말대로 큰 놈도 아이였는데 말이야.
내가 하도 막내 걱정을 해대니까 우리 큰 아이가 그러더라구.
"아니 해원이가 뭐가 불쌍해요.내가 불쌍하지 걘 내가 있쟎아요? "
듣고 보니 그러네.
큰 형이 있는데 왜 고 녀석 걱정을 그리했는지.....ㅎㅎㅎㅎㅎ
그러던 녀석도 이제 우리나이로 스믈아홉살이나 먹어서
아직 공부중이긴 하지만 엄마 없다고 뭐 큰 일 날 나이는 지났다.
근데 엄마는 정말 힘있는 동안은 필요한 것 같아.
결혼시켜 보니 이게 또 엄마가 있어야 하고
손주 낳으니 또 엄마가 필요하고 (친정엄마고 시엄마고 암튼 필요해)~~~~~~~~~~~~~~~~
그러니까 엄마는 완전 소모품인 거지.ㅎㅎㅎㅎㅎㅎㅎㅎ
나한테 돌아오는 거야 없지만 내가 있음으로서 자식들이 편해지는 건 확실하니까 보람있쟎아?
난 그래서 아들이 말짱꽝이니 어쩌니 하는 그런 유행어들은 좀 안했으면 좋겠더라.
그것도 사실은 그동안 남녀차별이 너무 심하고 남아 선호사상이 뿌리깊다 보니
그 반대급부로 생긴 것들인데 지금의 작태도 문제가 있는 거쟎아?
이 세상 자식들을 무조건 남녀로 나누어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인데.............................
이런 수선스러움이 지나고 나면 제대로 잡히겠지.
엊그제 경향신문에서 읽은 건데
'엄마를 부탁할 필요는 이제 없다!'
뭐 이런 제목이었어.
여자가 쓴 거야.
예전의 어머니들 같은 어머니가 요즘 있느냐?
자기일 찾고 자기 생활 찾고 자기의 노후챙기는 요즘의 엄마들이,
집안에서는 가장 힘있고 자식들의 진로며 결혼생활에까지 지대한 권력을 구가하면서
스스로 옛날 어머니가 된 것으로 착각하지 않아야한다나?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였는데 뭐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어.
나도 느끼는 건데 요즘 우리 또래 어머니들이 며느리에게 잘해 주는 건 확실한데
그게 사랑의 마음보다는 일단 가르치는 것도 귀찮고 내 집에 자주 오는 것도 해멕이기도 힘들대.
자기 스스로도 잘 안해먹고 사는 사람들은 엄청 부담은 될 꺼야.
내가 교회 가서도 그냥 못들은 척 남들 이야기만 듣고 있는데 가끔 속으로 받치는 게 있어.
명절이 끝나고 나면 하는 말들!
와서 자면 이부자리며 챙겨야 하고 귀찮아서
그날 아침에 오라고 했다는 말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구.
안그런 어머니들이 아직은 많이 계신데
그런 분들은 마치 시대를 거꾸로 가는 듯한 분위기라서 입다물고 있다니까!
난 그냥 구식으로 살 꺼야.
그래도 우리 새애기는 우리랑 잘 지내고
무엇보다도 요리도 잘하고 제식구들 끔찍하게 챙기는 거 그냥 다 보이더라구.
물론 좀 힘들었겠지만 공부는 힘안드나?
놀고 싶은대로 놀기만 하면 뭐가 되냐구요?
지 말로도 그동안에 자기가 많이 성장했댄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 뭐라도 가르쳐놓아야 그 애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꺼 아닌감?
내 생각은 이렇대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렇게 명절이 힘드느니 해서 차례를
미리 하고(?) 조상모시고 여행갔다왔다는
한 막내친구엄마가 신나서는 얘기하는데
자꾸 나는 공허함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적당한 긴장은 오히려 건강에도 좋다던데
너무 편한거만 찾는게 오히려 나태에서 오는
잡념을 쌓고
생각은 많으나 행동이 없으니
허무맹랑하기가 끝이 없어서
끝내는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어지럽게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일사천리로는 풀어내지 못
할지는 모르지만 화합이든 갈등이든
같이 풀어가는 과정속에서 얻는 정이
무엇과도 바꿇 수 없는 거더라구요.
게다가 원칙을 알고 일러주시는
어른들과 힘께 가는 길이면
꽃길이든 가시길이든
이 아니 좋을시고 일것 같아요.
몸에 좋은 거보다는 보기에 좋은것에
혹하는 막내며느리 눈에는
오이와 시금치가 제격인데
부추를 넣자시는 시어머니는
김밥옆구리를 터지게 하시는 분인데,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웰빙김밥집에
비싸게 등장한 야채김밥에서 부추를
만나니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어머니 찾으니
이제는 돌아가셔서
"거 봐라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하시던 야단이 그리운
막내며느리 저처럼요.
내가 걸어다닌 느낌이야. 명자씨
어쩜 글을 그리 잘쓰나?
항상 감탄하며 읽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하지?
하지만 우리엄마 말씀인데 사는건 걱정이래.
걱정 끝나면 죽는거라네~! 공감 가?
수욜에 만나는 걸로 알게~!